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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Oct 19. 2023

자극적인 소비재가 된 여자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카타리나블룸의잃어버린명예 #하인리히뵐


‘한 문장의 무분별한 선동을 주워 담는 데는 수백 개의 정리된 문장이 필요했다.’

‘나의 피해가 저잣거리의 팔기 좋은 물건이 된 것 같았다. 언론이 아닌 법정에 증거로 제출한 모든 것이 여과 없이 자극적인 소비재로 가판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김지은 씨는 저서 《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8년 여름, 당시 일부 언론은 안희정 측 증인들의 검증되지 않은 발언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안희정 측이 유출한 김지은 씨의 개인 진료 기록을 그대로 기사에 싣기도 했다. 이 사건을 선정적으로 전시해 놓은 포털 사이트 기사에는 악담을 퍼붓고 피해자의 외모를 비하하는 댓글이 수도 없이 달렸다.  



《차이퉁》의 비틀린 보도


사십 년가량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황색 언론의 또 다른 피해자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이다. 1974년 2월 21일 목요일, 가정관리사 카타리나 블룸은 경찰서로 연행된다. 오랫동안 수배 중인 강도 괴텐을 숨겨주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심문 내용은 고스란히 일간지 《차이퉁》 지에 유출된다. 《차이퉁》 지는 다음날부터 몹시 선정적인 보도를 이어간다. 카타리나의 고용인부터 고향의 이웃 주민들, 이혼한 전 남편, 병원에서 막 수술을 받은 카타리나의 어머니까지 찾아가 인터뷰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차이퉁》 지의 구미에 맞게 뜯어 붙이고 자르고 왜곡한다. 


《차이퉁》 지는 카타리나가 영리하고 이성적이라는 증언을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다’라는 말로, 범죄성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을 표명한 말은 그녀가 "전적으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p.38)라는 표현으로 바꾼다. 카타리나의 어머니가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한 것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p.107)라고 각색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카타리나의 탓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시체 안치소를 떠나는 순간 엉엉 울었음에도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극도의 변태에 가깝다.’(p.117)라고 보도한다. 


폭력은 황색 언론의 비틀린 보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차이퉁》 지의 보도를 본 사람들이 카타리나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아파트 우편함에는 비난과 욕설이 적힌 편지가 쌓인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는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고 무례한 질문을 던진다. 하루 종일 울리는 집 전화를 받으면 모르는 사람이 음담패설을 퍼붓는다. 물론 괴텐을 아파트에서 몰래 빠져나갈 수 있게 도운 것은 사실이니, 이에 대해서는 카타리나에게 죄를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뒤틀고, 아파트와 차량을 범죄 수익으로 샀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은 《차이퉁》에 진실 조작에 대한 죄를 물어야 한다.



진실을 묘사해 보려는 뵐의 노력


저자 하인리히 뵐의 서술 방식은 《차이퉁》 지의 보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뵐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모두 꿰뚫을 수 있는 3인칭 전지적 시점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보이는 장면을 최대한 상세하게 옮긴 기사를 읽는 느낌을 준다. 또한 최대한 장면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가능한 한 피가 흐르게 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육체적 폭력의 묘사 역시 피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으로, 즉 보도의 의무에 대한 최소한으로만 제한해야 한다.’(p.91)는 식으로 보도의 윤리를 강조한다. 


취재 원천에 대해서도 대비되는 입장을 보인다. 《차이퉁》 지는 심문할 때 거론된 세세한 사항을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반면 뵐은 소설의 시작부터 ‘몇 가지 부차적인 원천과 세 가지 주요 원천’(p.9)에 대해 언급한다. 원천을 공개함으로써 허구라는 의혹을 없애고 서술자의 객관성에 힘을 얹는다. 뵐의 시도는 사건의 경과를 ‘물 흐르듯’ 정리하는 것이다. ‘일종의 배수 혹은 물 빼기 작업’(p.11)이다. 황색 언론으로 인해 고여서 썩으려는 웅덩이의 물을 전부 모아 ‘오히려 논리적으로까지 설명’(p.10) 할 수 있다는 것을 검증하려고 했던 것 같다.


카타리나 또한 언어를 엄밀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녀는 경찰 심문 과정에서 몹시 꼼꼼하게 모든 문장과 표현 하나하나를 검토한다. ‘치근거림’ 대신 ‘다정함’이라고 쓰여 있는 조서에는 절대 서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뵐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사용했지만, 실은 1972년 본인이 《빌트》 지의 보도 방식을 비판했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인다. 소설 첫 머리에 《빌트》 지와 연관성을 부정하고 있지만, 오히려 현실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소설의 서술 방식과 주인공 카타리나의 성격을 통해, 상황을 진실에 가깝게 서술해 보려는 뵐의 노력이 드러난다. 



비인간적인 것은 누구일까


아마 카타리나는 심문 조서가 자신의 의도와 어긋나지 않는데 가장 주의를 기울인 것 같다. 조서를 증거로 재판을 받을 테고, 언론에 보도가 된다 해도 조서가 근거로 쓰일 테니 말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차이퉁》의 보도 행태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카타리나는 《차이퉁》이 심문할 때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하나같이 왜곡되고 오도된 진술로 알게 되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p.62)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가 이런 오욕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주고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 묻는다. 담당 검사는 중상일 수 있는 언론 보도에 대해 개인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폭력은 이미 그녀의 일상을 깊게 파헤치고 망가뜨렸다. 카타리나가 소송을 준비하고 마치기까지 걸릴 몇 년 간의 세월 동안 그녀 혼자 모욕을 감당해야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녀는 몸을 뚫고 나올 것 같은 분노를 견디지 못한다. 분노는 표출하려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증오로 변한다. 집 안에 있던 술병과 소스 병을 벽에 던지면서, 카타리나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으며, 너무나 확신에 차 있고 충분히 설득력 있어’(p.81) 보일 정도다. 황색 언론의 기사로 시작된 폭력이 익명의 편지와 전화, 시선에 의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물체가 부서지고, 결국에는 카타리나가 《차이퉁》의 기자 퇴트게스를 총으로 쏘기에 이른다. 2차원적 문자로만 존재하던 폭력은 3차원 공간으로 번져 나간다. 


퇴트게스는 죽기 전날 썼던 기사에서 카타리나를 가리키며 ‘비인간적인 인간을 인간적으로 대해야 하는가?’(p.118)라고 묻는다. 그런데 카타리나와 퇴트게스 중 누가 더 비인간적인 것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비인간적’이란 ‘사람답지 아니하거나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행위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퇴트게스와  《차이퉁》 지도 비인간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차이퉁》 지는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선정적으로 보도를 했을 것이다. 이익 창출을 위해서, 카타리나라는 한 사람의 삶을 잔뜩 가공해 찢고 부수어 맛볼 수 있도록 판매대에 올렸다. 이것 또한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카타리나의 10년 후


김지은 씨는 2019년 9월 대법원으로부터 피해 사실을 인정받았다. 사건이 마무리되면 모든 것이 원상 복귀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차 가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회사나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김지은 씨 역시 돌아갈 직장과 일상이 사라진 뒤였다. 황색 언론의 또 다른 피해자 카타리나는 8년에서 10년 동안 형무소에서 살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살인범의 정부’ ‘테러리스트의 공조자’ ‘음탕한 공산주의자’라는 날조된 혐의에 살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카타리나는 형기를 마치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나는 소설에서만큼은 현실과 다른 결말이 펼쳐지기를 소망한다. 카타리나는 삼십 대 중반에 출소한다. 이전에 모아둔 돈에 꽤 많은 이자가 붙어 있다. 자기 대신 아파트 대출을 갚아준 블로르나에게 돈을 주고 아파트를 되찾는다. 《차이퉁》 지는 그 이후에도 허위 보도를 계속하다가, 여러 건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휘말려 문을 닫았다. 카타리나는 지역 사회로 아무 문제 없이 복귀한다. 황색 언론의 입김이 사라진 곳에서, 괴텐과 함께 ‘요리사 서비스가 훌륭한 레스토랑’(p.132)을 운영하는 미소가 가득한 그녀를 상상한다.




#민음사 #소설 #북스타그램 #서평 #대체텍스트 #언론폭력


(대체 텍스트, 이미지 설명) 회색 천 위에 책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 오른쪽에는 흰 꽃 송이가 네 개 있다. 책 표지는 책 표지 위쪽 절반은 단발머리 여자가 왼손을 턱에 살짝 대고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흑백으로 그린 그림이 들어가 있다. 책 표지 아래쪽 절반은 흰색이고, '세계문학전집 180'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하인리히 뵐 · 김연수 옮김'이 쓰여 있다. 책 표지 좌측 하단에는 출판사 이름인 '민음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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