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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현기 May 29. 2021

소크라테스에서포스트모드니즘까지

철학자처럼 생각하기 3.


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그리고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대개 문사철에 대한 공부라고 생각한다. 문사철은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문학은 인간을 감성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철학은 인간을 이성 및 논리적 측면에서 분석하며, 역사는 인간을 통시적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본 것이 문사철이며 이것이 곧 인간을 알아가는 길인 셈이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다. 작가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해서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분명 현대를 사는 사람인데 어쩐지 그 현대인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작된 인문학의 공부에서 많은 공부가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철학 부분은 쉽게 이해가 어렵고 그렇다 보니 지겨운 공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서양 철학사 강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된 철학사를 배워가며 이제는 서양 철학의 주류를 이루는 플라톤의 철학 사상까지 접하고 있다. 비록 이해가 부족하고 사유의 방법도 서툴지만 철학사상을 배우고 같이 고민하려고 노력한다. 고대 철학을 지나 이제부터 시작되는 근대 철학과 중세 철학의 세계에 빠져든다. 이 시간을 잘 지나면 현대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날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철학의 늪에 몸을 담근다.




< 플라톤 >


2. 인식론


2.1. 동굴의 비유


두 개의 세계, 즉 어두운 동굴의 세계와 밝은 빛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소피스트의 회의주의에 대한 그의 반론이었다. 플라톤에게 지식이란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절대로 확실한 것이다. 지식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이 가장 실재적인 것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만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림자뿐이라면 우리는 결코 믿을 만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그림자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실재적 대상의 운동에 따라 크기와 모양에 있어서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이 매우 다양한 그림자의 배후에 있는 실재적 대상을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신은 참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2.2. 분리된 선분의 비유










상층의 커다란 부분은 가지계를 나타내며 하층의 작은 부분은 가시계를 보여 준다. 이 다른 크기로의 분할은 가시계에서 발견되는 좀 더 낮은 정도의 실재와 진리를 상징하며 이는 가지계의 더 큰 정도의 실재와 진리와 비교된다.




X에서 Y로의 진행은 연속적인 정신의 계몽 과정을 나타낸다. 각각의 수준에서 정신에 현시된 대상들은 4개의 서로 다른 실재적 대상들이 아니라 같은 대상을 보는 4개의 다른 방식을 나타낸다.




2.2.1. 상상


플라톤이 상상이라는 단어를 통해 의미하고자 했던 것은 현상들에 대한 감각적 경험 – 여기서는 현상들이 참된 실재로 간주된다-이었다.




플라톤의 예술에 대한 비판은 예술이 허상을 산출하며, 허상은 곧 관찰자의 환상적 관념들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상은 허상을 실재적인 어떤 완전한 것으로 이해하려 할 때 생겨난다. 플라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단어를 사용하는 예술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들이다. 시(詩)와 수사학은 그에게 가장 심각한 환상의 근원들이었다. 단어들은 정신보다 먼저 허상들을 창조해 내는 힘을 가지며, 시인과 수사학자는 그러한 허상을 창조하는 단어들을 사용하는데 훌륭한 기술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은 특히 소피스트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그들의 영향력이 바로 이 단어 사용의 기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상상이란 어떤 사람이 그가 허상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를 의미하며, 따라서 상상은 환상이나 무지와 마찬가지다.




2.2.2. 신념




상상의 다음 단계는 신념이다. 플라톤이 현실적인 대상을 봄으로써 생기는 정신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인식한다>는 단어 대신에 <믿는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이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을 관찰할 때 확실성에 대한 강한 느낌을 갖는다. 그렇지만 플라톤에게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가시적 대상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많은 특성들을 위한 상황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주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확실성은 아니다. 만일 지중해의 물이 해변에서는 푸르게 보이지만 바다에서 퍼냈을 때에는 투명하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바닷물의 빛깔이나 구성에 대한 인간의 확신은 적어도 의문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 따르면 신념이 비록 관찰에 기초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속견의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가시적 대상에 의해 생겨난 정신 상태는 상상보다는 분명히 더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비록 현실적인 사물들이 그것의 그림자보다는 더 많은 실재를 소유하지만, 그것들 스스로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는 없다. 색이든 무게이든 다른 어떤 성질이든 이러한 사물의 속성들은 특수한 상황에서 경험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이들 특수한 상황으로 제한된다.




2.2.3. 사고 작용




플라톤이 <사고 작용>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상태는 특히 과학자들의 특성이다.




수학자는 <추상화>의 작업, 즉 가시적 사물들로부터 그 사물이 상징하는 것을 이끌어 내는 작업에 종사한다. 수학자는 어떤 삼각형을 볼 때 <삼각형의 본질>이나 삼각형 그 자체에 관해 사유한다. 그는 <가시적> 삼각형과 <가지적> 삼각형 사이를 구분한다. 가시적 기호들을 사용함으로써 과학은 가시계에서 가지계로 다리를 놓는다.




과학은 우리의 감각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지능에 의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사유는 개개의 실제적인 대상이 여러 가지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의 집합에서는 동일한 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하나의 가시적인 대상으로부터 추상화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보여 준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소인이나 대인, 흑인이나 백인, 청년이나 노인 가운데 어느 누구를 관찰하든지 <인간>의 이데아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2.2.4. 완전지


우리가 사물에 대한 좀 더 충분한 설명을 요구해야 하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만물의 만물에 대한 관계를 파악해야 하며, 모든 실재에 대한 통일성을 알아야 한다. 완전지(完全知)와 함께 우리는 감각적 대상들로부터 완전히 풀려난다. 이 수준에서 우리는 직접적으로 형상을 취급한다. 형상은 현실적 대상들로부터 추상화된 보편적 삼각형과 <인간>과 같은 가지적 대상들이다. 우리는 이제 가시적 대상의 상징적인 성격들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이들 순수 형상(이데아)들을 취급한다.




우리는 <변증법>이라는 지적 능력을 통해서 그것의 가장 높은 목적으로 향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지식의 모든 부분의 관계를 동시적으로 파악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지는 실재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의미하며 플라톤에게 이것은 지식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이제 당신들은 이 네 부분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정신의 네 가지 상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 높은 것은 순수지(純粹知), 직관지(直觀知)며, 두 번째는 추론지(推論知), 간접지(間接知)며, 세 번째는 신념이며, 네 번째는 상상이다. 당신들은 이 용어들을 비율에 따라 그 각각에 대해서 명확성과 확실성의 정도를 배분한다.>




2.3. 형상론


플라톤의 형상론[이데아론]은 그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공헌이다.


형상이나 이데아는 불변적이고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본질로서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적, 시각적 대상들을 단지 그것의 조잡한 모사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실재를 몇 가지 종류의 물질적 재료로 생각했던 반면에, 이제 플라톤은 비물질적인 형상이나 이데아를 참된 실재로서 내세웠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피스트들은 물질적인 질서가 항상 유동하고 변화한다는 이유에서 지식을 상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플라톤은 지식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유의 참된 대상은 물질적 질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이데아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비록 개별적인 선을 판단 가능케 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선이 존재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이러한 견해를 예견하긴 했지만 플라톤은 그 최고선의 개념에 형이상학의 이론, 즉 실재의 모든 구조에 대한 설명과 그 속에서의 도덕의 위치에 대한 설명을 부가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적 관심을 뛰어넘었다. 더욱이 플라톤은 이 형상론을 통해 일자와 다자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만물은 일자라는 파르메니데스의 결론과 만물은 유전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결론을 우회한 것이었다. 그는 수학에서 유래된 피타고라스적인 형상의 개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새로운 어떤 것이었고 그의 모든 철학에서 중심 개념이 되었다.




2.3.1. 형상이란 무엇인가?




『향연』에서 플라톤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인물을 통해 아름다움을 파악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제한된 형태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후에 우리는 곧 <어떤 형태의 아름다움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지각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물체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모든 형태의 아름다움이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미의 모든 양태들은 어떤 유사성을 갖는다는 이러한 발견의 결과로써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완화되면서 아름다운 물질적 대상에서 미의 개념으로 옮겨가게 된다.




즉, 아름다운 사물들은 그것의 다양성 속에서도 모든 미의 근원인 미의 이데아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의 이데아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즉 그것은 객관적인 실재를 갖는 것이다. 미는 하나의 이데아다. 사물들은 아름답게 <된다>. 그러나 미의 이데아는 항상 <그러하다>. 따라서 미의 이데아는 자신의 안팎으로 움직이는 변화하는 사물과 별도의 존재를 갖는다.




2.3.2. 형상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가장 명백한 제안은 형상들이 구체적인 사물과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들은 우리가 보는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한다. <떨어져> 있거나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은 형상이 하나의 독립적 존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비록 특정한 사물이 사라진다 해도 계속 존재한다.




2.3.3. 형상과 사물의 관계는 무엇인가?


첫째, 형상은 사물의 본질의 <원인>이다.


둘째, 사물은 하나의 형상을 <분유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사물은 하나의 형상을 모방하거나 <모사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2.3.4. 형상들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형상들은 서로 유(類)와 종(種)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 형상의 위계질서가 <하부로> 내려가면 갈수록 마치 <빨간 사과들>에 관해 언급할 때처럼 점점 더 시각적 대상에 가까워지며, 따라서 지식은 점점 더 보편적일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형상은 점점 더 추상적이 되며-예를 들면 일반적인 사과에 관해 언급할 때처럼-지식은 점점 더 넓어진다. 과학의 담론은 가장 추상적이다.




2.3.5. 우리는 어떻게 형상을 인식하는가?


플라톤은 정신이 형상을 발견하는 3가지 방식


첫째, <상기(想起)>의 방식이다.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기 전에 이미 형상과 친숙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들의 정신이 존재의 선험적 상태에서 인식했던 것을 상기한다. 가시적인 사물들은 인간에게 이미 알고 있던 본질들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교육은 상기의 과정인 것이다.


둘째, 인간은 변증법적 활동을 통해 형상의 인식에 도달한다.


셋째, <갈망>의 힘. 아름다운 대상→아름다운 사유→미의 본질






3. 도덕 철학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소피스트들은 인간이 어떠한 확실하고 보편적인 도덕 기준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3.1. 영혼의 개념




플라톤은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파이드로스』에서 적절한 비유를 통해서 설명한다. 여기서 그는 두 마리의 말을 모는 전차 마부를 그린다. 플라톤에 의하면 한 마리는 선하기 때문에 <채찍질할 필요가 없이 몇 마디의 경고만으로도 몰 수 있다>. 다른 한 마리는 악하므로 <건방지고 뻔뻔스러워 채찍질과 박차를 가해도 잘 굴복하지 않는다>. 비록 전차의 마부가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고 선한 말이 그 길을 따르고 있다 해도 그 악한 말은 <이리저리 날뛰고 이탈함으로써 선한 말과 마부를 온갖 곤경에 처하게 한다>.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의 고유한 기능은 삶의 참된 목적을 구하는 것이며, 이는 사람들을 그것의 본성에 맞춰 평가함으로써 가능하다. 비록 정념이나 욕망이 우리를 공상의 세계로 안내해서 어떤 종류의 쾌락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믿도록 우리를 기만할 수도 있지만, 이성의 고유한 역할은 그 환상의 세계를 관통해 참된 세계를 발견하며 욕망의 방향을 진정한 대상으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때야 욕망은 참된 쾌락과 참된 행복을 낳을 수 있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행과 인간 영혼의 무질서는 인간이 형상과 실재를 혼동한 결과이며, 이러한 혼동은 거의 욕망이 이성을 압도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도덕적인 악을 <무지>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마부가 말들에 대한 통제 능력이 있을 때 질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에서도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통제할 수 있을 때에만 질서와 평화가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3.2. 악의 원인: 무지 또는 망각






플라톤에 의하면 <완전하고 날개 달린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 반면에 날개를 잃은 불완전한 영혼은 아래로 떨어져 결국은 지상에 안주한다. 거기서 하나의 고향을 발견한 영혼은 지상의 체질을 받아들인다. 이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 하나의 살아있는, 그러나 죽어야 할 운명의 피조물이라고 불린다>. 영혼은 <떨어지며> 결국 하나의 육신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영혼이 육신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비이성적인 부분들에 이미 방종과 악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악의 원인은 영혼의 이전 상태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영혼은 무질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실제로 무질서가 영혼에서 발생할 때 악의 원인은 영혼 그 자체 내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은 실재를 파악하는 일에 무지했거나 망각한 데서 온 결과다. 이러한 입장에서 악이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며 오히려 영혼의 한 특성, 즉 영혼의 망각 <가능성>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망각하고 지상의 사물들에 대한 관심에서 끌려 내려온 것도 바로 그러한 영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본질상 완전하지만 그것의 한 측면에는 무질서로 이끌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피조물의 다른 부분들이 그러하듯이 영혼은 완전성과 동시에 불완전성의 원리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영혼이 육신에 들어가게 되면 영혼이 육신에 들어가게 되면 영혼의 어려움들은 크게 증가된다.


육신은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을 자극하여 이성의 지배를 전복시킨다고 플라톤은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영혼의 육신으로의 유입은 무질서, 즉 영혼의 각 부분 간의 부조화를 가중시킨다. 우선 영혼의 형상의 영역을 떠나 육신에 들어감으로써 일자의 영역에서 다자의 영역으로 이동한 꼴이 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육신은 영혼의 조화를 방해한다. 왜냐하면 육신은 영혼에 자극을 주어 이성이 참된 지식을 지향하지 못하게 하며, 이성이 한때 인식했던 진리를 상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결국 잘못된 지식과 성급함, 욕심을 설명해 주는 것은 육신이다. 왜냐하면 육신은 영혼을 감각의 폭포로 유인함으로써 이성과 기개와 욕망의 정결한 활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을 회고하면서 우리는 그가 육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혼의 개념으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영혼은 이성적 부분과 비이성적 부분 간의 근본적 조화를 향유하고 있고, 그 조화 속에서 이성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통해 기개와 욕망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영혼의 비이성적 부분은 불완전의 가능성을 소유하며, 그러한 가능성은 기개와 이성이 더욱 저질스러운 데까지 욕망에 끌려 다님을 보여 준다. 영혼의 각 부분들 간의 본래적 조화는 육신에 유입되자마자 더욱더 동요되고 이전의 지식이 망각되며 육신의 타성은 그 지식으로의 복원을 방해한다.




3.3. 상실된 도덕의 회복


플라톤에게 도덕은 인간의 상실된 내적 조화의 회복에 있다. 그것은 이성이 욕망과 육신의 자극에 의해 전도되었던 과정을 다시 역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가 곧 덕이다>라는 명제가 의미하는 바는 잘못된 지식은 사물 및 행위와 그것들의 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의해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릇된 지식에서 참된 지식으로 갈 수 있으려면 우선 자신이 무지의 상태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과도 같다.




3.4. 기능의 실현으로서의 덕


영혼의 세 부분에 대응하는 세 가지 덕은 이 부분들이 각각의 기능을 실현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욕망이 한계와 분수를 지켜서 영혼의 다른 부분을 침해하지 않을 때 쾌락과 갈망에 대한 이러한 조절은 <절제>의 덕을 낳는다. 또한 영혼의 기개 부분에서 나오는 의지력이 한계를 지킴으로써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성급한 행동을 피하고 공수(攻守) 행위에서 믿을 만한 힘을 발휘할 때 <용기>의 덕이 이루어진다. 이성이 욕망의 공격에 동요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참된 이상을 계속 지켜 나간다면, 그때 <지혜>의 덕이 성취된다. 그런데 이들 세 가지 덕들 간에는 상호 연관성이 존재한다. 네 번째 덕인 <정의>는 영혼의 각 부분에 각각의 고유한 의무를 부과하므로 보편적인 덕이라고 한다. 정의는 한 인간의 행복 및 내적 조화의 성취를 반영하여 영혼의 모든 부분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실현하고 있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다.


망치의 고유한 기능이 여론에 의해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망치의 본질과 능력을 분석함으로써 발견되는 것처럼 인간에게 적합한 행동도 여론에 의해서 제시될 수는 없으며 영혼의 각 부분들의 성격에 의해 밝혀진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행복의 성취를 원하며 하나의 행동 양식을 선택할 때에도 그 행위가 그러한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행복은 오직 영혼의 각 부분의 내적 조화와 균형이나 질서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4. 정치 철학 (철인 정치)




5. 우주론




<종합>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가장 안전하게 일반화해서 평가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주석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주석들의 대부분이 플라톤의 경이로운 계승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쓰였다고 덧붙여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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