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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미 Apr 12. 2024

제5부 다시 시작된 돌봄(이번엔 잘할 수 있을까?)

5-3 더 이상 아버님께 맡길 수 없어

어머니의 의부증으로 힘들어하시는 아버님을 위해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다. 당분간 서로 보지 않으면 관심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을까 하는 의도에서였다. 또다시 나는 두 분의 치매 환자를 돌보게 되었지만, 작전은 성공이었다. 아버님과 2주간 별거하면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의부증 치매 증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게다가 그동안 주간보호센타는 죽어도 안 간다고 하시던 어머니가 마음을 바꾸셨다. 사돈이 주간보호센터를 즐겁게 다니시고 본인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진 것을 확인한 후 본인도 다녀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렇게 고향에서 센터에 다니기 시작한 지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가 다니던 주간보호센터에서 어머니를 우려하는 전화가 자주 오게 되었다. 어머니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져 이제는 시설로 모셔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본가로 합쳐야 하나?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 하나? 이래저래 걱정만 하다가 그 해 추석을 맞이하였다. 명절을 지내기 위해 부모님이 우리 집으로 오셨다. 집에 머무는 2~3일 동안 어머니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 때문인지 화장실을 찾지 못해 헤매고, 집 밖으로 나가면 현관문이 어딘지도 찾지를 못해 계속 집주변만 맴돌기만 했다. 이제 배회 증상까지 생긴 것이다. 우리 집이 산 밑의 끝집이기에 망정이지 도시에 살았다면 어머니를 잃어버리기 쉬웠을 것이다. 기저귀도 수시로 점검하여 갈아주어야 했다.  

   

아버님은 불평을 쏟아냈지만 우린 귀담아듣지 않았다. 우린 온통 어머니에게만 관심을 쏟았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치매 진행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기에, 고속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우리 집에 오셨던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오는 도중 대변 실수라도 했으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너무나 심각해질 정도의 중증으로 변한 어머니를 또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해 귀향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명절의 자동차 물결 속에 장거리를 운전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다행히 큰손주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셔다드린다고 했다. 아들(큰손주)네 집은 비록 한 시간 반을 돌아가야 했지만 누구라도 희생해야 했다. 기저귀 등 필요한 물품들과 반찬 등을 챙겨 손주 차에 실었다. 아버님에게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빠짐없이 당부하고 다시 본가로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내드리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나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었다. 어머니가 폐렴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퇴원하는 날에 남편과 함께 시댁으로 갔다. 우린 3박 4일 정도 어머니가 기력이 회복되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댁에 도착해보니, 상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내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남편이 화장실 청소를 하는지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바닥을 박박 솔로 문대는 소리가 들렸다. 속으로 ’웬일이지? 우리 집 화장실 청소도 거의 나한테 맡기는 사람이? 마누라가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장실이라도 청소해 주려는 걸까?‘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하고 어머니가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섰다. 남편이 나에게 따라가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어머니의 바지를 올려주다가 어머니의 몸과 옷을 비롯해 화장실 곳곳에 변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기저귀 안에 변이 있는 것도 모르고 계속 변기를 이용하니 여기저기에 변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남편이 그렇게 부지런히 청소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내인 나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또 아내에게 그 일까지 시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두 번째 이유였을 것이다. 

     

아버님은 이런 상황이 될 때까지 무얼 하셨지? 아버님께 이 사실을 알리니, 여태껏 혼자서 잘 처리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본인은 안방 화장실을 쓰기 때문에 어머니가 사용하는 거실 화장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기저귀는 자주 갈아줬냐고 여쭤보니 그것마저도 확인한 적이 없단다. “오줌 안 쌌어?” 물어볼 때마다 안 쌌다고 하니 그 말을 믿었다고 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치매 환자의 말만 믿고 기저귀도 갈아주지 않고 그대로 센터에 보내곤 했다니, 부부로서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나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머니를 잘 돌보고 있다고 믿었는데 아버님은 아침밥을 같이 먹는 것만으로 어머니를 잘 챙겨준다고 여겼던 것이다. 어머니가 센터에 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아침 밥상도 어머님이 차려야 했으니 부엌살림도 냉장고 안도 엉망이었다. 저녁 식사까지 센터에서 드시고 오니 귀가해도 특별한 대화없이 그저 텔레비전만 보면서 시간을 보냈음에 틀림없다. 말 그대로 방치 수준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졌는데도 전화상으로는 전혀 눈치를 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전화상의 대화에서는 거의 정상 수준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치매 환자는 직접 같이 숙식하며 생활하지 않으면 그 심각성을 속속들이 알기가 참 힘들다. 반찬 걱정을 덜어드리려고 가끔 방문하는 딸조차도 바빠서 바로 가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렇게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어머니를 위한 아버님의 간병 수준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나니 대책이 필요했다. 이런 실상을 눈으로 보고도 그대로 가버린다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머니를 방치한 아버님과 뭐가 다르겠는가!    

 

부모님을 모셔가야겠다고 했을 때,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치매 환자를 어떻게 하려고 집으로 모시고 가냐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요양병원에서 엄마를 돌보고 있는 동생은 치매 환자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기에 더욱 완강하게 반대했다. “언니! 죽으려고 환장했어? 그러다가는 언니까지 입원하게 돼!” 하면서 엄마가 입원해 있는 자기 병원으로 보내라고 성화였다. 동생은 엄마 간병에서 벗어나 겨우 안정을 찾은 언니가 또다시 시어머니 수발을 한다니 심히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엄마보다 더 심한 상태인 어머니를 말이다. 나는 이런 모든 만류에도 내 남편의 엄마니까 내 손으로 모셔야 하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 징글징글했던 치매 간병의 험난한 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아버님과의 임무 교대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님 우리 집에 가서 두어 달 사실 채비하세요.”

“두 달이나? 우린 그냥 여기서 살란다. 여기 내 집이 있는데 왜 너희 집에 가냐?”

“아버님, 어머니를 보세요. 아버님이 제대로 돌봐주시지도 못하는데 어떡하시려고요?”

“그럼 느그 엄마만 델고 가라!”

“혼자 어떻게 사시려고요? 일단 저희 집에 가셔서 한두 달 살아보고 어머니가 조금 더 좋아지시면 다시 오시든가 하세요.”     


아버님은 못마땅해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기에 순순히 따라나섰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운명의 장난인가? 한 달여가 지날 즈음 갑자기 아버님이 오른쪽 팔을 움직일 수가 없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병원 검진을 해보니 폐암 말기라고 한다. 암세포가 전이되어 팔을 움직이기 힘들게 된 것이란다. 어머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까? 그대로 두면 남은 수명이 길어야 1년 6개월이라고 하는데…. 어떡해야 하지?   

   

내 가슴에 무거운 바위가 짓누르는 것 같았다. 숨을 쉬기 위해 크게 심호흡해야 했다. 중증 치매 환자 어머니도 모자라 1년 6개월의 사형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 아버님이라니. 나의 운명인가! 그까짓 거 덤벼라 맘껏 덤벼라! 운명의 신이여! 더한 놈도 다 나에게로 보내라! 내가 다 받아주리라! 오기가 발동했다.     


엄마를 간병할 때는 학교 수업의 일부를 줄이고 취미활동도 접고 엄마를 돌보았다. 이번에는 모든 외부 활동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머니의 치매가 심한 것도 있었지만, 3주마다 아버님의 항암치료를 위해서 수도권에 있는 대형병원으로 다녀야 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한두 달만 우리 집에 계시다 당신 집에 가신다는 바람은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결국 시댁 집을 팔고 합가하게 되었다.   

  

본인의 아픔이 심해서인지 아버님은 어머니를 간병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를 위한 치매 극복 프로젝트 중 하나인 신체활동이라도 같이 해주길 바랐으나 같이 하기는커녕 마치 귀를 틀어막은 사람처럼 대답도 안 하고 보고만 있었다. 기억을 잘 못하는 어머니에게 늘 핀잔을 줄 뿐만 아니라 밖에 잠시 나갈 때는 늘 어머니 손을 붙잡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 거실 창문으로 부모님 산책하는 풍경을 보고 있던 남편이 다급하고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여보! 여보! 큰일났다.”

“왜?”

“어머니가 넘어지셨어!”     


마음이 급해진 남편은 슬리퍼를 미처 발에 제대로 끼우지도 못한 채 뛰쳐나갔다. 신발 한짝이 미끄러져 벗겨졌고, 비틀거리는 남편이 한쪽 슬리퍼만 겨우 신은 채로 어머니를 향해 절룩거리며 뛰어가는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남편이 어머니를 부축하고 일으켜 세우는 걸 보면서 뒤따라 나선 나는 아버님을 향해 싫은 소리를 내뱉었다.     


“제가 뭐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균형감각이 없어서 반드시 손잡고 다녀야 한다고 했죠? 지난번에도 넘어지게 하시더니, 이 상처 좀 보세요!”     

 

아버님이 야속하기만 했다. 아무리 젊은 시절부터 당신만 생각하시며 살았다고 해도 혼자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매번 이렇게 넘어지게 내버려 두다니!    

 

“잘 따라올 줄 알았재! 니가 엄마를 매번 잡아주니까 버릇이 돼서 그런 거지, 혼자 걸을 수 있는데, 맨날 잡아주니까 더 못 걷는 거 아니냐? 뭣 할라고 손을 잡아주냐?”     


비난은 나에게로 쏟아졌다. 영문도 모르는 채 서 있는 어머니 손을 이끌고 들어와 구급상자를 열었다. 얼굴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어머니 아프겠다! 어디서 다쳤어?” 

“몰라.”

“넘어졌어?”

“몰라, 그랬는 갑다.”     


상처로 벌겋게 부어오른 어머니 얼굴을 볼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도 못 하는 어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그날은 아버님이 미워서 밥상도 차려주기 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비슷한 일이 여러 번 더 생겼고, 그에 비례하여 아버님을 향한 나의 미움은 커져만 갔다.   

  

치매 환자들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전문가들도 치매 환자와 대화하는 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팁을 제공하지만 치매 환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들어보질 못했다. 어머니의 약사건만 해도 그 심각성을 이미 알았을 것이다. 치매 환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 모든 것을 내가 직접 관찰하고 점검해 보아야 한다. 치매로 인해 생기는 혼란과 현실과의 간극을 이해하고 잘 대처해야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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