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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 Jan 26. 2022

웃음의 역치


1. 재미있는 사연을 읽어주는 라디오에 내 경험을 응모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이 사연이 몇 주 연속으로 우승할만한 재미있는 사연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응모했는데, 우승은 커녕 선정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이유로 (사연에 아주 약간이지만 선정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 이 사연을 이해하려면 2가지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배경지식을 설명하다 보면 분량이 너무 길어지니까) 선정이 안 되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절대 내 이야기가 재미없어서 선정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2. 첫 번째 배경지식은 내 고등학교 생활이다. 나는 20년간 완전 깡촌에서 자랐고 남자고등학교를 나왔다. 남고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여고가 있었는데 두 학교 사이, (정확히는 남고에 더 가까웠다.) 체육관이 하나 있었다. 비가 왔거나 혹은 실내체육을 배워야 하는 시간이면 이 체육관을 이용하게 됐고 우연히 여고랑 체육시간이라도 겹치는 날에는 남고생 특유의 허세를 부리고 여고 친구들을 잔뜩 의식하며 체육 수업을 했다.


“야! 패스해! 패스하라고! 아 뭐하냐고 이 씨XX끼야! (욕하면 멋있는 줄 앎)”

“아 골!!! 고ㅗㅗㅗㅗㅗㅗㅗㅗㅗㄹㄹㄹ~~ (축구 아니고 농구에서 골 하나 넣고 세리머니)”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운동을 좋아는 하지만 재능은 없어서 여고애들 앞에서 망신이나 당하지 말자… 는 마인드로 조용조용 체육수업에 참여했다.


3. 두 번째 배경지식은 그때 당시 우리 학교에는 판치기가 유행을 했다는 것이다. 지역별로 일컫는 단어가 조금씩은 차이가 있는데, 판치기란 책 위에 각자 동전을 올려놓고 번갈아가며 책을 퉁 퉁 쳐서 동전이 모두 앞면, 뒷면이 나오면 그 동전을 가져가는 일종의 사행성 도박행위였다. 물론 우리 학교는 미성년자들이 벌써 사행성 동전 따먹기 한다면서 판치기를 엄격하게 금지하셨다.





4. 내가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는 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배구수업이 한창이었는데 50분 수업 듣고 10분 쉬는 시간을 가지려는 찰나에, 여고에서 체육수업을 듣기 위해 체육관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아는 여고생 한 명도 없었지만 괜히 어색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수선하던 상황에서 여고 체육선생님이 우리 체육선생님한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상당히 훤칠한고 열정넘쳐보이는 젊은 남자 선생님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XX 고등학교 선생님이시죠?? 하하.. 저는 XX여고 체육교사 000이라고 합니다.”

“아 예, 예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하하”

“다름이 아니라… 제가 너무 주제넘은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남학생 둘이 화장실에서 그… 동전 따먹는 거 있지 않습니까?? 하하… 그걸 하고 있더라고요… 너무 시끄럽게 해서 체육관 관리인 아저씨한테도 한 말씀 들은 것 같던데… 네…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 그래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넵…”


5. “집합!!! 집합!!!!!”


당시 우리 체육선생님은 학생주임 선생님도 같이 겸하고 계셨다. 내가 고등학생 때에도 체벌을 절대 금하는 분위기긴 했지만 내가 자란 곳은 아직 시골이어서 그런지 단체기합, 체벌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었다. 나는 두 선생님의 대화를 듣고 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 운동장 오리걸음을 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30분 뒤에 허벅지 근육이 터지는 게 아니라 웃다가 뱃가죽이 터지게 될 줄은 그땐 알지 못했다.


6. “선생님이!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어요. 예, 화장실 간 새끼 나와” 존댓말과 비속어를 함께 쓰는 기적의 화법으로 우리의 정신을 흔들어 놓으시던 선생님은 목소리가 엄청 크셨는데, 체육관 실내에서 소리를 그렇게 치시니까 쩌렁쩌렁 에코까지 가미되었다.


“안 나와! 안 나와! 화장실 간 새끼 안 나와요!! 선생님이 다 알아요, 알고 물어보는 거예요! 화장실 들어가는 거 다 봤어요!”


여기까지만 해도 남고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다들 눈감고 손들어, 자수하면 봐줄게”의 수순을 밟는 듯했지만, 문제는… 선생님과 우리의 세대차이로 판치기를 다른 단어로 표현하는 것에 있었다.


“옆에 여고 선생님이 알려주셨어요!! 화장실에서 딸딸이 친 새끼 나오라고!!!”




7.????????????



8. “선생님이 다 알고 물어보는 거예요. 화장실에서 딸딸이 친 새끼 나와, 안 나와? 나와! 셋 셀 때까지 안 나오면 선생님이 지목한다. 하나 둘 셋!”

“오케이, 김 XX!! 일어나! 안 일어나! 일어나! 니 며칠 전에도 교실에서 딸딸이 치는 거 내가 다음에 걸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그리고 방금 화장실 갔어 안 갔어!! 선생님은 거짓말만 안 하면 된다고 했어 안 했어!!”

“아니. 아… 아니… 그거 아니에요.. 아… 그거 아니라고요.. 아… 아…. 아 진짜 아… 아 진짜”

“뭐가 아니야!!”


9.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내 고향은 완전 시골 중에 시골이기 때문에, 초등학교도 하나 – 중학교도 하나 – 고등학교도 하나뿐이다. 전학을 가지만 않는다면 모든 친구들은 최소 10년 지기가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지목받은 김 XX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친해진 내 친구였는데 그렇게 난처해하는 표정은 처음 봤다.




10. “화장실 갔어?”

“아 갔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뭘 그런 거 아니야, 니 딸딸이 친 거 증인도 있어 이 새끼야! 그리고 누구랑 쳤어. 딸딸이를 어떻게 혼자서 쳐! 누구랑 쳤어! 여기서 누구야, 안 말해? 빨리 안 말해???”


11. 그걸 혼자서 안 하고 어떻게 둘이서 할까. 이 쯤되자 체육수업을 하러 모인 여고생들 쪽에서는 대놓고 경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남자애들은 상황을 이해하고 킥킥거리다가 몇 명은 대놓고 빵 터지기까지 했는데 그게 오히려 우리 선생님의 심기를 자극했다. 분을 못 참으신 선생님은 홀로 일어서 있는 김 XX한테 성큼성큼 다가갔다. 우린 뺨이라도 때리는 건 아닐까 숨을 죽이면서 그 상황을 지켜봤다.


12. “너 뭐야, 그리고 딸딸이를 어떻게 쳤어. 뭐가 있어야 칠 거 아니야. 어 이거 뭐야. 너… 이 새끼…… 체육시간에 아예 이런 걸 가지고 와??”




13. 당시 교과서중에서는 국사책이 가장 두꺼웠기 때문에 판치기를 할 때 (뽕을 넣기 쉬운) 국사책을 많이 애용했다. 김 XX에게 다가간 체육선생님께서는 XX이가 몸으로 필사적으로 가리고 있던 국사책을 발견하시고 집어 드시더니 국사책 모서리로 XX이의 가슴팍을 툭 툭 밀치셨다. “너… 아예 체육시간에 딸딸이를 치겠다고 국사책을 가지고 와서 국사책으로 딸딸이를 쳐??? 참나… 넌 끝나고 학생부로와. 징계야”


14. XX 이에게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그렇게 폭풍 같던 10분이 지나갔다. 우리 반 애들은 그 뒤로 일주일은 그때 체육선생님의 분노와 XX이의 억울했던 표정, 여고생들의 벌레만도 못한 쓰레기를 바라보는 표정을 재연하며 뱃가죽이 찢어지도록 웃을 수 있었다.




15. 그리고 XX 이는 고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나는 그때 웃음의 역치가 많이 높아져서 이젠 잘 웃지 않는 성인으로 자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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