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기억 속의 이야기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어느덧 마흔이 넘어버렸다. 학창 시절에 마흔은 불혹이라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는 나이라고 배웠다. 흔들림이 없기는 개뿔. 그건 공자님한테나 해당되는 이야기겠지. 나는 아직도 밤 11시에 진짬뽕을 먹을까 말까의 유혹에도 흔들리는걸. 나이 50이 되어도 지천명은 개뿔. 이러고 있을 것 같다. 분명히.
게임하느라 밤샘을 밥먹듯이 하고, 꾸준히 유지하는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뿐이며, 하루에 다섯 끼 정도는 먹어줘야 좀 먹고 산다고 어디 가서 내세운다는 정신으로 지내온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본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더 적게 남아있을 확률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겠니?라고 물어보면 내 대답은 단호히 No! 다. 남편을 다시 못 만난다느니, 지금 태어난 아이들이 소중해서라느니 그런 입 발린 소리보다도 그저 이제껏 살아온 날들을 다시 살기가 귀찮아서가 가장 큰 이유이다(글을 쓰면서도 스스로가 좀 한심해지기 시작한다).
인생을 꼭 돌이키고 싶을 정도로 심각한 과오가 없다는 것이 나름대로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증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평탄이든 굴곡이든... 그냥 귀찮다. 어렸던 시절에 평온하고 따뜻하고 자유로웠던 기억이 딱히 떠오르질 않는다. 그렇다고 좋지 않은 상황에서 살아온 것도 아닌데. 중산층 교육자 집안의 막내딸로 적당히 사랑받으며, 자식에게 올인하는 어머니 덕분에 내가 하고픈 것들은 대충 다 하고 살았는데도 이렇다.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래도 굳이 어릴 때의 좋았던 기억을 하나만 꼽아본다면, 내가 기저귀를 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인 것 같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기도 하다. 당시 살던 집은 대문 하나에 넓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서너 가구가 함께 사는 옛날 주택이었다. 화장실은 푸세식이어서 빠져 죽을 위험이 있으니 아기 출입금지 구역. 어린 나를 위한 아기용 오리변기가 마당 한켠에 있었다. 왜 마당인지는 모르겠다. 어머니 아버지... 저의 프라이버시는 어디에...
왠지 몰라도 그날 자고 일어나니 집에 나 혼자 있었다. 오전시간에 볕이 참 따스했던 걸로 보아 늦봄이나 초가을 무렵이 아니었을까. 혼자서 오래 방치되지는 않았지만 하필 그 사이 모닝똥이 마려웠던 나는, 호다닥 마당으로 뛰쳐나가 오리변기에 앉아서 쾌변을 했다. 엣헴, 엄마가 없어도 나 혼자 변기에 응가 잘 한다고! 스스로 약간 뿌듯해서 우쭐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똥을 싸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는걸? 엄마 엄마 몇 번 부르고서는 조금 기다리다가 무섭고 서럽고 부끄러운 마음에 우앙,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왕왕 큰 소리로 울고 있자니, 바로 옆집에 살던 초등학생 언니가 쪼르르 달려 나와서 나를 달래주며 엉덩이도 씻겨주고 변기도 비워주고 옷도 입혀주고선 엄마가 올 때까지 놀아주었다. 세상에. 지금 다시 떠올려도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그 언니도 기껏해야 10살 내외였을 텐데. 우리 집 어린이들도 7-8살 어린 막냇동생 똥 씻겨주기까지 6년의 세월이 걸렸건만...
지난 인생을 다시 되돌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의 호의와 배려 속에서 꽤나 행복한 시간을 살아온 덕분이 아닐까. 오랜만에 꺼내어본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을 돌이켜보며,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억을 선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