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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 Jan 26. 2022

레이저 제모 후기


1. 블로그를 시작한 지 1년이 훌쩍 지났다. 1년 정도 전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큰 지출이 생겼고 돈을 벌기 위해서 블로그를 시작했다. 과외를 하고 싶었지만 실습 중간에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 학생 신분에 부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따봉충이 되기로 결심한 것.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처럼 모든 음식을 맛있다고 하는 맛집 블로그를 운영한 지 1년. 이 글은 처음으로 사악한 마음으로 쓰는 것이 아닌 내 진심이 들어간 글이다. 레이저 제모 시술을 고민하고 계신 분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드리고, 내 가치관에도 큰 변화가 온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를 글로서 남겨두고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돈 받고 썼다는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 어느 병원에서 시술받았는지 적어두지 않겠다. 개인 쪽지나 댓글 달아주시면 대답은 해드리겠지만


2. 남성수염 제모로 유명한 모 의원에 전화로 예약을 하고 5월 31일에 찾아갔다. 거긴 나처럼 시커먼 남자들 6명 정도가 마취크림을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고 앉아있거나 얼음찜질을 하고 있었다. 카운터에 가서 이름을 말하자 처음 방문하신 분들은 상담을 해야 한다며 상담실로 안내해주셨다.


원장실로 들어가서 어떻게 오셨냐길래 권유해준 대학교 동기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아 00님, 서비스에 참 만족하신 것 갈았는데, 요즘은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하하!"라고 하신다. 솔직히 여기 다 똑같이 시커멓게 생긴 남자들이 하루에만 200~300명씩은 왔다 가는데 어떻게 기억을 할까. 분명히 기억 못 하실 텐데도 저렇게 말씀하시는 대범함, 서울 한 복판에 빌딩을 크게 세운 의사는 실력만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부작용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는데, 뻔한 이야기라 성공한 의사의 상담실은 어떤지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 정말 깜짝 놀랐는데 뒤에 해리슨 19판이 꽂혀있었다. 해리슨은 의료인들의 성경 같은 것으로 2015년에 19판이 발행되었다. 아니 레이저 제모만 하시는 분이 아직도 새로운 의료지식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해리슨 19판을 산 것일까! 하루에 몇 쪽이나 읽으시는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믿음이 갔다.




3. 마취크림을 바르기 전에 구레나룻을 어디까지 남길지 자기 얼굴에 빨간펜으로 직접 칠해야 한다. 아마 구레나룻의 목숨을 거는 남자들의 수염을 제모하시다가 실수로 구레나룻까지 제모하시고 문제가 많으셨던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남자들이 하나같이 모여서 거울을 보며 빨간펜으로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엄마 화장하는 거 따라 하는 초등학생 같다. 그렇게 기다리면 얼굴에 마취크림을 발라주시고 시술실로 이동한다.


3-1. 시술실 안에는 조금 큰 다리미판 같은 것이 있고 거기에 누워야 한다. 그러면 간호사 선생님께서 눈에 테이프를 붙여주시고 안대까지 씌워주신다. 이때까진 안대도 하는데 굳이 왜 테이프까지 붙이는지 의문이었으나 이 의문은 나중에 해결되게 된다. 누워있으면 1분도 안 돼서 원장님이 들어오시는데 "시작할게요"라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얼굴이 센 바람이 불어온다. 이 바람으로 안대를 한 상태여도 어디에 레이저가 들어올지 알고 대처할 수 있고 / 타는 냄새도 날려주고 / 통각과는 또 다른 자극을 주니 통각이 조금 덜 느껴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에 팟! 처음으로 제모를 시작했다. 이 전까진 레이저 제모의 아픔을 예상했을 때,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팟! 하는 순간 나는 "1300P가 넘는 해리슨 모서리로 내 볼을 찍어 버리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 해리슨을 읽는 용도로 구입하신 게 아니라 시술용으로 구입하신 거였구나." 이렇게 둔탁하고 깊은 통증일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어?"라는 말을 했다. 사람이 순간적으로 너무 아프면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어마디 비명을 지른다.


양 볼을 끝내고 턱을 시작하는데 황소개구리처럼 아랫입술에 바람을 불어넣으라고 하신다. 정말 지옥 같았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 빨리 끝난다는 생각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 통통해진 아랫입술을 해리슨으로 찍어버리셨고 당연히 아랫입술에 바람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니 허허! 이러면 제가 수염을 잘 조준할 수 없어요! 다시 바람 불어넣으세요!"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당연히 풍선이 쪼그라들지, 그럼 그게 풍선 탓이냐 바늘 탓이지 라는 말이 너무나도 하고 싶었으나 꾹 참고 아랫입술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추천해준 친구가 "니 오열한다고" 말했던 인중제모 차례가 왔다. 인중도 마찬가지로 바람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너무나도 공포스러워서 팔다리가 떨렸다. 인중에 있는 여드름을 잘못 짜도 너무 아픈데...... "자 인중 할게요, 윗입술에 바람~" 하셔서 인중에 바람을 불어넣고 , 팟! 하고 터뜨리는 순간 옛날에 봤던 사극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송일국의 이마를 인두로 지지는 장면인데, 이쯤 되면 제모도 상당 부분 진행되어 타는 냄새도 진동을 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인두로 지지는 게 이거랑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든다. 아니 인두로 지지니까 당연히 털이 안 나겠지.



4. 지옥 같은 10분이 끝나면 간호사 선생님께서 안대를 벗겨주신다. 나는 그제야 눈에 붙인 테이프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첫 째는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을 흡수해서 남자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함일 것이고, 두 번 째는 살의 가득한 눈초리로 원장님을 쳐다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임을 깨달았다.


첫 시술을 끝내면 원장님께선, 수염의 굵기가 어떤 상태인지 말씀해주신다. (같은 곳을 방문했던 대학 동창들과 이야기해보면 주로 일반인 / 전현무 / 전현무 이상이라는 등급을 사용하시는 것 같다.) 지독한 통증에 정신이 없는 상태로 도살장에 낙인찍히는 돼지처럼 (그 등급에 따라서 시술의 횟수가 정해지므로, 실제로 도살장에 낙인찍히는 돼지 같은 기분도 든다.) 등급 배정을 기다려야 한다. "음.... 제가 지금 제모를 해보니까 수염 굵기가 말이죠~~" 하시는 원장님. 그제야 나는 원장님의 턱과 인중이 수염으로 거무튀튀한 것을 발견했다.


5. 그때 당시는 원장님한테 드는 원망과 배신감이 상당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판단인 것 같다. 자기도 그 시술을 받아봤다면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남들에게 이렇게 마구잡이로 시술을 행할 순 없을 것이다.


6. 이 병원은 4차 시술 비용까지 일시불로 결제해야 한다. 여성 제모는 그때 그때 비용을 지불하던데 남자는 왜 4차까지 미리 결제해야 하는가..... 그건 진짜 XX게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미리 결제한 금액이 아니었을 거라면 2차 시술 안 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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