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가끔씩 정문 앞에 아이들이 북적북적 모여있을 때가 있었다. 귀를 잡아끄는 익숙한 소리에 무리를 비집고 들어가 보면 노란 생명체가 목청껏 울고 있었다. 책에서나 보던 병아리를 실제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보송보송 보드라울 것만 같은 솜털, 종이박스 안에 옹기종기 모여 시종일관 움직이던 모습. 지금 생각해보면 겁에 질려 아등바등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8살 어린아이의 눈에는 귀엽고 신기하게만 보였다.
"할머니, 병아리 한 마리에 얼마예요?"
"500원."
그 작디작은 생명의 가격은 500원이었다.
"엄마 병아리 진짜 키우고 싶어요~ 내가 똥도 치우고 밥도 주고 다 할게. 응?"
학교 앞 병아리는 아픈 병아리라 안된다며 단칼에 거절당했지만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린 터. 병아리 장수가 올 때마다 졸라대니 결국 한 마리를 사주셨다. 주위에선 금방 죽을 거라 했지만 이미 소녀의 머릿속에서 노란 병아리는 닭이 되어 뛰놀고 있었다.
그 날부터 학교 수업이 끝나면 병아리를 보러 한 걸음에 달려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밥도 주고 물도 주고, 때때로 심심한 건 아닐까 어린 마음에 박스를 툭 툭 쳐보기도 했다. 병아리를 키운다는 소문이 친구들 사이에 퍼지자 몇몇 아이들은 삐약이를 보러 집에 놀러 오곤 했다. 당시 아파트촌이었던 동네에서 병아리를 키우는 집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괜한 우월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삐약이와의 시간은 계속되는 듯했다.
엄마 삐약이가 안 움직여요..
당연했다. 애당초 닭으로 장성할 병아리를 단돈 500원에 팔 어른은 없다. 태어나자마자 병들고 아프다는 이유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훔쳐 팔려온 생명체였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이해하기에 소녀는 너무 어렸다. 사료 대신 벌레를 잡아줬어야 했나? 종이박스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풀밭에서 키우지 않아 그런가?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끝끝내 답은 찾지 못한 채 뻣뻣하게 굳은 병아리의 몸을 녹여주겠다고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잘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학교 앞에는 여전히 병아리, 메추라기, 오리 장수가 찾아왔고 그때마다 매번 성체가 될 때까지 키울 거라 우겼다. 그렇게 크고 작은 생명들이 소녀의 손을 거쳐갔다.
더 이상 아이는 부모님에게 무언가 키우고 싶다고 조르지 않게 되었다. 작은 생명체들의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그들은 소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하나 하나 연을 맺고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생명이 지니는 무게를 배워갔다.
요즘도 안타까운 사연의 길아이들을 볼 때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드는 이 마음이 순간의 감정은 아닌지, 기꺼이 그 아이의 일생을 짊어질 자신이 있는지. 단순히 예뻐서, 귀여워서, 안타까워서, 외로워서 라는 이유로 집에 들이기엔 하나의 생명이 지니는 무게와 책임은 매우 크다.
반려동물과 '가족'이 된다는 건 일생을 책임질 준비가 되었다는 것. 그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겠다는 것. 훗날 찾아올 이별의 순간에 아픔만 남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그 어린 날, 고사리 같은 손에 삐약이가 남겨준 따뜻함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