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을 진단받고, 의사 선생님이 가장 먼저 나에게 준 미션은 비워내기였다.
미션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무엇을 비워낼까 고민하다 나름대로 순서를 짜봤다.
1. 관계 비워내기
2. 방안의 잡동사니 비워내기
3. 꽉 찬 옷장 비워내기
4. 체지방(?) 비워내기
내가 가장 1순위로 비워내야 할 것은 바로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천천히 돌이켜 봤을 때 내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부분이 바로 인간관계였다.
누군가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에이 네가? 하면서 손사래를 칠 수도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누군가가 떠난다는 것이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생겨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당시 우리 집은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빚더미에 앉게 됐고, 밤낮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전국 각지를 돌며 떠돌이 생활을 했어야 했다.
모텔, 호텔, 여관 등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잠을 잤고, 아예 형편이 어려운 날은 차에서 잠을 자고 공중화장실에서 씻고 학교를 가기도 했다. 그러다 가끔은 우리 가족을 잘 아는 가족의 집에 나와 내 동생을 두고 몇일씩 엄마아빠가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혹여 엄마아빠가 나를 두고 영영 떠날까 봐 두려웠고 그 두려움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는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엄마아빠와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 몸이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을 했고,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을 했다.
내가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교 생활도 잘하고, 잘 웃어야 엄마아빠가 나를 누군가의 집에 맡겨두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누군가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 옆을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똑똑하고 성격 좋고, 활달하고, 밝은 내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혀 나의 에너지를 한계치 이상 써가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다 보니 나의 인간관계는 서툴렀고, 내가 마음을 활짝 열면 사람들은 떠나가버렸다.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를 떠날 때마다 겪는 나의 좌절감은 자책으로 돌아왔고
'내 성격이 이상하니까', '내가 잘나지 못했으니까' 하는 피해 의식이 나를 괴롭혔다.
이런 나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나는 더욱 날을 세웠고, 괴로운 생각들이 나를 붙잡고 늘어질수록 나는 인간관계에 매달렸다.
그렇게 벼랑 끝까지 몰려보니 나를 몰아세운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떨어지는 낭떠러지에서 나를 붙잡은 것도, 바로 나였다.
이제 나와 나 사이의 관계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비워내려고 한다.
나 스스로와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한데, 누군가와의 관계가 온전할 리 없었다.
부모님을 기다리는 두려움 속에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우고 있을 때 결국에는 돌아와 나를 안아줬던 부모님처럼
이제는 두려움 속에서 내가 나를 안아 줄 것이다.
누군가 나를 떠나도, 나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