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언어 교환 어플에서 정말 잘 맞는 프랑스 사람을 만났다.
대화가 정말 너무 좋았고, 가치관도 잘 맞았고, 게다가 모델처럼 생겼다.
변호사 친구는 이를 듣자마자, 친구에게 그 사람 인스타를 보여주라고 했고 함께 보니 인스타 팔로워에는 거의 한국인 친구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올라온 사진들도 거의 없었다.
변호사 친구는 확신하게 된다.
'이 사진은 가짜고 이 사람은 사기꾼이다.'
친구는 처음에 만약에 자기가 틀렸다면 50만 원을 주겠다며 돈을 걸었다가 이후에는 점점 확신에 차서 500만 원을 걸기로 한다. 40분 정도 자기가 맞다고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지 이야기했다. 영상통화를 걸면 이 사람이 가짜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프랑스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 친구는 진짜였고 나중엔 둘은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변호사 친구는 건 돈을 주지 않았다. ㅎ
우리는 너무나 쉽게 특정 정보만으로 금세 판단을 하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독일을 여행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친구들의 나라에 놀러 가기도, 집에 초대되어 며칠을 묵기도 하였다. 이걸 들으면 한국 친구들은 걱정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엄청난 순수한 희열을 느꼈고, 이를 통해 그들과 나에게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을 믿는다고 하면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어두운 면들도 있지만 그만큼 아름답고 놀라움 또한 가득하다고 말하면 믿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만나는 이들을 모두 믿는 것이 아니다.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더 깊은 대화를 진행하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통해 발견한 보석 같은 이들에게 믿음을 갖는 것이다. 내가 발견한 삶의 진리의 조각을 비슷하게 그러모은 세계 곳곳의 사람들, 우리들끼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조건을 믿는 것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믿는 것. 그 사람의 가치관을 믿는 것. 그리고 상대를 믿는 나를 신뢰하는 것. 이것이 신뢰인 듯하다. 물론 상대를 믿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용기는 어마어마한 행복을 보답으로 전해주었다.
철학자 : 자네는 성경에 나오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알고 있나?
청년 : 네, 물론입니다. 선생님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웃 사랑 이야기죠.
철학자 : 이 말은 중요한 부분이 빠진 채로 널리 알려져 있지. 신약성서의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적혀 있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청년 :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철학자 : 그래. 이웃을 그냥 사랑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걸세.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남을 사랑할 수는 없어. 그런 의미를 포함한 말이라고 생각하게. 자네가 “타인을 믿을 수 없다”라고 호소하는 것은 자네가 스스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네.
청년 : 다, 단정이 지나치십니다!
철학자 :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자신을 좋아해서’ 자기만 바라보는 게 아닐세. 실상은 그와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는 통에 자기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거라네. 청년 : 그러면 제가 ‘나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에 나만 바라보고 있다는 겁니까?
철학자 : 그래. 그렇지.
(미움받을 용기 2 中)
우리는 태어나기를 자기중심적으로 태어난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 태어나기에,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조작기(2~7세)의 아동들의 특징 중에는 자기 중심성이 있다. 자기 중심성이란 유아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보고, 다른 사람의 생각, 관점이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과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의 자기 입장 이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렵고, 자신과 타인과의 구별도 명확하지 않다.(최경숙, 송하나, 2010) 이 시기의 아동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남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보는 것을 남도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이상 연약하고 무기력하지 않은 다 큰 어른들 중 이러한 자기 중심성을 완전히 버린 이들이 얼마나 될까.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기란 정말 어렵다.
내가 보는 세계가 전부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더라도, 내식대로 해석하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믿는다. 상대가 내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자기 식대로 충고를 했을 때, 기분이 나쁜 경험이 한 번쯤 있지 않은가. 온전히 상대를 알지 못한 채 충고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조언하는 경우가 참 많다.
사람이 불안할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 큰 듯하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 신경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해도 사실은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내가 중심이 아닌 세계를, 나를 중심으로 보고자 하니 왜곡과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벗어나지 못하면, 온전한 세계를 볼 수 없게 된다.
내가 안정되고 건강해져서 혼자서 설 수 있게 된다면,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사라지면, 비로소 온전히 상대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된다.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상대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상대가 어떤 깨달음과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상대에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더 깊이 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나'를 지우고 상대에게 초점을 맞춰서 '너'에게 집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다음 단계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단계라고 믿는다.
나에서 너로, 너에서 그리고 우리로.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는 방법은 이 과정에서 얻어졌다.
'너'에게 온전히 초점을 맞추다 보면 상대도 정말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을 꺼내고, 그 사람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서로의 본질을 보여주면서 진실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조금은 초점이 다르지만, '나'에서 '너'로 가는 길을 발견했을 때에 쓴 글을 다시 적으며 마무리하려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자기만의 길이 있다. 그 말의 뜻은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궤도를 돌고 있다는 뜻이다. 궤도 이탈이란 없다. 이를 잊게 되면 나의 답과 나의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기가 쉬워진다. 나 또한 그동안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답을 얼마나 많은 일들에게 강요했었을까. 그리고 조언이라는 말로 포장된 다른 사람의 길을 얼마나 따르려고 급급해 왔는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궤도를 지킬 수 있는 힘과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자신의 답을 직접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데미안처럼 싱클레어만의 답을 찾도록 방향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 6/30 데미안을 읽고 쓴 에세이 中
*최경숙, 송하나. 발달심리학. 전 생애 : 아동, 청소년 성인. 교문사 2010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용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