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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Jun 05. 2024

풋풋한 사랑...!

- 라라 소소 33

 지금 살고 있는 이 동네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사 온 후 요기조기 조금씩만 장소를 변경하며 줄곧 살고 있는 동네다. 엄마는 내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옆 동네의 큰 스포츠 센터로 수영을 배우러 다니셨다. 고급반을 지나 경기에 나가는 선수반에서도 오래 수영을 하셨을 정도니 엄마의 수영 솜씨는 알아줄 수밖에 없다. 나도 수영은 엄마에게 제대로 배웠다. 사실 수영을 처음 배우게 된 건, 초등학생 때 여름에 열리던 수영 교실에서였다. 그 어리고 정신없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영 교실이니 수업 분위기가 어땠겠는가. 산만해서 집중도 못 하고 엉망진창이었지 뭐. 수영을 배운다기보다 물에서 놀기 위해서 다녔을 거다. 부모들도 초등학생 자녀들이 엄청나게 수영을 잘하기를 바라면서 보내지는 않았을 거다. 아이들이 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저 물에 뜨기만이라도 할 수 있기를 소망했으리라 짐작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더 어렸을 때 사진을 보면 아주 은 계곡의 물에서도 나는 울고 있다. 아빠가 나를 안고 있고, 계곡물은 아빠의 무릎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 더 어린 날의 사진 속의 아기도 엄마의 품에 안겨서 울고 있다. 엄마는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파도는 엄마의 발목 언저리에서 찰랑거리고 있다. 맞다. 나는 영유아기 동안 물을 무서워해서 가까이만 다가서도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어댔다고 한다. 신기한 건 그렇게 물을 무서워했음에도 목욕은 좋아했고 목욕탕에서도 신나게 잘 놀았다고 한다. 반면에 오빠는 물을 좋아했다. 그저 계곡이든 바다든 욕조든 물이라면 가까이 가서 하루 종일도 물속에서 놀며 물 밖으로는 나오려 하지 않았다. 오빠를 좋아하고 잘 따랐던 나는 물속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오빠 주위를 서성이며 심각하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여름 수영 교실은 성공적이었다. 처음에는 가기 싫어서 칭얼대고 울고 엄마한테 엄청 매달렸는데 하루가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나고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는 수영장 물에서도 친구들과 재미있게 물장구를 치며 놀 수 있게 되었다. 그날들의 사진을 보면 짧은 치마가 달린 원피스 수영복에 뽀글이 꽃이 달린 수영모를 쓰고 있는 까매진 어린이를 발견할 수 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모두가 다 수영복을 입고 뽀글이 수영모처럼 특색 있는 수영모를 쓰곤 했는데, 요즘에는 어린아이들도 어른들처럼 다들 래시 가드를 입고 수영장에 오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우리 둥이 조카들도 수영장에서는 수영복 바지만 입어도 된다고 얘기했는데도, 위까지 다 입고 싶다고 해서 놀라기도 했다. 이런 건 눈에 보이는 대부분이 래시 가드를 입고 있어서겠지.     


 물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면서 한번 물에 들어가면 손발이 퉁퉁 불고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나오지 않는 일이 빈번해졌다. 추워서 부들부들 떨면서도 물속에서 노는 게 즐거웠다. 오빠와 떨어지지 않고 물놀이를 할 수 있으니 더 좋았을 거다. 이때부터 엄마의 손길이 나의 손과 발을 이끌어 주었다. 오빠는 계속 물을 좋아했으니 이미 수영을 잘하고 있었고, 이제 막 물과 사랑에 빠진 나에게 물에는 빠지지 않도록 엄마가 수영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유형, 배영, 평영까지 하나씩 차근히 배웠고, 개구리헤엄이라고 부르는 평영을 제일 좋아했다. 오빠는 횡영과 접영까지도 다 배워서 편안하게 모두 수영하는데, 나는 수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사실은 너무 힘들어서 꾀가 났으므로) 접영은 조금 하다가 말았다. 횡영은 할만하면서도 어려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어설픈 횡영은 하지만 인명 구조를 할 정도는 아니다. 내가 구조당 할 듯. 지금도 물에 들어가면 평영을 주로 하는데, 숨쉬기도 편안하고 물안경이 없어도 여유롭게 수영을 즐길 수 있어서이다. 물론 광활하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배영이 제일 유유자적이긴 하지만.     


 둥이 조카들은 아기 때부터 물을 좋아했다. 목욕을 좋아해서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거의 매일 목욕하며 물놀이를 즐겼다. 아직 수영장이나 바다에 들어가 보지 못했을 적에 물안경을 먼저 사 주었는데 그걸 쓰고 욕조에서 수영 놀이를 하곤 했다. 처음 바다를 보고는 그 거대함에 압도당했는지 조금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파도에 따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모래사장에서 모래놀이를 하고 조금씩 물 가까이 다가가며 자연스럽게 바다를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엄마를 똑 닮은 오빠는 둥이들이 물을 좋아하는 걸 보며 슬금슬금 수영을 가르치려 들었다. 엄마도 이에 동조하여 둥이들은 아빠와 할머니의 개인 트레이닝을 받게 되었고 조금씩 실력이 늘었다. 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옆에서 함께 해 주는 안전한 동반자가 있으니 확실히 나이 지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이라는 단어에는 설렘도 있고 두려움도 있다.     


 풋풋한 사랑. 처음의 설렘. 이런 마음이 사랑이구나 하는 느낌. 사랑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사용하는 게 아니니까 많이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다니던 스포츠 센터가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때는 여름이었고, 엄마가 속해 있는 선수반의 강사는 선수급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수강생들이 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른 스포츠 센터와 연계가 되면 옮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던지, 선수반 수강생들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수영 말고 다른 길로 이끌어 주었다. 그건 수상 스포츠의 세계였다. 수강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한두 대의 차로 한강 상류로 갔다. 한강 상류의 끝에는 팔당댐이 있고 그 너머에는 강 양쪽으로 수상 스키장이 많이 있었다. 강북에 사는 수강생들이 가기에 멀지 않은 곳이었고, 수상 스키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지도 않았다. 수상 스키를 알기 전에는 수상 스포츠가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단독으로 강의를 듣고 배움을 받는 거라 집중도도 컸고 배움도 빠른 편이었다. 한 번의 금액이 비싸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는 운동이기에 많이 탈 수는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을까?     


 수상 스키라는 운동에 매력을 느낀 엄마는 다른 분들과 어울려서 다니는 대신 천천히 여유롭게 수상 스키를 운동으로 배우고 즐기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택하셨다. 그건 바로 나. 중학교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집에서 책만 읽고 있는 나를 수상 스키의 세계로 끌어들이셨던 거다. 오빠는 고등학생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적인 학생이었기에 수상 스키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방학임에도 학교에 열심히 다니며 공부하고 있었다. 수상 스키는 아무래도 여름 스포츠다 보니 여름에는 수상 스키장 데크에 사람이 늘 복작거린다. 단체로 놀러 오는 사람도 있고, 주말에는 근처에 숙박을 잡고 낮에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부유하거나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하루 종일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밥을 먹고 수상 스키뿐만 아니라 다른 스포츠도 즐기곤 했다. 일이 에 한 번씩은 가다 보니 상주하는 사람들의 정체(?)도 알게 되었고, 엄마와 함께 와서 여유롭게 하루를 보내고 가는 나에게 말을 건네거나 먹을 걸 나눠주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심지어 나는 조금 지나고 나서 수상 스키에 재능을 보이기까지 해서 어른들의 관심을 더 받게 되었다. 마른 몸으로 푹푹 물속으로 고꾸라지면서도 파워 있게 타는 모습에서 선수로 키우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나의 싸부 덕분이었다. 나의 싸부는 한양대학교 체육학과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수상 스키장 데크에 상주하면서 먹고 자고 가르치고 배를 운전하고 그렇게 일하고 있었다. 수상 스키장에는 이렇게 몇 달 동안 상주하는 체대 학생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일을 하다가 졸업을 하고서는 정식 직원이 되는 경우도 여럿 봤다. 나의 싸부가 그랬다.     


 수상 스키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일대일의 싸부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엄마가 다니던 수상 스키장에는 세명의 싸부와 두 명의 파트타임 대학생이 있었는데, 왕싸부는 사장님이었고, 중간 싸부는 정직원, 막내 싸부는 학생이지만 거의 정직원 급의 우리 싸부였다. 배를 몰 수 있는 자격증을 갖추고 있는 강사들이었다. 수상 스포츠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시간에 따라서 혹은 나가는 배에 따라 싸부가 다를 수 있다. 싸부 별로 가르치는 스타일도 조금씩 달라서 처음에 왕싸부에게 배웠다고 하더라도 중간 싸부나 막내 싸부의 배를 타보는 게 도움이 된다. 엄마는 왕 싸부에게 시작했고, 나는 막내 싸부에게 시작했다. 그래서 그 스타일이 조금 더 익숙했다. 중간 싸부는 거침없어서 한번 타면 너무 힘들었지만 그만큼의 실력도 보장이 되어 엄마와 나는 망설이기는 했지만 종종 중간 싸부의 배를 타곤 했다. 그래도 난 우리 막내 싸부가 젤로 좋았다. 얼굴은 새까맣고 늘 벌게 있었고, 크지 않은 키에 웃으면 흰 이가 가득 보이며 빛났다. 눈은 작은 편이었는데 그마저도 웃으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자상했고 멋있었다. 사실 외모로 보면 다른 대학생 오빠들이 더 잘생겨서 인기가 좋았는데 나는 자상한 모습과 웃는 모습에 반해서 막내 싸부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고, 가끔 밤에 싸부 목소리 듣고 싶어서 데크로 전화를 해보기도 했다는 건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못 타서 부끄러웠다. 보통은 두세 번 만에 뜨는데, 못해도 다섯 번 안에는 뜨는데, 나는 열 번이 되도록 물에서 뜨지 못했다. 그 감각을 알 수 없어 싸부의 설명을 들어도 잘 되지 않았다. 어떤 이는 가볍게 뜨는데 나는 가볍지 않았고 번번이 물에 잠겼다. 이런 나를 싸부는 자상하게 끝까지 가르쳐 주었다. 하나씩 다시 설명해 주고, 다시 배를 운전하고, 또 가라앉으면 배를 돌려서 다시 나에게 돌아와서 가르쳐 주는 식이었다. 뜨지 못해서 끈을 놓치면 배는 한 바퀴를 돌아 수상 스키를 타는 사람이 끈을 잡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건 배를 운전하는 강사에게도 힘든 일이다. 그렇게 첫 번째 배에서는 아얘 뜨지 못하고 배에 실려서 들어온 나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떴다. 시원했다. 그리고 넘어질까 봐 무서웠다. 나는 지금도 무엇이든지 느린 사람인데 수상 스키도 그랬던 것 같다. 느리게 하나씩 습득했고 감을 익히고서는 겁 없이 탔다. 투 스키에서 원스키로, 원스키에서 파워 스키로 실력이 상승되고 배의 속도도 더 빨라졌다. 빠른 배에서 물살을 가로지르며 수상 스키를 타다가 넘어지면 물 위를 심하게 구르게 되고 위험한 순간이 오기도 한다. 어느 때는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까지 미련하게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늘 막내 싸부는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몇 해가 지나도록, 막내 싸부가 학교를 졸업하고 정직원이 되어 연애를 하고 딸기의 아버지가 될 때까지 나는 막내 싸부를 좋아했다. 딸 얘기를 하는 싸부는 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입술이 실룩거리며 하얀 이가 드러나게 웃곤 했다.


 나도 대학에 가고 학교 생활이 바빠지고 연애도 하고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흘렀다. 수상 스키장은 강 건너편으로 위치를 옮겼는데 엄마와 나는 옮긴 데크에도 종종 찾아가서 한 번씩 타고 하루를 보내고 오곤 했다. 강에서 바라보는 지는 해는 정말 아름답다. 해지기 직전과 해가 뜬 직후 새벽의 물은 잔잔해서 수상 스키를 타면 몸도 마음도 가쁜해진다. 자주 가지는 못하고, 점차 수상 스키를 타는 날도 줄어들다 코로나 전부터는 가지 않게 되었다.


 나의 느림을 끝까지 자상하게 돌봐주고 그 이후에도 실력이 향상될 수 있도록 살펴준 우리 막내 싸부. 나의 풋풋한 첫사랑.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자상한 사람일 거고 자주 웃는 사람일 거고 웃으면 눈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까만 얼굴에 하얀 이만 반짝이는 사람일 게 분명하다.


 보고 싶다. 그날들은 나에게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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