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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여자 Dec 23. 2016

여권, 거기 있어줄래요.

다큐로 살고 싶은데 늘 시트콤이 돼버리는 나의 하루들

                                                                                      

왜 이런 일은 늘 나에게만

-해외여행 여권 에피소드-
                                                                                                                                                                                                                                                                                                                                                                                                                                                                                                                                                                                                                                                                                   

2016/12/08 (목)

금요일, 월요일 휴가니까 빠지지 않게 내 할 일 다 해내고 땡퇴 → 서울역 도심공항터미널까지 눈썹이 휘날리도록 전력 질주 → 티켓팅하고 수화물 미리 부치고 → 니나노 널널하게 직통열차 타고 인천 공항 도착 → 면세 쇼핑 눈누난나하고 저녁 식사까지 딱 마치고 스벅 커피 사서 딱 비행기 좌석에 착석.


머릿속 내 아바타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렸나 모르겠다. 


'그러면!! 일단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 이미 마음은 세부로 떠나 바다에서 노닐고 있지만 휴가 동안 비워두는 내 자리로 회사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다 잘 처리해주고 가야 하니까 진정하자... 진정하자... 

드디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퇴근시간

예상보다 살짝콩(10분 정도) 늦게 퇴근을 하면서 들뜬 마음은 배가 됐다. 

아아 빨리빨리.... 아 뭔가 설리 설리...ㅎㅎㅎ (여행의 설렘 최고조는 떠나기 전이니까.. )



서울역 도심 공항 터미널 수화물 체크인 데스크


체크인을 하려는데 신랑은 되고, 나는 안된다고 했다.

분실 여권이라 빨간 줄이 뜨니 신분증을 제시해 달라고... 

엎친 데 덮친 격. 나는 얼마 전에 신분증을 잃어버려 신분증이라 할 게 없었다.



아... 뭔가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온다. -    _-





2015/ 12/ 20 (일)


하와이로 허니문을 즐기고 있던 우리 부부는 5박 7일 중 마지막 날 머스탱으로 오픈카를 예약해두고 신나게 달릴 작정이었다. 새벽부터 차량을 픽업하는 열정까지 보였다. 


쭉 뻗은 해안도로를 달리지 못해 슬픈 말


그런데 여권을 챙기라는 남편 말에 여권을 챙기려고 보니....  여권이 간데없이 사라졌다.  

당황해서 허둥지둥 엄청 찾고 있으니 이렇게 우리의 하와이 마지막 날을 망칠 순 없다고 생각한 남표니가 이럴 일이 아니라 전 날 다녔던 곳을 다녀보자고... 새우 트럭에서부터 거북이 본 곳, 로드숍들, 식당들 다 다녀보고 아웃렛에 전화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Sorry, ma'am 뿐...


비도 쏟아지고... 뚜껑(?) 열어 하늘 구경도 못 해본 머스탱이는 구슬프게 울고...  온 섬을 헤매고 다녔지만 여권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아서 결국 호놀룰루 한국 영사관에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여권 분실 신고를 했다. 근처 월마트에서 보정의 자비라고는 1도 없는 코스트코 회원권에 붙이는 사진마냥 1초 만에 사진을 찍어 (우여곡절 끝에) 긴급 여권을 발급받았다.

(이때도 되니 안되니... 하루가 더 걸리니... 체류해야겠니... 난리도 아니었음... T_T)


(이 부분이 중요하다!!!!!!!)

여권 신청을 하느라 작성해야 하는 서류 하단에 기존 여권을 찾으면 계속 사용할지 아니면 폐기할지에 대한 선택지가 있어서 (10년짜리 전자여권이고 자동 출입국도 신청되어 있고 하니) 계속 사용하겠다에 체크했더랬다.

 

어쨌든 하루 종일 아내 뒤치다꺼리하느라 힘들었을 남편 눈치를 보며 해가 다 져버렸고... 아침 비행기라서 픽업 버스를 이른 시간에 탑승해야 해서 숙소로 돌아가 다음날 눈 뜨면 눈곱만 떼고 나갈 수 있게 짐을 쌌다. 


망할 여권... 왜 내가 여기 있다 말을 못하는거니....


그런데!!!!!!!!!!!!!!!!!!!!!


세상에. 귀신이 곡할 노릇 ㅠㅠ


백팩 안쪽 조그만 주머니에서 여권이 나온 것이다 (뜨악)


그냥 나오지 말지 ㅠㅠㅠㅠㅠ


구석에 가서 자진해서 손들고 벌이라도 설까..... (종일 마음고생하고 티도 못 낸 남편에게 미안해서...  신혼여행의 마지막을 망쳐서...) 안절부절.. ㅠ

미국 여행 전 사용했던 구여권(이건 효력이 없다는 구멍 뽕뽕 펀칭이 되어 있다)

미국 가느라 발급받은 전자 여권 거기다 영사관에서 발급받은 긴급 단수 여권까지 이렇게 나는 졸지에 여권을 자그마치 세 개나 소지한 사람이 되었다... 


귀국하면서 전자여권과 임시여권을 두 개다 보여드리니 전자여권을 톡 잡아채서 검사하고는 통과시키길래 

'아 구 여권 사용하겠다고 체크해서 그렇구나' 했다. 





2016/12/08 (목)


(그래서 당연히 임시 단수 여권은 서랍 저 깊숙이 넣어두고) 전자여권을 잘 챙겨서 위풍당당 여행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서울역 체크인 데스크에서는 전자여권이 분실여권으로 잡히고 티켓팅을 위해서는 그 임시 여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웠다. 

더 최악의 상황은 그마저도 그 임시 단수 여권의 유효기간이 간당간당하다는 것... 

아, 정말 출국 자체를 못할 수 있겠구나.... 


21:55 인천-세부 제주항공


체크인 거절당한 당시 시각 

18시...


서울역에서 우리 집까지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주차비 아껴보겠다고 차를 두고 가자 했던 나는 정말이지 똥멍청이다... ㅠㅠ)

상황 판단이 빠른 남편이 이러고 있지 말고, 그 일말의 희망이라도 잡아보자 하며 작전 지시를 내리셨다. 


"내가 달리기라도 빠를 테니 집에 가서 단수여권을 가지고 우리 차로 공항으로 갈게. 

너는 캐리어 두 개를 다 들고 여기서 공항철도를 타고 바로 공항으로 가 있어.

그게 최선인 것 같다."

 

큰 일에 별로 당황하지 않는 편인데도 나는 이미 멘탈이 반쯤 나갔다.


19시 


공항철도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서울시 24시간 민원 센터, 다산 콜센터, 경기도청 민원센터, 인천공항 긴급 여권 발급센터에서 외교부까지 온갖 곳에 줄줄이 전화를 해 내 사연을 읊은 터라 공항 철도에 타계신 모든 사람들이 내 사연을 다 알고 걱정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아..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인천공항 긴급 여권 발급센터에서 유선상으로 이 모든 것을 처리할 수가 없으니 일단 공항에 도착하는 대로 센터로 오라는 말씀을 듣고 이제야 안도의 눈물이 터졌다. (사실 상황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냥 안갯속을 헤치고 가다가 실낱같은 동아줄이 저만치 멀리에서라도 살짝살짝 보이는 느낌이랄까...)


못 간다고 하니까 더 가고 싶은 청개구리가 공항에서 서글피 울던 날


공항에 도착해서 캐리어 두 개를 질질 끌고, 큰 숄더백도 어깨에 맸는지 캐리어에 올렸는지 대충 들쳐 맨 채 달려 달려 긴급여권 발급 센터로 향했다. 


- 아까 전화드렸던 사람인데요.. (울먹)

- 아 네네, 여권 한 번 줘보세요. 

- (여권 내밂)

- ................ 아... 분실여권으로 잡히네요. 그 단수 여권 줘보세요.

- 지금 남편이 들고 오는 중이라 일단 사진이 있는데 그거라도 보여드릴까요? 


여기저기 전화를 하셨다. 아 이렇게 1초가 한 시간 아니 하루 같을까. 통화를 마치고 말씀하시기를 임시 여권도 만료일이 일주일 정도밖에 안 남아서 여행지에서 입국 거절당하면 페널티를 받으니 항공사에서 발권을 안 해줄 수도 있고, 반대로 발권을 해줘도 입국 거절을 당해 필리핀 공항에서 체류하다가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고... 


헝헝... 

우리 부부만의 여행이 아니라 친구들과 부부동반 계모임을 하면서 1년에 한 번 떠나는 여행이라 더욱 패닉


결국 공항 센터에서도 '수가 없다... 최후의 수단으로 외교부에 전화해서 여권 담당자 연결해달라고 해서 예전 전자여권의 분실을 풀어주고, 살려달라 임시여권을 분실 처리로 잡아달라 (즉 두 개의 여권 상태를 서로 바꿔달라)' 부탁을 하라는 것이다. 

그게 되는 일인지 안 되는 일인지 머릿속으로 계산해볼 새도 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시곗바늘은 이미 

20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신혼여행 떠나려다가 소박맞은 여자처럼 공항 벤치에 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또 전화기에 대고 내 사정을 읊고 또 읊어댔다. (전화기가 사람이었다면 나에게 쌍욕을 해줬을지 모른다 ㅠㅠ) 

외교부 당직이라는 분이 내 이야기를 실컷 듣더니... 십여 년 근무하면서 이런 일을 처음 듣는다... 어지간하면 당직자가 처리하겠는데 처리가 안 되겠다... 여권 관리자에게 연락하고 연락 주겠다고 하셨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얼마나 울었을까 남편이 공항에 도착했다. 

내 손 위로 툭 떨어지는 단수여권... 하아... 


모르는 휴대폰 번호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받지 말까 하다가... 혹시나 해서

- 여보세요

- 외교부 여권 담당자입니다. 내용 전달받고 전화드렸습니다. 상세하게 다시 한번만 설명해 주시겠어요?

수화기 저편으로 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퇴근해서 개인 일 보다가 직원 연락받고 개인 휴대폰으로 전화를 주신 것이다. 아아, 자비로운 분 


내 설명을 듣더니 대한민국 국민은 1인 1여권 소지가 원칙이다. 일반 국민에게 마음대로 여권 분실을 풀고 유효하게 하고 이런 일처리는 할 수가 없다. 최신 발급 여권이 우선이고, 새 여권 발급 시 구 여권을 확인하지 못하면 분실신고로 들어가는 것이다.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억울함에 눈물이 왈칵 났다. 악용하겠다고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니고, 분명 구여권을 찾으면 사용하겠다고 체크를 했고, 귀국도 구여권으로 했는데 그럼 행정 처리의 잘못으로 국민이 피해를 보고 출국도 못하게 되는 거냐고 물어보니... 

당신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니 일단 조금 더 알아보고 전화 주시겠다고..

아, 답답함과 기다림의 연속... 

고구마 백 개 물 없이 먹고 체한 느낌... 벤치에 앉아서 또 하염없이 기다린다... 


20시 30분


남편은 포기한 듯하다... 그냥 집에 가서 나흘 푹 쉬자고 하신다...... 하아.... 

다시 전화 와서 본인이 지금 밖이라 확인이 불가한데, 국가별로 체류 기간만 확인되면 (즉 왕복 항공권만 확실히 있으면) 받아주는 나라가 있고 하시면서 외교 영사부 사이트에서 확인 가능한 페이지를 안내해 주셨다. 단수여권이 그래도 다행히 만료되지 않았으니 항공사 가서 티켓팅 해보고, 문제 생기면 내가 말한 그 사이트를 증거로 대라고 하시더라.... 그만 울라는 말과 함께... 

(세상에... ㅠㅠ 최대한 우는 거 안 들키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꺼이꺼이 울컥울컥 했던 바람에;;; ㅠㅠ

아니 이렇게 자상하신 분... 아내분과 백년해로 하세요. 복 받으실 겁니다. 엉엉)


예상외로 항공사에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티켓팅 해주셨다. (어쩌면 눈물 콧물 범벅된 내 얼굴을 보고 사연 있는 여자 같아서? 아니면 말도 섞기 싫어서? 아니면... 아니면... 뭔가 슈퍼 을의 태도가 된 나의 미친 상상력은 공항 데스크에서도 멈출 줄을 모른다... 에라이) 서울역에서 티켓팅 하려다가 못 했던 이력이 남아있어 아까 잡아놓은 좌석대로 티켓을 받았다. 


소중하디 소중한 세부행 비행기 티켓을 손에 넣은 시각

21시


21시 55분 비행기는 무사히 탈 수 있겠구나. 휴우

(알고 보니 30분 전까지는 티켓팅 해주나 보다)


갈 수 있다고 하니까 또 좋다고 (속도 없이) 헤벌쭉


수속하고 탑승동 안에 들어가 파리바게트에서 빵 몇 개 담았더니 3만 원이 훌쩍. 

같이 여행을 떠나려던 친구들에게 나는 못 갈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이야기해뒀던지라 친구들에게 나의 비행기 탑승 소식을 알리고, 남편은 못난 아내 뒤치다꺼리로 바빠 처리하지 못했던 본인 일들을 처리하셨다 ㅠㅠㅠ


만에 하나 막탄 공항에서 입국 거절을 당할 수가 있고... 돌아오는 날에는 단수 여권으로 1번 써서 기능을 다 하게 되어 또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자국민이니 선처해 주실 거라고... 온갖 리스크란 리스크는 다 떠안고 어쨌든 출발은 하게 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긴장이 풀려 빵을 와구와구 처먹고(정말 입에 쑤셔 박는 수준... 퇴근 이후 물 한 모금 못 마셨음 ㅠㅠ) 세부 도착까지 깨지 않고 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순간에도 사진을 남기는 나 & 그리고 그 행동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남편님


막탄에 도착해서 출입국 심사를 받는데 허니문 이후 첫 해외여행이라 남편과 같이 심사를 받는 게 처음인데, 나만 거절당할까 봐 엄청나게 쫄보가 되었다. 심장 소리가 공항 직원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왕복 일정이 확실하고, 남편과 함께라서 통과시켜준다고.... 아이고 세상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밖에서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준 친구들을 보는 순간 이산가족 상봉한 듯이 기쁨과 안도감에 눈물이 왈칵. 이놈의 눈은 하루 종일 물을 흘리고 있네. 힘들게 시작한 여행인 만큼 빡쎄게 즐기고 돌아왔다. 


갖게 될 네번째 여권... 아하하하하하하;;;;;


얼마 전 생각난 김에 새 여권을 다시 신청하면서 도대체 내 팔자(?)에 여권은 몇 개나 있는 걸까 생각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여권아, 제발 거기 있어줄래요? 

(내가 잘 할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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