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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Mar 11. 2022

보름달을 닮았던 아이(1)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나는 보름달만 보면 왜 그런지 자꾸만 그 애가 생각난다. 보름달을 닮아 보름날 태어났는지, 보름날이 생일이어서 보름달을 닮았는지 모르겠다. 그 애의 생일은 음력 2월 보름이다. 그동안 사는 게 뭔지 그 애를 잊고 살았다. 아니 의식적으로 잊으려 했다는 것이 더 솔직한 말일 것 같다. (착하디) 착하고, (순하디) 순했던 내 동생. 지금은 쉰 살이 훨씬 넘어, 몇 년 후엔 나처럼 환갑이 넘어갈 텐데...... 

이 세상에 살아 있다면 그렇게 되었을 천사 같았던 그 애. 내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오빠라고 믿어줬던 내 여동생. 어린것이 제 배가 고파도 오빠 줄 밥이라고 아랫목 이불속에 넣어뒀다 차려 주던 내 동생. 저 보다 세 살 어린 여동생에게 늘 바보 같다고 구박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웃음으로 챙겨주던 일곱 살 아래 내 동생.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던 내 동생 윤숙이.... 1953년 그 애가 태어나던 날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여덟 살 까지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 앉아 젖을 먹었었다.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었던 당시에 난 어머니의 젖을 간식처럼 먹었다. 그 후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고도, 학교 다녀오면 동생을 제치고 젖을 먹었으니...

어머닌 그 무렵 시장에서 고무신을 주로 파는 잡화상을 하고 있었기에, 전쟁 후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적게 겪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부터 내 동생은 양보하는 법을 배웠는지 28년이란 짧은 삶을 살면서 늘 몸에 지병이 있었던 16살 위 큰언니에게 모든 걸 양보했었고. 또 내게는 천지간에 하나뿐인 위대한(제 생각으로는 그렇게 생각 했던...) 오빠라며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그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저 보다 세 살 아래 동생에게는 또 언니 노릇 한다고 모든 걸 내어주며 살아야 했나 보다. 

생활이 모두 어렵던 그 시절, 아버지는 항상 집에 없으셨고, 생활은 어머니의 담당이었으며, 나이 차이가 나는 우리 삼 남매의 육아는 누나의 몫이었는데, 누나는 나이차가 많은 데다 지병이 있다고 하여, 나이 어린 동생들이 한 수 접고 대해주었다. 

삼 남매가 무슨 잘못을 해서 누나에게 종아리를 맞게 되면, 난 아들이어서, 막내는 아직 어려서라는 이유 때문에 언제나 그 애만 당해야 했다. 그런 불공평함은 가세가 기울어 C시로 이사를 가면서도 계속되었다.

그 무렵, 적십자사에서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옥수수가루를 들여와 죽을 만들어, 영세민들에게 하루 한 끼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판자촌에서 2km 정도 떨어진 급식소에 냄비를 들고 가서 죽을 받아 오는 것도 물론 그 애의 일이었다. 그렇게 죽을 얻어다 언니와 오빠 동생을 알뜰히도 거둬 먹였다 그 애는......


내가 가난에서 탈피하려고 군에 입대하던 1965년 겨울, 그 애는 13살이 되었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한마디 불평도 없이 집안일을 떠맡았다. 누나는 이미 출가하고, 난 군대에 가 있었던 그 시절에도, 그 아이는 어머니를 도와 동생을 키우면서 그렇게 착하게 살았다. 어쩌다 군에 있는 나에게 편지를 부쳐와도, 왜 난 그 애에게 따뜻한 답장 한번 안 해주었는지 모르겠다. 

그 애는 형제들에게도 철저하게 희생만 강요되고 소외되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이유가 불분명하다. 시집간 언니가 애를 낳을 때도 그 애가 가서 산후조리를 해줬고, 언니가 몸이 아프다고 하면, 마치 친정엄마처럼 20리 길을 배 타고, 또 걸어서 찾아가 언니 대신 그 집 일을 도와줘야 했다. 또 어느 해 추석에는 언니네 집에 일을 도우러 갔었는데, 형부가 자기 아이들 추석빔으로 양말이랑 운동화를 사다 주면서, 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며, 그 서러움에 펑펑 울었던 사연을 휴가로 잠시 집에 들른 나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그 무렵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그 애는 얼마나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서러웠을까? 그런데 그런 사연을 알면서, 나도 월남에서 귀국하여 식구들에게 작은 선물들을 하나씩 내놓을 때마저, 왜인지 그 애의 것은 제일 작은 인형이 돌아갔다. 그래도 그 애는 "이게 우리 오빠 선물이야!"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지중지 하던 기억이 난다. 


언제부터인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내가 제대를 하고 C시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던 무렵에, 그 애는 서울로 함께 이사 온 언니네 집에서 조카 셋을 키우며 그 집에 머물고 있었다. 누나는 그 무렵 오랜 지병을 놓고 생활에 뛰어들어 차츰 안정을 찾고 있었으나, 우리 집은 여전히 어려운 가운데 환갑이 넘은 어머니의 노점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애가 창백한 얼굴로 집에 왔다. 

"어디 아프냐?"라고 묻는 어머니의 말씀에 "응. 좀 피곤해서 그래." 그렇게 대답하고는 무척 힘겨워했는데, 우리는 모두 그렇게 알았다. 새벽에 시장에 나가는 언니 대신 한창 말썽 부리는 세 조카들을 키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테니 피곤도 할 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 나는 결혼을 했고, 아내도 누나와 같이 시장 통에서 장사를 하며 누나에게서 일당을 받아와 생활에 보태고 있었는데, 동생은 부쩍 피곤하다며 집에 오는 날이 잦아졌다. 누나네 집과는 한 블록 차이라 멀지는 않았으나, 그 집에 누워 있기가 눈치가 보였는지 모른다. 남의 얘기는 하지 않는 성품이었으니....

그렇게 사는 동안 집안에 경사가 났다. 연세가 70이 넘은 아버지가 그렇게 소망하시던 손자를, 1978년 어버이날에 안겨드림으로써 평생 불효만 하던 내가 제대로 효도를 한 셈이 되었다.

언니의 아이들 세 명을 키웠던 그 애는, 역시나 누구보다 기뻐하며 제 조카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으려 했다. 

나도 취직을 하게 되어 모처럼 집안에 활기를 찾기 시작했던 그 무렵, 그 애는 가끔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고, 한번 코피가 나오기 시작하면 잘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 달려가서 며칠 입원하고 돌아오면 잠시 활기를 찾는 듯했는데, 병원에서 하는 치료라는 것이, 그저 혈액 주사(우리는 피주사로 불렀다.)를 놓는 것이 전부였다. 병명도 원인도 알 수 없었다. 집안에 또 다른 근심거리가 그 애로부터 왔다고, 꾀병이라고, 나는 왜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로 그 애 가슴에 못을 박았을까?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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