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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천개의 품

앗, 실은 공연이 취미입니다만

가을학교축제-사제공연후기

by 화요일
얘들아, 이 노래. 어때?

어, 좋은 데요?!

그럼 축제 때 같이 공연해 볼까.



시작은 이랬다

딱 맞는 노래가 있었고 딱 맞는 아이들이 있었고 딱 맞는 무대가 있었다. 학교 축제 한 달 전, 에너지 넘치고 끼 있는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분명 재능은 있는데 선뜻 공연할 용기를 못 내는 아이들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었다. 부끄러움에 창피함까지 만렙인 사춘기 중3아이들이 자진해서 공연을 신청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란 걸 알기에



조피디, 인순이의 <친구여>

아직 지난 북콘서트의 너무 진한 여운이 남아있었고 아쉬운 노래실력을 다듬어 다시 한번 공연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지난 학기 동안 학교에서 함께 읽었던 <긴긴밤>과 내 수업의 모토 "All right"이 메인 가사인 이 곡이 안성맞춤이었다. 언젠가는 한번 아이들과 제대로 불러보고 싶었다. 그 노래 제목은 바로, <친구여>, 국민대표 가수인 인순이가 메인 보컬인 이곡은 가사가 귀에 콕콕 박힐 만큼 매력적이고 조피디의 랩은 중3아이들이 따라 부를 만큼 중독성이 있었다. 게다가 가사도 좋았다.


우리들의 얘기로만
긴긴밤이 지나도록
when the
time is alright
it's way to survive
기다려 hold on
사랑들은 하고 있나
많은 것을 약속했나
힘들어도 try
포기하지 말아
it will be alright
alright


고음 보컬파트가 힘들긴 하지만 연습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자신감에 추석 상여금을 과감히 투자해서 보컬학원에 3개월 등록해 버렸다. 인순이의 노래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다른 한 곡은 잔나비의 노래였다. 무조건 이 곡이어야 했다. 가사도 좋은 데다가 스산한 가을에 딱 맞는 분위기가 나를 홀렸다. 부드러운 보컬 실력을 가진 K양을 섭외했고 기타를 잘 치는 Y양도 설득했다. 중학교 졸업 전 추억도 쌓을 겸 한번 해보자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ok 했고 이렇게 팀이 꾸려졌다. 노래는 두 곡이고 곡의 분위기에 따라 구성원은 다르지만 팀은 하나다. 이름하여 "The Alright Band".




연습 또 연습

추석 전에 팀을 꾸리고 대략의 일정을 정한 후, 연휴가 끝나고 바로 맹연습에 돌입. 하루에 두 번 매일 연습한다. 아침 8시 20분에는 발라드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를 연습하고, 점심시간에는 신나는 노래 <친구여>를 연습한다.


잔나비의 노래는 수줍음이 많은 여학생들과 부르고 인순이의 노래는 혈기 넘치는 남학생들과 불렀다. 아침 일찍 K양은 졸린 눈을 비비며 영어교실의 문을 연다. 한두 번 워밍업을 하고 세 번쯤 노래를 부르면 막힘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종종 가사가 막히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분위기는 진짜 가을 느낌 그 자체다. 기타의 소리가 작아서 귀를 기우리면 기계음이 아닌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멋지다. 거기에 떨리는 여인 둘의 목소리가 얹어지니 완벽하진 않아도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 기타 선율 하나에 의지해 노래를 이어나가는 것이 묘한 집중력을 발휘하게 해서 잔잔한 음악이라도 더욱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기타와 목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작은 실수라도 확연하게 티가 난다는 게 함정. 무던한 Y양은 작은 실수에 난감해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역할을 잘 해냈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연습했음을 눈에 띄는 실력변화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노래 <친구여>는 랩과 멜로디가 단조롭지만 드라마틱한 변화와 화려함이 있어 정확한 곡의 이해와 많은 연습을 필요로 했다. 방과 후에 남아 연습을 해도 워낙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노래라 세 번 정도 부르고 나면 모두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과자에 컵라면에 수시로 에너지 수혈을 하면서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이 곡은 부르면 부를수록 흥이 나고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잘 때도 걸을 때도 그 멜로디가 귀에 맴돌았고 그 만큼 열심히 연습했다. 나만 그런건 아니었다. P군은 길고 긴 랩가사를 단번에 암기해 냈고 L군은 비보잉실력을 발휘해 안무를 구상해 냈다. 재롱둥이 K군은 귀염뽀짝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이런 성실과 열정의 조각이 모여 멋진 무대의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의상

출산은 다 끝냈지만 아직 남아있는 D라인의 흔적은 이런 특별한 순간에 나의 앞길을 막는다. 적당한 무대의상을 고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국내외 사이트를 뒤져 반짝이, 가죽 등등 화려한 옷을 고르고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동생의 추천을 받아 옷을 샀지만 내 몸에 맞는 옷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입과 환불을 두세 번 하고 겨우 고른 반짝이 치마. 적당한 웃옷이 없어 자나 깨나 고민하다가 민소매 조끼를 반짝이 치마 위에 입고 화려한 장신구를 해서 화려함을 더했다. 그다음 문제는 헤어와 메이크업, 주변에 수소문해 업체를 찾아봤지만 출근 전에 모든 것이 끝나야 하므로 새벽 5,6시에 업체를 가야 하고 공연당일 오전에는 체육대회가 있어 운동장에서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야 하므로 메이크업과 헤어에 돈을 쓰는 건 무리수였다. 결국 포기하고 고대기에 화장품에 바리바리 싸들고 출근했다. 쉬는 시간에 서툰 솜씨로 셀프 단장을 끝내고 가장 화려한 옷을 찾아 입고 준비를 마무리한다. 이게 뭐라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이렇게나 진심이다.




공연 한 시간 전

체육대회는 일찍 끝났으나, 공연 일정이 늦어졌다. 가뜩이나 집중하기 힘든 나이의 관객들인데 엉덩이를 마룻바닥에 붙이고 양반다리를 하고 1시간 앉아있는 것은 수업을 몇 시간 듣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자리를 이탈하고 누워있고 돌아다니는 아이들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보이고. 흩트러진 청중들의 집중력을 휘어잡을 만큼 강력한 무대를 만들어야겠다는 괜한 오기가 생겼다. 공연순서가 다가오자 팀원들을 불러 모으고 동선과 준비물을 다시 한번 챙긴다. 마이크와 의자 등을 준비해 달라고 운영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뭉클한 시간

가느다란 기타 소리, 떨리는 목소리, 환호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엉켜 잔잔한 감동의 순간을 만든다. 천천히 편하게 그저 말하는 것처럼 노래하고 연주하라고 곁에 앉은 소녀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의 노래를 함께 불러달라고 앉아있는 아이들에게도 소통의 눈빛을 전한다. 그 흐릿한 메시지를 받아들인 것처럼 아이들은 소리 내어 노래를 따라 불렀고 휴대폰을 들어 빛을 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리를 응원하는 따스한 메시지가 우리에게 다시 수신되었다. 노래는 이렇게 깊게 넓게 스며들곤 한다.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을 새겨요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꽂고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흥분의 시간

두 번째 곡이 시작되었다. 강한 비트의 전주가 시작되고 첫 번째 랩이 시작되었다. 문워크를 하며 등장하는 L군의 뒤로 환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젠 내 차례, 배운 데로 배에 힘을 주고 입을 크게 벌려 정확하고 자신감 있게 노래한다. 노래 한 음, 가사 한 글자에도 힘을 실어 호소하듯 정성스럽게 노래한다. 랩을 하던 아이들이 관중석으로 뛰어들고 또 다른 P군이 다시 랩을 시작한다. 행진하듯 노래하는 아이들 뒤로 열광의 환호성이 이어진다. 함께 함은 이렇게도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변치않는 건, 하나!

첫 발자국을 떼는 용기만 낸다면 결국 해낼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은 선생님이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았고 결국 공연을 해냈다. 해보겠다고 결심하고 일단 시작하자, 성실함과 끈기로 연습이 이어졌고 매일 연습을 탄탄히 해내니 무대를 즐기는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었다. 실은 아이들에게 이런 경험을 주고 싶었다. 작은 성취감, 내가 뭔가를 해냈다는 짜릿함. 새로운 경험을 도전하고 끝까지 해냈다는 이 느낌, 이 충만함을 아이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 그 어떤 위대한 것도 결국 작은 용기와 시도로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이 귀한 성취감을 꼭 기억해서 세상에 차고 넘치는 재밌고 멋진 경험들을 모두 시도해보길~




와, 오늘 우리 진짜 멋지게 잘했다.
도전하길 잘했지?


네!! 진짜 재밌었어요~





#라라크루1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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