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rew Mar 11. 2022

보름달을 닮았던 아이(2)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1979년 10월 26일 이 나라에 경천동지 할 대 사건이 터졌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것이다. 온 국민이 실의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슬픔에 잠겨야 했다. 대통령이 서거한 날부터 꼭 한 달만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님을 성당에서 운영하는 성당 묘역에 모시고 돌아왔을 때부터, 그 애는 병원과 집을 오가는 횟수가 잦아졌다. 일주일 정도 병원에 입원했다가, 집에서 한 달쯤 쉬었다가를 일상처럼 반복하였고, 그동안의 생활비와 병원비는 어머니와 아내가 벌어서 충당해야 했다. 내가 받아오던 쥐꼬리만 한 봉급은, 아직 철이 못 들었는지 내가 거의 술값으로 탕진하고 있었다.

술이 거나해서 돌아온 내가 그 애에게 물었다.

"야! 너 뭐 먹고 싶어?"

"아무것도 싫어."

"야! 모처럼 오빠가 말하면 대답을 해야지!"

"응. 그럼 사이다 먹을래."

고작 사이다가 먹고 싶다며 그렇게 힘없이 대답하곤 했다.

그렇게 동생의 병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내를 맞이 했을 때 아내에게 해 주었던 금반지 세 돈도, 동생의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팔아야 했을 정도로 집안은 엉망이 되어갔다.

자포자기에 빠졌던 난, 점점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주인이 방을 비워 달라는 통보를 해왔다. 급하게 집을 구하려고 했지만, 그 당시 풍속이 그랬는지, 처녀 중환자가 있다는 핑계로 우리에겐 아무도 세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집값도 턱없이 부족했다. 나와 아내의 수입도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막내도 양장점에서 심부름을 하며 돈벌이를 하고는 있었으나,  겨우 제 용돈 정도의 수입이 있을 뿐, 말 그대로 거리에 나 앉는 일만 남았다.

이때 아내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던 터라 여러 가지로 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걱정하는 아내에게 "걱정 말아, 정 방을 못 구하면 군대 천막을 구해서 강가에 천막이라도 칠 테니...." 하고 짐짓 믿음직스럽게 보이려 했으나, 실제로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동생을 누나네 집에 맡겨두고 방을 얻으러 다녔다. 몇 날 며칠을 발이 부르트게 다녔던 것에 하늘이 감동했던지, 겨우 방 두 개짜리를 구할 수가 있었다.

이사 가던 날, 동생을 데려가지 못하고, 짐 정리가 다 끝난 다음 며칠이 지난 후에야 밤에 주인집 몰래 동생을 데려 왔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동생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얘가 언니네 집에 있었는데, 몸이 안 좋다고 돌아왔다오." 어머니가 젊은 주인 여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다행스럽게도 큰 문제없이 동생은 집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다.

이듬해 1980년 봄, 아내는 만삭이 되어가고 있었고, 동생이 병원을 드나드는 것은 점점 빈번해졌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한 무엇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 친정에 좀 가있어."

솔직히 만삭의 아내와 아이가 걱정이 되었던 것도 있지만, 병원비 역시도 큰 부담이었다.

큰 애를 배를 째고 낳았으니, 작은 애 역시 그래야 할 것인데, 그 비용은 당시 돈으로 100만 원 정도가 들었다.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처가에는 신세를 지기 싫었으나, 나로서는 궁여지책이었다.

아내는 잠시 말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집어 들었다.

"언니 나 애기 C시에서 낳고 싶은데...." 친정 올케언니와 통화를 한 모양이었다.

"응! 그래요 아가씨. 그 집 고모가 많이 아픈 모양인데, 내일이라도 당장 내려와요."

그렇게 아내가 친정으로 가던 날, 아내는 그 애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나 아기 낳아 데리고 올 테니, 밥 잘 먹고 일어나요."

"걱정 말아요 언니. 내가 곧 일어나서 애기 마중하러 갈게요."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신(神)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아내를 친정으로 보내고 며칠 후 어느 토요일, 난 동생을 데리고 시장통으로 나왔다.

"오빠 어디가?" 동생이 내게 희미하게 웃으며 묻는다.

"응 점심 먹으러....."

"집에 밥 있는데 뭐하러 돈을 써요?"

"인마! 가끔은 밖에서 먹고 싶은 때도 있는 거야."

우리 남매는 간이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오빠. 난 뭐 먹어?"

"회덮밥."

"그게 뭔데? 그거 생선 날 거로 먹는 거잖아?"

"그래. 아주 맛있어. 너 안 먹어봤지?"

"날걸 어떻게 먹어?"

"괜찮아 맛있으니까 한번 먹어봐."

그렇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를 회덮밥을 그 애는 참 맛있게도 비워냈다.

"어때? 맛있지."

"응 내가 여태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었어."

동생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소 별로 말이 없고 표현이 없던(아마 몸이 힘들어서 말을 잘 하지 않았었나 보다.) 동생은, 그날 모처럼 많은 말을 했다, 양장점에서 먹고 자고 하던 막내에게 전화로 오빠가 사준 회덮밥 자랑을 하기도 했으며, 아기 낳으러 친정에 간 아내에게도 안부전화와 함께 회덮밥을 맛있게 먹었다며 그 맛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1980년 5월 13일.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찌푸리고 있더니 내가 퇴근할 무렵 이슬비가 뿌리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와서 대문을 붙잡고, 마침 현관으로 나오 던 주인 여자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우리 집 식구들 어디 갔어요?"

"아. 그 집 고모가 더 아프다고 해서 병원으로 갔어요. ㅇㅇㅇㅇ병원으로......."

나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평소에 동생이 다니던 병원이 아니다. 동생은 가끔 "나 많이 아프게 되면, ㅇㅇㅇㅇ병원으로 데려가 줘."라는 말을 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 였던 그 애는, 지가 하늘의 부름을 받을 때 꼭! 그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으로 가고 싶었나 보다.

택시를 탔는지, 뛰어서 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병원에 도착해보니, 어머니가 맥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누나가 나를 맞이했다.

"누나! 윤숙인?"

나는 미쳐 숨도 고르지 못하고 물었다.

"응... 윤숙이... 갔어..."

의외로 누나는 담담하게 말하면서 눈가를 훔친다.

"지금 어디 있어? 우리 윤숙이 어디 있냐고!?"

재차 묻는 나에게 누나는 침착하게 말해주었다.

"수녀님들이 오셔서 잘 씻기고, 수녀들처럼 잘 입혀서 입관했으니 걱정 말아라."

"난? 내가 온 담에 해야 잖아!?"

내가 악을 썼다.

"넌 들어가지 마라. 보면 뭐해? 아주 예쁘게 해 줬는데....."

그렇게 내 동생은 그 마지막을 하늘로 여겼던 오빠를 못 본 채 떠나고 말았다.

"친정 간 올케에겐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라며 누나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난 울고 있을 수많은 없었다. 불과 6개월 전쯤에 아버님을 보내드렸는데, 이번엔 또 동생을 보내야 했다. 다음날 아버님을 모신 천주교 묘지를 찾았다. 올라가는 중에 관리인을 만났다.

"어? 웬일 이슈?" 관리인이 6개월 만에 다시 찾은 것이 의아한 듯 짐짓 놀라며 묻는다.

"산 자리 하나 봐줘야겠습니다."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올라가십시다." 고맙게도 관리인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아뇨... 어머니, 오빠, 언니, 동생 두고 먼저 간 자식, 모가 이쁘다고 묏자리까지 챙겨주겠소. 관리인께서 한자리 잡아주시면 되지...."

관리인에게 일임하고 돌아와 또 다음날 그렇게 동생을 장사 지냈다. 그때 내손으로 제집 자리 잡아주지 못한 게 지금도 마음이 짠하다.

동생을 장사 지내고 온 날 저녁,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모 잘 있어요?"

"........." 아내가 묻는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여보세요?"

"응 나야 말해?"

착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아내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초조한 목소리로 묻는다.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일?"

"당신 목소리가 왜 그래요?"

"내 목소리가 뭐 어때서?"

"고모는?"

"응 잘 있어. 밥도 잘 먹고.... 전화요금 많이 나와 끊어."

아내의 안부는 묻지도 못하고 끊어야 했다.


그렇게 동생의 장사를 지내고 며칠 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처가에는 가보지를 못했는데 전화가 왔다.

"고모부세요? "

"아! 네 접니다!"

작은 처남댁의 전화였다.

"고모 애기 닣았어요! 축하드려요 고모부!"

"아유! 감사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아내를 맡겨만 놓고 미처 가보지를 못했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예쁜 공주님이에요. 고모부를 꼭 닮은."

"고맙습니다. 제가 내일은 어렵고, 모레쯤 내려가겠습니다. 잘 좀..."

"네 걱정 마세요! 원장 선생님이 내가 모시던 분이라 많이 도와주세요."

작은 처남댁은 C시의 간호대학 1기생으로, 조금은 알려진 분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C시 ㅇㅇ병원 산부인과

나는 아내와 함께 새로 태어난 내 딸과 상견례를 하고 있었다. 하나의 생명이 떠나고, 또 하나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그 오묘한 신(神)의 섭리에 거역할 수 없는 엄숙함으로 난 몸을 떨었다.

시종일관 마음속을 꾹 누르고 있던 아내의 그 질문이 나왔다.

"고모는?"

"으응. 뭐.. 늘 그렇지."

"꿈자리가 이상해서...... 저번에 전화했던 날 있잖아요?"

"응 왜?

"그때 13일 전날 밤에 꿈을 꿨는데, 고모가 찾아왔어요. 뭔 보따리를 들고 와서 '언니! 나 가요'라고 하면서 예쁜 아기 잘 키우라고....."

"........."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난 고모가 어떻게 된 줄 알았지...."

그 소릴 들으면서 난 참았던 울음을 울어야 했다. 그렇게 버텼는데 아내의 꿈 얘기에 그만......

아내도 내 울음의 의미를 알았는지 통곡을 하였고, 간호사는 급하게 놀란 아이를 달래며 데리고 나갔다.


딸의 출생신고와 동생의 사망신고를 같은 날 했다. 동사무소 여직원이 놀라며 묻는다.

"어머, 어떻게 같은 날....?"

"잘 봐요. 같은 날은 아니지? 사망신고는 5월 13일, 출생신고는 5월 23일."

"아! 그렇군요..."


지금이라면 내 동생을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보내진 않았을 것 같다.

<골수성 백혈병> 그것이 내 동생의 병명이었다.

지금이라면, 나를 비롯한 남매들이 골수를 나누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30년 전에는 병명조차 알지를 못했다.

우리는 지금도 해마다 그 애가 태어난 2월 보름엔 미역국을 끓여먹으며 그 애를 추억한다. 얼굴이 보름달처럼 둥그렇던, 천사 같았던 내 사랑하는 동생은, 이제 지금 쯤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천상에서 외롭진 않을 테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름달을 닮았던 아이(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