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RICO Sep 29. 2020

외할머니

엄마의 엄마

우리 외할머니는 꽤 오래 사셨다. 어릴 적에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에 찍혀있는 '1920년도' 숫자가 참 충격적이었던 적이 있다. 2012년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8명의 자식들을 뼈 빠지게 키워왔다. 2020년이 된 현재,

현대사회에서 엄마에게 8명의 자식을 키우라고 했으면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


대들보이던 외할아버지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80년도 중반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뿐, 할머니 댁에 가면 흑백사진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내가 알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외할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이 안된다.


외할머니는 늦은 나이에 한글을 배웠다. 할머니도 전쟁의 피해자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태어나서 한 세기가 지나기 전까지 부진했던 한국사회의 교육환경에서 그 흔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가나다를 써 내려가던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이 떠오른다.


항상 명절이나 제사 때, 할머니를 뵙고 돌아가면 굽은 등으로 지팡이를 짚고 우리를 마중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항상 화를 내시면서 엄마 말을 좀 잘 들으라고 소리치시던 할머니였다. 놀랍게도 내 휴대폰에 그 장면이 남아있었다. 물론 화질은 정말 안 좋았지만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할머니의 소중한 모습이다.


다른 할머니들과 다르게 항상 화를 내시는 모습 때문에 어린 나이의 나는 오해도 많이 했었다. 나를 싫어하시는 건지, 내가 귀찮은 존재인 건지 나는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건강하시기만 하던 할머니도 어느 날부터 몸이 급격히 둔해지셨다. 자주 산책을 하시던 할머니가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엄마가 내게 할머니에게 인사 잘 드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게 무슨 말인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곧 돌아가실 수도 있구나.


그러던 어느 날, 2012년 가을날 새벽. 엄마와 아빠는 새벽에 택시를 타고 할머니 댁으로 향하셨다.

나는 시험기간이라서 갈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빨리 와야 된다는 말이었다.


그다음 날 과학시험을 치던 도중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의 부고 소식이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장례는 할머니 댁 근처 마을의 장례식장에서 행해졌다. 처음 보는 어른들이 많이 모였다.


정말 화가 났던 건 다들 술을 먹으며 깔깔대거나, 누가 잘났네 하며 떠들고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엄마의 친구들이거나, 삼촌이나 이모들의 친구들이었다. 정말 민폐라고 생각했다.

외숙모나 엄마, 그리고 이모는 서빙을 하며 음식을 나르고 있었고 나도 오자마자 일을 거들었다.


향 뒤에 걸쳐있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니 실감이 났다. 정말 돌아가셨구나 하고.

엄마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였다. 늦은 저녁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엄마는 내 옆에 누워계셨다.

그때 엄마는 슬프지 않으냐고 물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장수를 하셨기 때문에 호상이라고 하셨다.

엄마는 참 강한 존재다라는 것을 그때 깨닫는 순간이었다.


외할머니의 발인이 끝나고 운구를 하는데, 어허이 달공을 그때 처음 들었다.

현대의 장례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진행이 되자, 나는 그게 참 신기하면서도 무서웠다.

그때 엄마와 이모는 뒤에서 많이 우셨다.


엄마는 참 강한 존재다.

하지만 외할머니에게 엄마는 나이를 먹어도 애였고 말괄량이였다.

말괄량이에게 부모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슬픔이었던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뒷모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