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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 Oct 15. 2024

사랑한다는 일

공원에는 그와 그녀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밤공기는 적당히 서늘했고,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품 안에 폭 파묻혀 있던 그녀가 살짝 볼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있잖아, 사랑한다는 말 말고 나한테 해줄 말이 또 있어?

-섹시하다는 말?


그녀는 그의 품에서 머리를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째릿한 시선을 받게 된 그는 두 손을 치켜들었다.


-농담, 농담.

-나 진지하거든?

-알아.


두 사람은 수많은 촛불로 이루어진 하트 안에 서 있었다. 어두운 밤공기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촛불들의 일렁임 속에서, 남자는 그녀에게 프로포즈할 예정이었다. 은은하게 들리는 풀벌레 소리를 즐기며 그녀는 그의 마지막 말을 기다렸다. 어서, 어서 결혼하자고 말해!

그녀의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 될 그 짜릿함은, 그의 다음 말에 의해 조금 사그라들었다.


- 난, 네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하고 싶어.


그녀는 표정을 조금 찡그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하필 이런 때에 죽는다는 말을 할 건 뭐람? 그녀의 기색을 읽어내지 못한 채, 그는 꿈꾸듯 계속해서 말했다.


- 사람은 늘 혼자지만, 난 너와 함께 있을 때엔 그 사실을 잊을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 널 잃는다면 난 그날로 죽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죽는 그날까지 함께 하고 싶어.


그는 최대한 로맨틱해 보이려고 준비했던 말을 마쳤다. 그것이 그녀에겐 상당히 역효과였지만,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그와 알고 지낸 게 한두 해도 아니었고, 가끔 뜬금없는 소리로 분위기를 깬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 남자였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끌어안았다.


- 네, 네, 알았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알겠어.

- 그……그럼…….

- 이런 못난 남자친구지만, 그래도 함께 살고 함께 죽자는 약속을 할 정도 수준은 된다고 생각하니까.

- 만세!


남자는 그녀를 있는 힘껏 끌어안은 후 격렬하게 키스했다.

하나로 겹쳐진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어둠에 녹아들어갔다.

그런 그들의 귀에 문득 바스락거리는 발소리들이 들렸다.


*


남자는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퀴퀴한 백열등이 단말마의 빛을 내뿜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어둠을 내쫓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비볐지만, 그런다고 눈에 비치는 광경이 채색되는 건 아니었다.


- 여기는 어딜까.


흰 벽, 흰 침대, 흰 환자복을 입은 자신. 여기에서 자신이 환자라는 걸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자신이 왜 어딘지도 모르는 병원의 1인실에 이 꼴로 누워있다 이제 깨어났냐는 논리적 추론인데, 이게 도무지 연결되지 않았다.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그에게 어마어마한 두통이 엄습해 왔기에,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만 해도 상당한 수고가 요구되었다.

생각은 조금 나중에 하기로 하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몸을 쓰지 않았는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휘청거리다 바닥에 푹 고꾸라졌다. 그나마 힘이 약간 남은 팔로 침대 기둥을 붙잡고 일어선 그에게, 저 끝에 있는 방문은 참 멀게만 느껴졌다.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가며 그는 자신의 몸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거울이 없으니 얼굴과 머리는 알 수 없었고, 그 아래로는 대체로 멀쩡해 보였다. 상처가 없다면 내상을 입은 걸까? 하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바로 옆에 호출 버튼이 있어 그는 몇 번이고 그것을 눌러보았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그때 밖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목청껏 이봐요! 라고 외치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으면 성대까지 마비되는 걸까? 목이 잠겼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목구멍이 꽉 틀어막힌 느낌이었다. 그 비좁은 공간을 간신히 통과한 소리는 그르륵…… 하는 신음뿐이었다.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그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문가로 향했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환자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걸까 싶어 그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저 인기척이 사라지기 전에 그를 불러야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그는 간신히 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해 돌리자 삐그덕 하는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리고,


피바다가 된 복도를 지나가는 좀비가 보였다.


그는 쾅 소리가 날 만큼 문을 세게 닫았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는지, 그는 원래 자리로 후다닥 뛰어가 손에 잡히는 대로 몽땅 끄집어내 문가로 던졌다. 나름대로 바리케이트라고 쌓아놓은 물건이 부실해 보이자, 그는 화분을 냅다 던져 깨뜨려 버렸다. 아무리 좀비라도 저걸 밟으며 오려면 고생 좀 하겠지 하는 그의 소박한 소망이었다. 그동안 좀비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는 끝장났겠지만, 바깥의 좀비는 배가 부르기라도 한 건지 이곳을 침입하지 않았다. 문앞에 쌓인 서랍과 책 몇 권, 탁자, 화분 조각 따위를 보며 심리적 안정을 되찾은 그는 비로소 자신이 봤던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첫 번째 질문. 일단 자신이 본 게 좀비가 확실했나?


불행하게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좀비 영화 매니아였던 그의 눈에 비친 건 눈물나게도 정석적인 좀비의 모습이었다. 안구가 비어져나오고 팔 한 쪽이 반쯤 끊어져 덜렁거리는 채 돌아다니는 작자가 좀비가 아니라면 세상 누가 좀비란 말인가?


두 번째 질문. 그럼 그 좀비가 왜 여기 있는데?


머릿속에 처음부터 떠올랐던 생각을 지우기 위해 한참을 고민했던 그는 결국 항복하고 그 추측을 긍정했다.


답 : 세상이 지금 좀비판이라서.


그가 이런 답을 내놓은 데는 그동안 수없이 섭렵했던 좀비영화들의 스토리가 이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얼마 전 나온 좀비 드라마의 도입부분은 지금과 완전히 똑같았다. 병원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와 보니 세상이 좀비 천지, 란 내용을 떠올리고 나니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저 좀비가 최초의 좀비이고 저것만 때려잡으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긴 개뿔, 그럼 복도의 저 핏자국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좀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기에, 도리어 그 지식에 발목을 잡혀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최악의 상황이란 걸로 일단 가정하고 나니, 그가 최우선으로 할 일이 생겼다. 바로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마트라면 모를까, 여기에는 무기도 먹을 것도 없었다. 게다가 바깥에서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올 경우 창문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대략 10층 가량의 높이였는데, 여기서 뛰어내리는 것과 좀비와 다투는 것 중 뭘 고르겠냐고 한다면 차라리 후자 쪽이 안전하다 싶을 정도였다.

아직 몸은 잘 움직이지 않지만 그나마 공복이 없었기에, 그는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무기를 만들어야 했는데, 날붙이는커녕 뾰족해 보이는 물건마저 없었다. 게다가 휑한 병실에는 애당초 물건 자체가 별로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전화번호부를 집어들어야 했다. 언젠가 선배에게 ‘전화번호부 모서리가 닳아버릴 때까지 처맞고 싶냐’란 소리를 들었던 게 떠올라서였다. 맨손으로 좀비를 때리느니 전화번호부 모서리 쪽이 좀더 실용적일 것이다.

전화번호부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것을 몇 번 휘두르던 그는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좀비가 되는 조건을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보통 좀비는 물어뜯는 것으로 희생자를 감염시키곤 하지만, 가끔 공기 중에 균이 퍼져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사례 -물론 현실이 아니라 영화 얘기지만-도 본 적 있었다.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고전적 좀비상이 지금 상황에선 그나마 나은 편이다. 좀비에게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무리 없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헐렁한 환자복 안에 과자 상자나 커튼 등을 둘둘 말아 갑옷 대용으로 만들고, 손에는 극강의 내구력을 자랑하는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든 채, 그는 다시 문가로 향했다. 아까보다 그의 몸 상태는 많이 좋아져 있었다. 다리는 여전히 천 근 만 근 무거웠지만 몸을 움직일 정도는 되었고, 팔 또한 전화번호부를 풀스윙으로 휘두를 정도의 근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이 정도라면 아까의 좀비 한 마리 정도는 손쉽게 처치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는 문을 다시 열었다. 예상과는 달리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순한 사람이라면 쾌재를 부르며 비상구로 도망갔겠지만, 그는 오히려 좀비를 찾아나섰다. 물론 표적은 아까의 좀비였다. 좀비의 신체능력이나 사냥감을 탐색하는 법 등을 사전에 알아두어야 했기에, 그나마 만만한 녀석을 고른 것이다.

점점이 뿌려진 육편을 냉정하게 관찰하며 복도 끝으로 걸어가 방향을 꺾으니 문제의 그 좀비가 보였다. 좀비가 여러 마리였다면 그는 당장 도망쳤을 테지만, 다행히 저 자리에는 그 녀석 하나만 있었다. 녀석이 도움을 요청할 다른 좀비들도 근처에는 없는 것 같으니, 이 기회에 좀비에 대한 것들을 빨리 알아내야 했다. 때마침 녀석은 등을 보인 채 뭔가를 뜯어먹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는 찬스였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노란색 전화번호부책이 좀비의 대가리를 향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베어 그릴스라도 울고 갈 정도의 장렬한 사투 끝에 전화번호부로 기어이 좀비를 때려잡는 데 성공한 그가 알아낸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좀비는 느리고, 급소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소리에 반응하지만 시각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부러 소음을 내며 접근했고, 그 결과 좀비는 그를 보긴 했지만 곧 흥미를 잃고 다시 자신의 먹이(누군가의 손목 일부였다)에 열중했다. 그리고 좀비가 먹잇감을 보고 취하는 반응에 대해서는 그도 명확한 판정을 내릴 수 없었다. 좀비가 자신을 계속 무시한 것이 단순히 배가 부르기 때문인지, 그냥 변덕인지, 아니면 바보라서 좀비와 사람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것인지 등등, 생각할 만한 이유는 많은데 어느 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끙끙거리는 대신, 그는 좀비에게 다가가더니 굳기 시작한 좀비의 검은 피를 손에 발랐다. 그리고 그것을 망설임없이 자신의 얼굴과 드러난 피부 등에 발랐다. 이렇게 좀비인 척 위장한다면 좀비의 감각 중 시각과 후각 정도는 봉할 수 있을 것이다. 피에는 감염의 위험도 있을 테지만, 먹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을 거란 근거없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 날붙이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좀비를 해부해 이것저것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닐 텐데 하는 아쉬움이 그를 스쳐갔다. 미드 덕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물 건너의 제작자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적절하게 위장을 마친 그는 좀비처럼 발을 질질 끌며 비상구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1층에서 내리자마자 좀비 떼와 마주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좀비 두어 마리를 보긴 했지만, 그의 예상대로 좀비는 그에게 별 반응을 하지 않고 묵묵히 시체 조각을 우물거릴 뿐이었다. 이 간단한 방법을 몰라서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갔단 말인가, 하고 한탄하고 나니, 그는 자신이 이런 특별한 사태에서 살아남은 선택받은 인재란 생각이 들어 으쓱해졌다. 

비상구를 내려가자 바로 병원 뒤의 쪽문이 나왔다. 굳이 널찍한 로비에 널려있을 좀비들을 볼 마음이 들지 않아서 그는 그 길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따스한 태양이 그를 반겨주었다. 우중충한 병원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신이 살아있다는 충족감이 비로소 전신을 엄습해왔다. 그 고양감은 병원 근처에 널린 참상을 보고도 오히려 더욱 끓어올랐다. 평화로워야 할 공원이 피로 얼룩져 있고, 내장을 훤히 드러낸 시체들과 이를 뜯어먹고 있는 좀비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그는 마치 자신이 목장에라도 온 듯한 목가적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자신은 그 목장의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좀비들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에, 그는 당당하게 좀비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목적지 없이 십 분 가량 광장을 돌아본 후 그는 비로소 목적지를 정했다. 어느새 기억이 스물스물 돌아와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이름과 그녀의 이름, 자신과 그녀와의 관계 등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단 아직 자신이 어째서 병원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만나야 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그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사라진다면 그에게 이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는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사실은 그녀가 구직 중이었기 때문에 면접을 보러 갈 때 말고는 집에서 소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집 안에만 있다면 그녀는 무사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여전히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기에, 이제는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다리를 질질 끌며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와본 적이 없는 거리였지만 표지판들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그는 대충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곳곳이 불에 타거나 유리창이 깨져 폐허가 된 거리를 걷다 보니 문득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의 진원지는 근처에 있던 편의점에서 막 뛰쳐나온 남자였다. 아마 편의점에 숨어있다 발각되어 도망쳐나온 듯했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뛰었지만, 이미 거리의 좀비들 전원이 그를 인지했기에 도망칠 곳은 없었다. 한 남자가 좀비 하나에게 붙잡혀 쓰러지고, 수많은 좀비들이 스물스물 다가오는 모습은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남자의 끊임없는 비명마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기에 그는 관객이 된 듯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자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그에겐 전혀 들지 않았다.

처절한 비명이 곧 그치고, 남자의 시체는 그의 눈앞에서 조각조각 분해되었다. 사람으로서 이래도 되는가 싶은 일이지만, 좀비들이 사람을 산 채로 뜯어먹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도 허기가 찾아왔다. 그는 멍하니 좀비들의 식사를 바라보다, 그녀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다면 자신과 그녀의 먹을 것을 장만해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편의점을 흘끗 바라보았지만, 곧 그는 그 생각을 포기했다. 일단 그녀가 무사한 것부터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게다가 아직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괜히 바리바리 챙겨들어 이동속도를 늦출 수도 없었다. 대신 그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여기까지 함께 한 전화번호부를 버리고 굴러다니던 각목을 하나 챙겨들었다.

한번 찾아온 허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공복감을 달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와의 소중한 추억들, 가슴 떨리던 첫 키스, 아름다운 첫경험 등등, 그의 추억 속에서 끊임없이 미화된 그녀의 모습은 그의 다리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동시에 더욱 지독한 허기 또한 선사했다. 어서 그녀의 안부를 확인한 후 둘만의 피난처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문득 휴대폰 생각이 났다. 전화를 쓸 수 있다면 바로 그녀와 통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곧 그는 풀이 죽었다. 지금의 목 상태로는 통화는 커녕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정상이었더라면 20분쯤 걸릴 만한 거리를 한 시간 넘게 걸은 후에야 그는 그녀의 오피스텔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말이 오피스텔이지, 실제론 반지하의 초라한 방이었다. 창문에 쇠창살 하나 없었기에 그곳에 그녀가 숨어 있다면 정말 쥐죽은 듯 살아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기척을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가느다란 비명 소리가 그의 귀에 포착되었으므로.

제기랄, 하는 신음을 속으로 흘리며 그는 급히 목적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팔 한 쪽이 떨어져 나가고 배가 갈라져 상당히 상태가 좋지 않은 좀비 한 마리가 깨진 창문 너머의 커튼 사이로 팔을 쑤셔넣고 있는 참이었다. 아마 그녀가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바깥 상황을 살펴보려다, 운나쁘게 그곳을 지나가던 좀비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를 인지하지 못한 채 창을 통해 방으로 들어가려 하는 좀비의 모습은 그의 신경을 확 할퀴었다. 이 개새끼가, 하고 속으로 되뇌며 그는 손에 쥔 각목을 휘둘렀다. 퍽! 짜릿한 손맛이 느껴지는 일격이었다.

난데없이 뒤통수를 가격당한 좀비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좀비 꼬라지인 그를 인식하지 못했는지, 좀비는 다시 방에 집중하려 했다. 그 모습에 그는 피식 웃으며 다시 각목을 휘둘렀다. 퍼걱! 하며 두개골이 함몰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좀비는 그 자리에 무너졌다. 그가 좀전에 실험했을 때 좀비의 급소는 딱히 없었는데, 이번엔 이미 육체의 내구도가 한계에 달했는지 이 일격만으로 쓰러진 모양이었다.

좀비의 시체를 뒤로 밀어낸 후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이미 깨진 창문이었기에 그 안으로 손을 넣어 잠금장치를 해제하면 끝이었다. 그사이 방 안에서는 신경질적으로 달그락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이라면 그녀가 무기나 기타 흉기에 준하는 것들을 찾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기에, 그는 직접 얼굴을 보여야 했다.

그가 서둘러서 창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 것과 거의 동시에 날카로운 것이 날아왔다. 다행히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기에 그는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 불이 켜져 있었기에 그는 사시나무떨듯 떨면서 부엌칼을 쥐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로서는 진지하기 그지없는 태도였지만, 저렇게 떨고 있으니 두부라도 썰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항상 쿨한 모습을 유지했던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모처럼 심리적인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튼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는 입을 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 대신 신음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그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몇 년을 본 사이인데, 얼굴에 피 좀 칠했다고 이렇게 못 알아볼 수가 있는 걸까? 그는 각목을 내려놓은 후 아직도 자신을 보며 떨고 있는 그녀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영화에서라면 그녀가 칼을 내려놓고 자신을 향해 뛰어와 안겨야 할 타이밍인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눈을 부릅뜨며 그를 향해 표독하게 외쳤다.


“왜, 왜 네가 여기 온 거야! 어째서!”


그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어째서라니, 설마 우리가 그새 헤어진 사이였던가? 그는 기억을 되돌려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했던 기억만 떠오를 뿐이었다. 혼란에 빠져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를 보며, 그녀는 발악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넌, 넌 왜 죽었는데 내 앞에 있는 거냐고!”


그 말과 동시에,

남자의 결손된 기억이 폭발하듯 분출했다.


사랑의 고백을 끝낸 두 사람에게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일당이 다가왔다.

불량 청소년 패거리로 보이는 일당은 눈꼴시렵다며 그를 습격했다.

그가 그녀를 도망치게 하고 반격해 그 중 둘을 쓰러뜨리자, 남은 셋이 각목을 가져와 그를 무차별로 가격했다.

의식을 잃어가는 그의 귓가에 히히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새끼 하나나 둘쯤 죽여도 빨간 줄 안 그어지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그는 자신이 그녀를 도망보낸 것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넌 그때 머리를 맞아 뇌사상태에 빠졌어! 그래서 병원에 있다가, 이번에 좀비 사태가 벌어져서 내 손으로 링거를 뽑았어! 네가, 네가 산 채로 좀비들에게 뜯어먹히는 걸 원하지 않았다구! 그런데, 그런데……왜 넌 좀비가 돼서 내 앞에 나타난 거냐고!“


그녀의 말이 허공을 날아오다 산산히 부서져 그에게 비산했다. 폭포 아래에서 무수한 물방울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처럼, 그의 전신이 차갑게 경직되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뒤통수 부근에서 도저히 감출 수 없을 만큼 큼직한 함몰 자국이 느껴졌다. 자신이 지금 막 죽인 좀비와 같은 방법으로 당했던 거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지금까지 좀비에게 습격받지 않았던 진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녀석들은 동류를 먹지 않는다.


이제 자신을 더 이상 인간으로 보지 않는 그녀의 매서운 눈빛을 바라보며 그는 뭔가 말하려 했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사랑해?

믿어줘?

너와 함께 하고 싶어?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참으로 좀비답게 그르렁대는 소리가 나올 뿐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이성을 끊는 마지막 신호였다.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는 점점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안길 거라고 생각하곤 두 팔을 다시 벌렸다. 가슴에 둔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의 몸이 그녀의 체중까지 합쳐져 뒤로 넘어가는 순간, 그는 그녀와의 첫 포옹을 떠올렸다.


"넌 죽었어! 그러니까 이제 죽으라구! 그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 새끼야!”


울음 섞인 그녀의 비명이 그의 귀에 들려 온다. 아아, 어째서 그녀는 이렇게 슬퍼하는 걸까. 자신은 여전히 자신이고, 지금도 그녀의 눈앞에 존재하는데.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으니 어서 그녀를 달래 줘야 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달랜다?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그를 사로잡고 있던 것은 허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갈망, 지고한 사랑이었다. 둘이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방법은 결혼과 섹스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막 떠올린 생각에 대해 그는 만점을 주고 싶을 정도였다. 함께 살고, 함께 죽고, 그럼으로써 하나가 되는 완전한 사랑. 그리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거면 충분했다. 그는 너무도 행복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지금의 세상에 비로소 합류했다는 안도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품 안에 있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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