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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현기 May 21. 2021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철학자처럼 생각하기 2.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 새뮤얼 이녹 스텀프. 제임스 피저 지음/이광래 옮김/열린 책들/790p.

부제: 철학자처럼 생각하기 2.


  소크라테스 이전 고대 그리스 철학은 자연과 만물의 근원에 대한 자연 중심의 철학이었다면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은 인간 중심의 철학이라 볼 수 있겠다.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삶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이러한 삶의 질문에 철학이 답을 해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부터 흥미롭고 재미를 더 하는 철학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에 가슴이 설렌다. 소크라테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루어 놓은 철학적 성과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니 특히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서양 철학사에 입문한 지 한 달을 넘겼다. 여러 철학자의 생애부터 사상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철학하는 방법도 조금씩 익히고 있다. 어느 날 나의 생각 속에 철학이 들어오면서 느낀 점이 있다. 그동안은 생각의 한켠이 늘 비어있었고 지적 결핍감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공간들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한동안 몰입했던 동. 서양 고전들과 인문학적 사고를 돕던 여러 자료들이 마치 교통정리가 돼 듯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고 비슷한 생각들은 모아지고 합쳐져서 내 생각을 선명하게 해 주고 있다.

조심스럽다. 그리고 아직 모르겠다. 현재의 열정으로 잠시 느끼는 순간의 희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싫지는 않다. 현재의 감정을 표현하자면 신선하고 즐겁다는 것이다. 2주일 분량의 수업을 필사하고 메모하며 내 생각도 함께 정리해 본다.


제2장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1.1 프로타고라스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척도다>라는 명제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그의 명제는 인간이 어떤 사물에 대해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은 나의 인간적 능력들에 의해 제한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어떠한 신학적 논의들도 배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들에 관해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알 수 없다. 그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을 방해하는 여러 요소들, 예를 들면 주제의 불명료성, 인생의 유한성과 같은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어떠한 사물의 <참된> 본성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사물은 그것을 지각하고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현상>과 <실재>를 구분할 방도도 없다. 이러한 인식론에 입각할 때 과학적 지식을 수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각의 관찰자들이 지니고 있는 차이점들이 그 개인들로 하여금 사물을 서로 다른 눈으로 보게 하기 때문에 자연의 실재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타고라스는 지식이란 개인에게 상대적인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2. 고르기아스
만물은 사람에 따라 상대적으로 참되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과는 달리 고르기아스는 어떠한 진리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고르기아스는 머리카락을 세로로 자르듯이 날카롭게, 또한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에 의해 사용된 추론 방식을 이용하여 그의 비상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2)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을 파악할 수 없다.
(3) 그것을 파악한다 해도 그것은 전달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세 번째 명제를 통해서 그가 주장하려 했던 것은 <우리는 단어를 전달하지만 단어란 단지 상징이나 기호며, 상징과 그것이 상징하는 사물 자체와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지식을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3. 트리시마코스
트리시마코스는 불의가 정의로운 생활보다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불의를 성격의 결함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의한 사람을 성격과 지성에 있어서 매우 우월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그는 실제로 <불의도 쓸모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의를 강자의 이익이라고 생각하여 <힘이 곧 정의>라고 믿었다. 그에 의하면 법률은 지배적인 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다. 이 법률들은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규정한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정의>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정의>는 권력을 가진 편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트리시마코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의로운 것은 어디서나 동일한 것으로서, 강자들의 이익이라는 결론은 매우 타당한 것이다.>

2.2. 철학자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 우선 지식이라는 건축물의 확고한 기초를 발견해야 했다. 그는 이 기초를 인간 세계의 외부의 사실들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발견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인간의 내부는 인식 행위를 실천적인 행위로 인도하는 독특한 활동 무대였다. 이 활동을 묘사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영혼 psyche>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영혼은 어떤 특수한 기능도 아니고 특수한 종류의 실체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성과 인격을 위한 능력, 즉 인간의 의식적인 퍼스낼리티를 의미했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의미를 두고 말하길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통해 현명한가 아니면 어리석은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를 판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영혼을 이렇게 묘사함으로써 어떤 유령과 같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지성과 인격의 정상적인 능력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려 했다. 영혼은 퍼스낼리티의 구조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영혼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가 확신했던 바는 영혼의 활동이란 <인식>할 수 있고 인간의 일상 행위에 영향을 주며 심지어는 그 행위를 인도하고 지배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영혼은 <사물>이 아니지만 그는 인간의 가장 큰 관심이 <가능한 한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데>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언제 자신의 영혼을 가장 훌륭하게 배려하는 {돌보는}가? 사실과 환상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간 생활의 실재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자신의 사상을 형성할 때가 바로 그때다. 그러한 지식을 획득했고 자신의 영혼을 잘 배려한 {돌보는} 사람은 참된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자신의 지식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에게는 <선한 생활>-善(good, 좋은 삶)-이 주된 관심사였으며 단순한 명상적 태도는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개념에서 요점은 인간은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과 모순된다는 것, 예를 들어 정의(正義)는 남을 해치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은 영혼이 인식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지식의 한 전형적 예다. 남을 해치는 어떤 행위가 자신의 정의에 대한 지식과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을 해치는 경우처럼 지식에 위배되게 행동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성을 해치는 행위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확실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식만이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그의 첫 번째 작업은 자기 자신과 동료들에게 <어떻게> 인간은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가를 제시해 주는 것이었다.

2.3. 소크라테스의 인식론: 지적 산파술

소크라테스는 믿을 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적인 산파술인 <변증술 dialectic>을 통해서, 즉 숙련된 대화의 방법을 통해서라고 믿었다. 이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간단한 기술처럼 보인다. 그것은 항상 어떤 문제의 가장 명백한 측면을 논의함으로써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과정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마침내 대화의 최종 결과로써 당초 의도했던 것을 명료하게 진술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이 변증술의 방법을 일종의 지적 산파술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정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불완전하고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을》 점차적으로 교정해 줌으로써 그 자신이 스스로 진리를 끌어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논점 부정 elenchus)이라는 기술로 종종 다른 사람의 견해 뒤에 숨어 있는 모순을 들추어내곤 했다.

그의 대화편 『에우티프론』에서, 에우티프론은 소크라테스에게 <잘못한 사람을 고발하는 것>이 경건성이며 그 반대가 불경이라고 정의해 준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당신에게 청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경건한 행동들 가운데 한두 가지를 말해 달라는 것이 아니오. 나는 모든 경건한 행동을 경건하게 만들어 주는 경건성의 《개념》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이오.> 자신의 첫 번째 정의가 불만족스러웠던 에우티프론은 다시 <신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경건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신들 사이의 잦은 싸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신들 사이에도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나쁜지에 대한 의견의 일치가 존재하지 않음을 제시한다. 즉 동일한 행동도 어떤 신에게는 기쁘지만 다른 신에게는 기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에우티프론의 두 번째 정의도 부적당한 것이 된다.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 그는 또 다른 정의를 내세운다. <모든 신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며, 모든 신이 싫어하는 것이 불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되묻는다. <도대체 신들은 어떠한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그 행동을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들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행동이 경건한 것인가?>간단히 말해서 경건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에우티프론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경건은 신들에게 바쳐야 할 정성과 관계가 있는 정의(正義)의 부분>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종류의 정성이 신에게 바쳐져야 하는가를 물음으로써 더욱 명확한 정의(定義)를 요구한다. 에우티프론은 여기서 우물쭈물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번 좀 더 분명한 정의를 요구한다. <만일 당신이 경건과 불경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면 당신은 결코 당신의 아버지를 고발할 수 없었을 것이오.> 소크라테스가 한 번 더 분명한 정의를 그에게 요구하자 에우티프론은 <소크라테스여, 다음에……. 난 지금 바빠요. 지금 난 떠나야 해요>라는 대답밖에 하지 못한다.

2.3.1. 정의(定義)
정의(定義)의 과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지대한 관심은 그의 인식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비슷한 방식으로 정의의 개념(어떤 행동을 정의(正義)롭다고 평가할 수 있게 하는), 미(美)의 개념(개별 사물들의 미를 측정하는), 그리고 선(善)의 개념(우리에게 어떤 행동이 선(good 좋은 삶)하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을 추구했다. 어떠한 개별적인 사물도 완전히 아름다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 아름답다면, 이는 그것이 미의 개념에 더 많이 분유(分喩)-깨우침을 나누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의 아름다운 사물이 사라진다 해도 미의 개념은 계속 남아 있다. 소크라테스는 개별 사물뿐만 아니라 일반 개념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믿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신이 어떤 것에 대해 사유할 때는 언제나 대상들의 두 가지 종류에 대해 사유한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는 <특정한 꽃>인 동시에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의미의 미>의 한 예이거나 분유자(分喩者)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정의의 과정은 정신이 사유의 두 가지 대상을 구분하는 과정, 즉 개체(이 아름다운 꽃)와 보편자(미의 개념) 사이를 구분하는 과정이었다.

더욱이 꽃이든 사람이든 다양한 사물들이 서로 다른 미를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각각의 사물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요소를 공통적으로 각각 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엄격한 정의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정신은 특수한 사물(이 아름다운 꽃)과 보편적인 개념(美, 또 아름다움) 사이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정의의 과정은 소크라테스가 노력했던 것과 같이, 정의의 확고부동한 개념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기술을 통해 참된 지식이란 사실들에 대한 단순한 조사 이상의 것임을 보여 주었다. 정신의 힘은 사실들 속에서 그 사실들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영원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참된 지식은 바로 이 정신의 힘과 관계를 갖는다. 장미가 시든 후에도 아름다운 자체는 남아 있다. 불완전한 삼각형은 삼각형 그 자체를 정신에게 암시해 주며, 불완전한 원들은 완전한 원의 근사 도형으로 간주된다.

정의의 과정을 통해 그는 명백한 사실적 차이들을 무시했고 모든 인간들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그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간 hummanness>에 대한 그의 분명한 개념은 그에게 인간들에 대해 사유하기 위한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이와 유사하게 문화들은 서로 다르고 문화마다의 법률과 도덕률도 다르지만 법률, 정의, 선의 개념들 역시 인간의 개념만큼 엄밀하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의 세계 배후에는 사물들의 질서가 존재하며, 소크라테스는 그 질서를 정신에 의해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 만물을 조망하는 한 방식을 그의 철학에 부과시켰다. 즉 그것은 사물들의 <목적론적> 개념이었고, 이 견해에 따르면 사물들은 하나의 기능이나 목적을 가지며,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이 정의될 수 있는 본성을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본성에 적합한 하나의 활동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만일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행동인 것이다.

2.4. 소크라테스의 도덕 사상 (윤리학)
-어떻게 살까?, 선/악, 선한 삶/ 나쁜 삶
-덕((德) arete) 탁월함, 훌륭함

소크라테스에게 지(知)와 덕(德)은 일치하는 것이다. 만일 덕이 <가능한 한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데 관련된다면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과 지는 밀접히 관련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선과 지가 관련된다는 것 이상을 말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이 양자를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선을 아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는 덕이다. 지와 덕을 동일시 한 소크라테스는 더 나아가 악덕이나 죄를 지의 부재라고 주장하려 했다. 지가 덕인 것처럼 악덕은 무지다. 이러한 추론의 결과로, 소크라테스는 어느 누구도 알면서 악덕에 빠지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에 의하면 그릇된 행동은 항상 무의식적이며, 무지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항상 그 행위가 어느 정도 선하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행은 행동 양식에 대한 그릇된 평가의 결과로 발생한다. 어떤 종류의 사물이나 쾌락이 행복을 낳을 것이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다. 악행은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이루어진 무지의 산물이다. 무지는 어떠한 행위가 행복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나타난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참된 지식을 통해 그것이 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우리는 사물들과 행동 양식들에 대한 참된 지식을 통해 그것들이 과연 행복에 대한 인간의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행복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로 행복을 주는 것을 구분할 때에도 지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실제로 옳은가는 과연 그 행동이 참된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그 문제는 참된 지식의 문제인 것이다.- “앎이 문제다 “-.
더욱이 소크라테스는 인간 본성의 궁극적 구조가 영원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덕스러운 행동도 또한 영원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주장은 소피스트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그의 위대한 승리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서구 문명의 전 역사를 통해 도덕 철학이 지향해 온 방향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결정되었다.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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