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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Apr 30. 2022

生日 이야기

晩書 홍 윤 기_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세상에 태어난 날. 또는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그날을 달력에 동그라미 쳐놓고, 그날에 특별한 의미를 두어 기념하면서 축하받는다. 우리네 생일날엔 어머니가 뼈를 녹이는 산고(産故)의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출산을 한 후 기진맥진하여 기(氣)가 빠져 허약한 몸을 추스르기 위해 가장 먼저 드셨던 미역국을 끓여 먹는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 어머니에게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며 감사함을 표한다. 산후 미역국을 먹는 것은 미역에 담겨있는 여러 가지 성분이 피를 맑고 건강하게 해 주는 정혈(精血) 작용을 해주고, 철분과 칼슘이 풍부하여 탈모를 예방해 주며, 각종 중금속과 발암물질을 제거해 주는 ‘알 간산’ 성분이 풍부해서 항암에도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해서 산후조리에 더할 수 없는 영양식품이다. 무엇보다도 가격이 저렴하여 빈부(貧富)를 떠나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서민의 국이라는 장점이 있다. 물론 미역과 함께 첨가되는 소고기, 전복, 굴 등에 따라 차이가 보이지만 예부터 우리네 생일 식탁에 오르는 정겨운 음식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에 생일 미역국 담당은 내가 되었다. 젊어서 어머니의 속을 까맣게 태우며 불효(不孝)를 저질러왔던 못난 아들에게 내 어머니는 죄인인 듯 늘 미안해하셨다. 내가 나이 들면서 스스로의 불효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어머니의 머리 위에 하얀 서리가 내려져 있었다. 문득 그 어머니에게 내 손으로 따듯한 국을 끓여 드리고 싶었다. 음력 10월 초사흘, 일이 있어 친정에 가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미역국 끓이는 법을 물어 정성을 다해 국을 끓였다. 지난밤에 물에 불려두었던 미역을 씻어 자르고, 들기름을 넣어 달달 볶다가, 썰어둔 소고기(양지)를 넣고 쌀 씻은 물을 부어 끓인다. 그렇게 번거롭지 않고 해 볼만 하지 않은가? 그렇게 끓여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어머니 생일 국을 차려 드리면서 가장 먼저 “맛이 어때요?”하고 물었다. “너희 들은?”아이들에게도 물었다.

“맛있구나.”

“와우 아빠 최고의 맛인 데요”

이구동성으로 맛이 최고란다.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라 정말 맛이 괜찮았다. 아내가 친정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이젠 자기가 없어도 되겠단다. 그 이후 아주 지극히 당연하게도 미역국 담당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사내 녀석이 부엌엘 드나들면....’하고 말리셨지만 이미 제 엄마와 한패가 된 아이들이 국은 아빠가 끓여야 제 맛이라며 아비를 부린다. 그런 어머니가 아마 스무 번 이상을 아들이 끓이는 미역국을 맛있게 드시고 2005년 94세를 일기로 더 이상 아들의 국을 사양하셨다. 허지만 ‘한번 국 담당은 영원한 국 담당이다’ 아내의 생일 음력 10월 스무 이틀 날, 큰 놈은 양력 5월 8일 어버이날, 딸애는 5월 23일, 그러다 보니 출가해 이웃에 살고 있는 딸아이는 아빠의 미역국이 좋다면서 제 남편 생일 국도 끓여 달란다. 

“이 녀석 아빠가 사위 생일 국을 끓여 내라는 거냐?” 짐짓 거절해 보지만 딸아이는 역사적으로 시작해서 구구절절하게 아빠가 국을 끓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1919년 9월 28일은 영원한 누나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이고, 1950년 9월 28일은 해병대가 이 나라의 심장인 수도를 탈환한 날이며, 1967년엔 아빠가 이역만리 타국의 전선으로 출정하던 날인 이 뜻깊은 날을 영원한 해병이기를 자처하시는 아빠가 하시는 일은 그 자체가 역사임으로 국은 아빠가 끓여야 한다.”며 해병대를 강조한다. 이 논리가 성립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막무가내로 우긴다. 하필 그 사위의 생일이 9월 28일이니 말이다. 오늘은 필자의 생일이다. 당연히 국 담당은 필자이지만, 내 생일 국을 내가 끓인다는 것이 좀 격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이건 아니잖아?” 아내에게 슬쩍 밀어 봤다.

“어머니에게 자식이 대접하는 국인데 뭐가 아니 예요?”

되묻는다. 어머니는 비록 가셨지만 생일을 맞아 그 어머니의 고마움을 새기고 기억하는 날이니 내 몫이란다. 할 수 없이 또 나는 자신을 위해 생일 국을 끓인다.


1967년엔 10월 1일 국군의 날이 음력으로 8월 28일로 내 생일이었다. 9월 28일 Viet-Nam 전장의 출정으로 배를 탔으니 망망대해(茫茫大海) 한 복판에서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았다. 어쩌면 이 생일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생일을 맞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절실함, 부모님께 전장(戰場)으로 간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불효를 어떻게 용서받아야 할까? 마음이 허허롭고 허전하다. 수송 선내에서의 아침식사는 일찍 시작된다. 많은 병사들이 식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갑판에 올라 여명이 뿌옇게 밝아오는 방향을 향해 무릎을 굽혀 큰절을 올린다. 저 수평선 넘어 어딘가에 조국(祖國)이 있고, 그곳 어딘가에 내 부모가, 어머니가 미역국을 끓이며, 軍에 간 아들을 생각할 것이다. 전장으로 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어쩌면 이 절이 내 부모님께 드리는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른다. 뜻 모를 무엇인가가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저 그런 마음으로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엔 벌써 많은 병사들이 줄을 서서 배식(配食) 순서를 기다린다. 먹고사는 것이 생에 절대적 가치를 선점(先占)하던 시절, 넉넉하게 준비된 식사지만 행여 모자랄까, 조금 더 풍성하게 배식을 받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하다. 먹는 것에 목숨 걸었던 또 하나의 전장이다. 비록 미역국은 없었지만 태어나서 처음 보는 풍성한 산해진미(山海珍味) 식탁이다. 못 먹고 못살던, 가난한 나라의 젊은 군인들, 이 땅을 이어받아 내일을 열어가야 하는 젊음들이 먹어야 한다는 본능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던 부끄럽던 1960년대의 자화상이다. 


1년 후 귀국을 한 달여 남겨두고 생일을 맞았다. 이국에서 그것도 전장에서 맞는 처음이자 마지막 생일이다. 앞으로 남은 한 달만 무사히 버텨내면 꿈에 그리던 내 나라 내 부모님이 계시는 땅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이 가슴 저 아래서 힘차게 솟아오른다.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부비트랩이 없나 조심해야 하는 귀국 말년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대대 내의 하사관(부사관)들이 각기 맥주를 들고 찾아왔다. 전장(戰場)에서 생일을 맞아 전우들과 나누어 먹던 맥주의 맛이라니, 마치 한국전쟁 당시 우리 선배들이 부르던 군가(軍歌) ‘전우야 잘 자라!’의 한 소절 ‘노들강변 언덕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이 떠오르기도 했었다. 아! 지금 그 전우들은 어느 곳에서 나처럼 황혼의 노을을 보고 익어가고 있을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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