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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현기 May 13. 2021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철학자처럼 생각하기 1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새뮤얼 이녹 스텀프. 제임스 피저 지음/이광래 옮김/열린 책들/790p.

오로지 살아야 하는 목적에 충실하며 보낸 지난 시간들이 어느 순간 멈춤이 생긴다.
이곳저곳 아픈 곳도 많아지고 가까이 지내던 지인의 모습도 순간 사라진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럼, 나는 누구인.


삶에 대한 질문이 많아졌다. 불혹의 나이를 넘어가면서 생긴 변화 중에 하나이다. 이런 변화를 적응하고자 시작한 치열한 독서와의 전쟁, 그리고 글쓰기, 인문학에 몰입하기... 그런 시간의 덕분으로 몇몇 좋은 분들과 사귐도 생겼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어느덧 하늘의 뜻도 눈치로 읽어낸다는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지 몇 해가 지났다. 아주 옛날 윤리 책에서 훑어 지나갔던 철학 이야기가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삶의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길을 보여줄 것이라고 진작에 알지 못했다.
이제 다시 듣게 되는 서양 철학사 강의. 그렇게 잦은 기회는 아닐 것이다. 어렵게 맞은 기회인 만큼 하나라도 더 기억하고 사유하는 시간이 되고자 강의 내용을 정리해볼 참이다.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1-1 탈레스


탈레스 독특한 기여는 그의 다음과 같은 착상이었다. 즉 다양한 사물들 간에는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모두에는 어떤 근본적인 유사점이 존재한다는 생각, 다시 말해 <다자 the many>는 <일자 the One>와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모든 물질적 실재의 근저에는 몇 개의 단일 요소들, 몇 개의 <재료>들, 즉 그 자체의 활동이나 변화의 원칙을 내포하는 어떤 재료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일자 또는 이 재료는 <물>이었다.
 이 학설은 자연과 그 다양성을 자연 그 자체로부터 설명하고자 한 유물론의 입장으로 지적 탐구를 통해 전체로서의 세계를 하나의 실체로부터 통일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점에서 종교적 설명과는 다른 철학적 세계관의 발생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유럽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1-2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만드로스에 따르면, 이 모든 특수한 사물들이 근거하는 제1의 실체는 하나의 <부정적>인 또 <무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낙시만드로스는 제1의 실체를 <비결정적 무한성>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바위나 물웅덩이처럼 특정하고 결정적인 사물들과 그것들의 근원을 분리했다.  실재적인 사물들이 특정한 것인데 반해 그것들의 근원은 비결정적이며,  사물들이 유한한 데 반해 근원적인 재료는 부정적이고 무한하다.



1-3 아낙시메네스


두 선구자의 견해를 조정하려는 시도로서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는 제1실체를 고안했으며, 만물은 그것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물에 대한 탈레스의 관념처럼 공기는 무한한 실체이다. 또한 우리는 만물의 토대에서 어렵지 않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공기를 볼 수 없지만 그것을 호흡해야만 살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감싸듯이 공기의 존재도 우리를 호흡하게 한다. 공기는 온 세상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지속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무한자에 대한 관념처럼 공기는 어디에나 퍼져 있으며, 비록 무한자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구체적이고 감각할 수 있는 물질적 실체며, 따라서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공기의 운동은 아낙시만드로스의 <분리> 작용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다.
사물의 제1실체로서의 물과 무한성과 공기에 대한 그들 각자의 생각이 유용하든 유용하지 않든 밀레토스 학파의 실제적인 중요성은 그들이 최초로 사물의 궁극적 본성에 관한 의문을 제시했다는 점이며, 또한 처음으로 무엇이 실제적으로 자연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불완전하지만 직접적인 탐구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2.1.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에 의하면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학에 몰두했고 그 연구를 최초로 발전시켰다. 또한 수학 속에서 그들은 수학의 원리야말로 만물의 원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밀레토스 학파와는 대조적으로 피타고라스학파는 사물이 수(數)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론적인 사유나 순수 과학 및 순수 수학이야말로 영혼을 정화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수학적 사유는 인간을 개별적인 사물들에 대한 생각에서 해방시켜 영원하고 질서 있는 수의 세계로 이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학파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음계의 속성과 비율이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다른 사물들의 본성은 수를 본받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수는 자연 전체 내에서 최초의 사물로 간주되었으며, 천체는 하나의 음계며 하나의 수라고 생각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에 따르면 <만물은 수다>라는 주장은 모양과 크기를 갖는 만물의 기초에는 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수로부터 기하학으로, 더 나아가 실재의 구조로 나아갔다. 만물은 수를 가지며, 그 수들의 짝수성이나 홀수성은 하나의 다수, 정방향과 장방향, 직선과 곡선, 정지와 운동 같은 사물의 대립된 성격을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밝음과 어둠조차 수적인 대립자들이었고, 남자와 여자, 선과 악도 마찬가지였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러한 방식으로 수를 이해함으로써 그들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개념, 즉 <형상 form>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제 피타고라스학파는 형상의 개념을 갖고 나타났다. 그들에게 있어서 형상은 한계를 의미했고, 한계는 특히 수적으로 이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음악과 의학이 그 한계의 개념을 가장 잘 예시한다고 믿었다.



3.1. 헤라클레이토스


<당신들은 같은 강물로 두 번 걸어 들어갈 수 없다>


3.1.1. 유전과 불


변화를 다양성 속의 통일성으로 묘사하면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전제했던 것은 변화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어떤 것을 <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탈레스의 물이나 아낙시메네스의 공기를 불이라는 원소로 대치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을 사물의 근본적인 원소로 생각할 수 있게 한 것은 불이 변화의 과정을 암시해 주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점이었다. 불은 일종의 결핍인 동시에 과잉이다. 그것은 항상 무엇인가를 섭취하면서 동시에 항상 무엇인가를 열이나 연기 또는 재의 형태로 방출한다. 그러므로 불은 변형의 과정이며, 따라서 불이 섭취한 어떤 것으로 변형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을 근본 실재로 상정했을 때, 그는 변화하는 <어떤 것>을 염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자신은 변화의 원리 그 자체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만물이 유전하다는 말은 세계가 하나의 <영원히 타는 불> 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불의 영원한 운동은 <타는 정도와 연소되는 정도>에 의해 보증된다. 또한 이<정도들>은 타는 것과 연소되는 것의 일종의 균형을 의미했다.


3.1.2. 보편 법칙으로서의 이성


변화의 과정은 임의적인 운동이 아니라, 신의 보편 이성(로고스 logos)의 산물이다. 이 <보편 이성>의 관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종교적 신념, 즉 만물 가운데 가장 실재적인 것은 영혼이며 그 영혼의 가장 판명하고 중요한 속성은 지혜이거나 사유라는 그의 신념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신과 영혼에 관해 언급할 때 각각의 개인적인 실체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에게 유일한 근본 실재는 오직 하나, 즉 불이며, 이 물질적 실체인 불이야말로 그가 말한 일자 the One 또는 신과 일치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이란 우주 산물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범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만물은 불이자 즉 신이었기 때문이다. 불, 즉 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인 것처럼 인간의 주된 활동 역시 지혜 또는 사유다.



3.2. 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는 그 이전 철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전 우주란 하나의 사물로 이루어졌다는 아주 놀라운 이론을 내놓았다. 하나의 사물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나누어지지도 않고, 절대로 소멸될 수도 없다. 그는 이 유일한 사물을 <일자 the One>라고 불렀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그러한 변화와 다양성은 모두가 일종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양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영원한 사물만이 존재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이 지닌 논리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거나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단순한 언명으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소는 존재하지만 유니콘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렇더라도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언명만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해서만 개념화하고 말할 수 있을 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따르면 변화 과정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다. 우리는 [생성 소멸의 순서상 생성 이전에] 먼저 어떤 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생성되면]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뒤[소멸 뒤]에는 다시 한번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있을 수 없는 논점에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적으로 잘못된 이러한 변화 과정의 주장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고양이 한 마리가 카펫 위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고양이와 카펫은 다른 사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들은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질료 덩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지각을 누구나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적 구분에 대한 이러한 공통의 견해도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다. 그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고양이의 발아래는 어떤 고양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발에서부터 머리를 통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고양이의 머리 위에는 어떤 고양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 고양이의 신체적 경계를 설정할 경우, 나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처럼 [비존재에 대한] 있을 수 없는 논점에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른바 물질적 구별 짓기라는 사실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나는 그것이 대단한 환상임을 공표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세상에는 오직 불가분의 일자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피르메니데스의 공헌은 그가 주로 변화하는 현상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했다는 점이다.]
파르메니데스에 있어서 변화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볼 때 생각할 수 없는 것이거나 표현 불가능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어떠한 것이 ……비존재(非存在)에서 존재로 될 수 있다는 주장은 결코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화(存在化)라는 개념이나 <생성한다>는 개념은 그에게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것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도대체 어떻게 어떤 것이 존재화했다고, 다시 말해 비존재에서 존재로 변화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결코 어떤 것에 관해 그것이 한때 비존재였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의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물이나 한 사물의 상태가 비존재에서 또는 비존재로 변화할 수 없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 역시 있을 수 없다.
어떤 것이 존재나 비존재 둘 중의 하나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을 조리 있고 일관성 있게 내세울 수 없다는 데 그 모순이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가 실재의 전 구조의 기원에 관한 광범한 문제를 설명하려 하든, 아니면 단순히 작고 특수한 사물을 설명하려 하든 변화를 설명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각각의 경우에 난점은 동일하다. 즉 그 난점은 어떤 형태의 존재나 비존재로부터 발생해야 한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만일 존재가 존재에서 발생한다면 그 존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변화나 생성은 있을 수 없다. 한편 존재가 비존재로부터 발생한다면 유(有)가 무(無)에서 발생한다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 비존재를 유로 취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경우에 만일 어떠한 운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로부터 존재로의 운동일뿐이며, 따라서 변화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실재를 일자로서 간주한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일자는 존재한다>이다.
실재는 구형이며 물질적이고, 불활성(不活性)이며 충만된 공간, 즉 덩어리로 거기에는 어떠한 공백도 있지 않으며 또한 그곳을 넘어서면 아무것도 없다. 변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는 생성되지도 파괴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영원하며 불활성적이다.
플라톤은 존재의 무변화성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기본 개념을 채용했고, 이것을 기초로 속견의 가시계(可視界)와 진리의 가지계(可知界)를 확실히 구분해 주었다. 플라톤은 또한 파르메니데스의 변화하지 않는 존재로부터 자신의 객관적이며 영원한 이데아를 추론해 냈다.


3.3.1. 제논의 네 가지 역설들


3.4. 엠페도클레스


거기에서 우리는 독창적이고 참신한 철학보다는 오히려 그 이전 철학자들의 말을 종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엠페도클레스는 운동과 변화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논증들이 모두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들 가운데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관점을 조리 있게 결합함으로써 최초로 그 이전 철학자들의 주요한 철학적 공헌을 결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변화를 말하는 동시에 실재란 근본적으로 불변적이고 단언하는, 논리적으로 양립적인 방법을 발견하기도 했다.
대신에 비록 존재가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옳지만, 그 존재는 하나가 아니라 다수라고 했다.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바로 <다자>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대상들의 변화를 설명해 주는 것은 이 근본적인 물질 원소들의 변형이 아니라 그것들의 <혼합> 일뿐이다. 그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혼합과 혼합되어진 것들 간의 교환뿐>이다. 흙, 공기, 불, 물, 이 네 입자는 변화하지는 않지만 대상들을 형성하기 위해 혼합되며, 우리가 상식적인 경험에서 지각하는 변화를 가능케 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이와 대조적으로 자연에는 두 가지 힘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 힘들을 <사랑>과 <증오>(또는 조화와 부조화)라고 불렀다. 이 힘들은 네 가지 원소의 결합과 분리의 원인이 된다. 사랑의 힘은 원소들이 서로를 끌어당겨 어떤 구체적 형태나 인간을 조립할 수 있게 해 준다. 반면에 증오의 힘은 사물의 해체를 야기한다. 그러므로 네 원소들은 사랑과 증오가 나타내는 정도에 따라 서로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킨다.



3.5. 아낙사고라스


질료와 구별된 <정신(누스 nous)>의 개념이다.
그에게 세계와 만물은 매우 질서 있는 것, 지식과 힘을 가진 하나의 존재를 설명 원리로 요구하는 복잡한 구조라고 생각되었다. 그러한 이성적 원리가 그가 주장했던 정신 또는 누스라는 개념이었다.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실재의 본성은 <정신>과 <질료>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정신이 질료의 모양과 행동에 영향을 주기 전에 질료는 창조되거나 소멸됨이 없이 이미 다양한 물질적 실체들의 혼합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이 근원적인 질료의 덩어리가 현실적 대상들로 분할될 때조차 그 각 부분은 모두 각각의 다른 요소적인 <사물들(spermata,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눈[雪]은 흑색과 백색이라는 대립자를 모두 내포하지만, 단지 백색이 그 안에서 우세하기 때문에 희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각 부분은 전(全) 실재를 함유하며, 각각의 사물도 그 속에 만물의 특별한 <부분>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낙사고라스의 이성에 대한 언급은 철학 사상에서 매우 위대한 업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적 원리를 사물들의 본성에 부과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정신과 질료를 분리했던 것이다. 그가 정신을 완전히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묘사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정신을 그 정신에 의해서 작동되는 질료와 구분했다. 그에 의하면 정신은 질료와 달리 <어떤 것과도 혼합되지 않으며 홀로 존재하고 그 자체로만 존재한다>. 정신을 질료와 다르게 만드는 것은 정신이 <만물 중 가장 훌륭하며 가장 순수한 것이며, 정신은 만물에 관한 모든 지식과 지고한 권능을 소유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질료는 복합적이지만 정신은 단순하다. 그러나 아낙사고라스는 정신의 세계와 질료의 세계라는 두 개의 세계를 구분하지 않았고, 이 양자를 항상 상호 관련된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정신은 <만물이 존재하는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자신의 정신의 개념이 갖는 모든 가능성들을 좀 더 세련되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은 이후의 그리스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4. 원자론자들


원자론의 핵심적인 논지 = 만물은 텅 빈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원자들로 구성된다
레우키포스가 원자론의 창시자였고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론을 세련되게 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사물의 본질은 수많은 입자들, 즉 원자라는 단위들로 구성된다.
1. 각각의 원자들은 충만해 있고 빈 공간을 갖지 않아서 견실하고 분할될 수 없는 것
2. 공간상에 존재
3. 모양과 크기도 서로 다르다.
4. 매우 작기 때문에 볼 수도 없다.
5. 영원하기 때문에 결코 창조되지도 않는다.
자연은 단지 두 가지로 구성된다. 즉 진공으로서의 <공간>과 <원자들>뿐이다. 원자들은 공간상에서 운동하며 그 운동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들을 형성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지식의 유형을 둘로 구분한다. <지식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적출(嫡出)이요, 다른 하나는 서출(庶出)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은 모두 서출에 속하며, 적출은 이런 것들과 전혀 다르다.>
적출: 있는 그대로의 것- 사과를 맛보고 사과라고 동의하는 것
서출: 주관적인 것- 사과의 맛에 대해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윤리학과 관련해서 데모크리토스는 인생의 최고 목적이란 쾌활함에 있다. 윤리학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는 사물에 대한 자신의 기계론적 견해를 이탈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리학이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철학은 주로 자연적, 물리적 질서를 탐구했던 초창기의 막을 내리는 분기점에 도달했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하느냐>에 관해 좀 더 밀착된 물음을 하고자 했다.


철학이란 게 한두 번 읽는다고 쉽게 깨우치는 게 아닌 것 같다. 강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생각하고 모르는 것은 메모해 두었다가 수업에서 질문하고 토론시간에는 적극적으로 내 생각을 발표하고 또 질문하기를 반복하며 익혀나가려 한다. 나의 철학 공부는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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