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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울한 로보트 Sep 19. 2023

0. 공부는 알았지만 나를 사랑하는 법은 몰랐다

조건부 사랑 “우울증의 서막"


공부만 잘하면 부자가 되고 행복해지는 줄 알았다

나의 부모님은 대학교를 다니신 적도 공부를 잘하셨던 적도 없으셨지만 공부를 잘하는 나를 참 자랑스러워 하셨다. 시험을 못봤다고 혼내시지도 않으셨지만 잘봤을 때 자랑스러워 하시는 모습에 일단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동생보다 공부를 더 잘하던 내가 방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예쁘게 꼬투머리를 다듬은 딸기를 방에 넣어주셨다. 그게 엄마만의 사랑 방식이었달까. 나이가 서른도 훨씬 넘고 이제 공부가 아니라 일에 치이는 딸에게 엄마는 맛있는 반찬을 해주신다. 읽던 책이 노트북으로 바뀌고 딸기가 김치찜으로 바뀌었을 뿐 엄마의 사랑도 또 나의 노력도 변함이 없이 같다. 한가지만 다르다. 나의 마음. 


어렸을 적 공부를 잘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공부만 잘하면 부자가 될 수 있고 걱정 없이 살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불행하다.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도 갔고 멋드러진 직장도 다니지만 슬프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조건부 사랑이다. 


이건 꼭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무조건적인 사랑이란게 과연 존재할까? 그 자체의 본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피로 엮인 부모와 자식  본능적 사랑 안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 자식이  특정 직업을 갖길 바라진 않더라도 어떠한 성격이나 행동을 하길   번도 바라보지 않은 부모가 세상에 있을까?)


우스갯소리로 나와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으로 일컫는 강아지의 사랑조차 조건부적이다. 내가 새벽 몇 시에 화장실을 가든 일어나 문 앞을 지켜주는 강아지의 사랑 또한 맛있는 간식을 몰래 더 챙겨주는 나에게 향해있다. 


완전 무결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마치 무한 에너지원이라는 말처럼 단순히 단어로만 존재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껍데기뿐인 개념으로 느껴진다. 본능으로도 안 되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와의 관계는 조건부 사랑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건"이란 나에게 바라는 무수한 소망에서 출발한다. 매일 마주치는 하루의 다양한 사건, 사고 속에서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바람들을 갖는다. 정거장 멀리에서 오고 있는 출근 버스를 향해 달려가며 5분 일찍 사무실에 도착해 조금의 여유를 부리는 상상부터 오랜 기간 바랬던 직장 면접을 보며 어느새 새로운 회사에 다니는 내 모습을 그려보는 것까지 크고 작은 기대들이 가득 차있다. 

 

꼭 이런 소망이 내 마음에서 자생적으로 우러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 직장 생활 중 나를 절벽으로 밀어내며 많은 것을 강요하는 다양한 "외부의 목소리"가 있었다. 마치 그 일이 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 마냥 나를 다그치는 "제3의 존재들"로 가득했다. 이런 나의 마음속과 밖에서 강요되는 너무도 많은 희망 사항과 조건들은 나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무의식에서조차 나를 지배했다. 꼭 직장 생활이 아니라도 가정 안이나 친구와의 관계, 스쳐 지나가는 사회생활 등에서 나를 밀어붙이며 나에게 "그" 자신의 소망을 심어주는 "누군가"는 어디에든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학습되어 이게 내 마음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 조차 분별이 안 되는 소망들 또한 존재한다.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주입되는 무수한 가르침은 우리를 억누르는 또 다른 의미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외적으로 아름답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모습을 찬양하는 미디어 속에서 수십 년을 자라나며 나는 나에게 참으로 많은 조건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소망들의 어디에서 왔건 이 모든 것은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되어 나와의 관계를 조건부 사랑으로 옭아맨다. 세상 그 누군가와 맺는 관계 중 이보다 더 조건부인 관계가 있을까 싶을 만큼, 나는 소망/희망/기대라는 멋진 이름표 아래 내가 만든 다수의 조건들로 나를 괴롭힌다.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된 이 수많은 조건들은 수십 개의 채찍이 되어 오만 가지 각도에서 나를 후려친다. 한 조건을 만족시키더라도 다른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 채찍은 여지없이 나의 마음을 긁어 내린다. 


(가령 오늘 아침 나는 글을 쓰며 성취감에 휩싸여 잠시 나 스스로가 만족스러웠지만, 어젯밤 먹은 떡볶이와 튀김만두로 올라간 체중계의 숫자를 보며 나를 다시 야단쳤다.)  


나를 다그치는 채찍의 손잡이는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손에 꽁꽁 옭아매져 있다. 

이러한 채찍들은 해가 가면 갈수록 더 거칠고 날카롭게 내 마음을 내리친다. 이 학교에 들어간다면, 이 일만 성공한다면, 저 집을 사게 된다면, 살을 몇 킬로만 뺀다면 등 끝도 없는 조건으로 나는 나를 몰아세운다. 그리고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잠시 찰나의 순간에만 나에게 사랑을 준다. 그 순간만은 나에게 친절하고 아량을 베푼다. 잠시 잠깐 내가 사랑스럽고 좋다. 나에게 짧은 시간이나마 미소를 베푼다. 


하지만 그 조건을 불충족시키는 날에는 가차 없이 나를 비판하고 미워한다. 가시 돋친 말들로 나를 찌르고 왜 그랬냐고 이젠 어떻게 할 거냐고 몰아세운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자조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잊지 않고 챙겨주며 나의 미래도 언제나 그래왔듯 불행할 것이라는 저주 섞인 말을 퍼붓는다. 그러면서 과거에 했던 비슷한 종류의 모든 실수와 실패를 끌어온다. 나만 아는 작은 실수까지도. 


역설적이게도 
나를 너무도 잘 알기에,
내가 어떻게 하면 아픈지도 제일 잘 알기에,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아프게 상처 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가르쳐 주진 않으셨다. 가르쳐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당신들도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근면, 성실을 최고의 미덕으로 내세우며 더 열심히 더 최선을 다해 나를 몰아칠 수 있도록 십수 년을 이끌어주셨다. 평생에 걸쳐 나의 마음을 때리던 채찍은 매일 하루만큼 더 가시 돋치고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이 채찍은 어느새 내 마음을 다 산산조각 낸 것도 모자라 어느새 내 목 밑까지 옭아매게 됐다. 


부족한 나는 이 많은 조건들을 채워 내기 위해 참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여전히 힘든 것인가? 또 왜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인가? 언제까지 힘들 것이며 도대체 행복해지려면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 것일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나는 걸까? 


무수한 질문들이 마음의 평원 속에 잡초처럼 솟아났다. 그리고 그 잡초들은 모이고 모여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우울증”이라는 이름의 숲으로 나의 마음을 지배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쉬운 일은 없어 보였다. 나에게 상처 주는 이들과 매일 나를 누르는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도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노력할 힘도 용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노력으로 무엇이 바뀌길 바랄 소망도 모두 활활 타버렸다. 마음이 타고나버린 자리에 남겨진 재들은 잔잔히 나에게 속삭인다. 눈 한 번만 감고 뛰어내리면 다 끝이라고 잠깐 아프면 더 이상 아프지도 노력하지도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나의 자살 열망이 시작됐다. 


6층에 위치한 우리 집의 높이가 애매해서 여기서는 뛰어내려도 죽지 않을 리스크가 높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목을 매다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집의 천장에 나있는 환풍기 구멍을 보며 이게 몇 킬로까지 버틸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했다. 강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생각하였지만 더러운 물이 입으로 차오르는 죽음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아니 사실 강까지 갈 용기가 없었다. 스위스에서 자살을 도와주는 단체가 있지만 엄청나게 복잡한 의학적 서류 리스트 (왜 내가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는지를 의학적으로 증명해야 한다.)에 포기했다. 내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나의 공간에서 잠들듯 죽고 싶었다. 내 마음속은 어느새 시꺼먼 꽃으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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