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세상에 나쁜 남자보다 더 나쁜 남자는 '바쁜 남자'래. 그게 바로 오빠야."
연애시절, 남편은 매우 바빴다. 직업의 특성상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는데, 거의 매일 야근이었다. 주말에도 출근을 했다. 한 달에 쉬는 날이 1~2일? 출근을 하지 않는 주말에도 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살았다.
매일 바쁘게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사는 것처럼 보였다. 일상이 버거워서 주변을 신경 쓰기도 힘들어 보였다. 자연스레 섭섭함이 쌓여갔다.
평범한 데이트도, 특별한 기념일도, 둘만의 여행도 불가했다. 쉬는 날 데이트 중에도 늘 긴급으로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업무를 봐야 했다. 벼르고 벼르던 놀이공원에 놀러 간 날에도 두 시간가량 업무를 봤다. 도대체 무슨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길래 이렇게 바쁜 건지 기가 막혔다.
아침에 출근하면 자정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삶이 본인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래도 남자가 일이 없는 것보다는 바쁜 게 낫겠지. 이렇게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이니 다행 아닌가. 그래, 적어도 이 남자는 가족을 굶길 일은 없겠구나.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가장 먼저 전한 분은 팀장님이었다. 듣자마자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희영아, 너는 귀하고 귀한 내 사람이니까 그 어떤 남자를 데려와도 나는 네가 더 아까워. 당연히 좋은 사람하고 결혼했으면 좋겠어. 아직 그분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하나만 물어볼게.
만약에 모든 걸 다 잃고 빈 몸뚱이만 남았을 때, 그 사람은 곡괭이 하나 들고나가 맨 땅을 파서라도 가족들을 건사할 것 같니?"
나는 대답을 못했다. 대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미 곡괭이 하나 들고 있는 그 사람이 눈앞에 그려져서. 몸이 죽어라 하루종일 땅을 파고 있을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서.
"그럼 됐어. 남자는 별 거 없더라. 그저 착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으면 되는 거야.
희영이 네가 능력 있으니까 돈은 남자든 여자든 누가 벌든 상관이야 없지.
그런데 너한테 그 정도 믿음을 준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될 사람이야. "
벌써 8년 전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의 나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안정적일 줄만 알았던 우리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정말 밑바닥으로 내려가 맨땅을 파야할 상황이 왔을 때, 그 사람은 그렇게 했다. 그저 처자식 굶기지 않겠다는 각오 하나로 모든 자존심을 다 버리고 맨땅을 파더라.
하루 종일... 몸이 부서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