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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돌 Dec 31. 2020

노숙하는 스무 살 방랑자 이야기

#혼자여행  #울산  #태화강역

난 길을 떠났지 아주 멀리 떠나고 싶었어
마치 어느 영화 속에 나오는 슬픈 사람처럼
김장훈 - 노래만 불렀지


 스무 살 때 처음으로 혼자 여행길에 나섰다. 노래만 불렀지 가사를 볼 때마다 첫 여행을 떠났던 스무 살 7월 어느 날이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어떤 표정으로 강릉행 고속버스를 탔을까. 확실한 건 행복했던 표정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전날 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름방학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놈의 불면증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방학 내내 무기력하게 지낼 뿐이었다. 잠 못 지내는 밤에는 자기 위해 오만 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예를 들면 양 세보기, 잔잔한 음악 듣기, 운동장 10바퀴 냅다 질주하기 등등. 낮에는 밤에 잠을 못 자 극한의 피곤에 찌든 채로 집에서 눈물 흘리는 일이 잦았다. 방학을 했지만 고향에서 나를 찾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도무지 더 이상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뜨기 직전, 충동적으로 강릉행 버스를 예매했다. 그 날 이후, 나는 혼자 여행하는 방랑자가 되었다.




 나는 여행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관광과 방랑. 전자는 돈이 많아야 한다. 후자는 돈이 없어야 가능하다. 스무 살 방랑자가 무슨 돈이 있겠는가. 강릉에서 잠은 찜질방에서 잤고 밥은 거의 굶었다.  저녁은 찜질방에서 맥반석 계란과 식혜, 아침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때웠다. 며칠 뒤 강릉에서 무엇을 먹었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당당히 맥반석 계란이라 답했다. 대부분 나에게 미쳤냐, 그럴 거면 뭐하러 강릉까지 갔냐고 말했다. 소수의 사람들은 내가 대단하다고 했다. (내 동생은 대단히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날 강릉 경포대에서의 느낌을 한번 더 느끼고 싶었다. 경포 해수욕장 입구에는 소나무 숲이 있다. 솔잎 가득한 숲을 통과할 때 파도소리가 들렸고, 파도소리를 들었을 때 심장이 크게 울렸다. 설렌 마음을 갖고 해변에 마주쳤던 순간 모든 피로가 싹 사라졌다. 전날 밤을 전혀 못 잤음에도.

경포 해수욕장. 7월 초 평일이라 한산했다.



ㆍ첫 번째 노숙

추석이 되었다. 가을에도 불면증은 전혀 낫질 않았다. 돈은 역시나 없었다. 연휴 마지막 날 동네 친구와 치킨집에서 술을 마시다 여행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또)충동적으로 부산에 가는 기차를 예매했다. 학교로 가는 기차 대신에. 기숙사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결국 혼자서 하루 종일 부산을 돌아다니다 울산에 갔다. 울산 태화강역에서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울산 여행지를 여쭤보았다. 기사님께서 대왕암공원이 바다 구경하기 좋다고 말씀하시고 나를 대왕암공원 주자창에 내려 주셨다. 대왕암에 올랐던 그 순간 경포대에서 느꼈던 상쾌함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바다를 좋아하고, 바닷냄새 맡는 것을 좋아하고, 파도소리 듣는 것에 설렜다. 이 사실을 깨닫고는 혼자서 너무 기뻤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나의 스무 살은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바다를 걷고 있는 순간에는 아무 고민이 없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걷기만 해도 잡념이 사라지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괴로울 때마다 술병과 소주잔을 찾았는데, 앞으로는 술 없이도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바다에만 가면.

대왕암공원 바로 옆에 있는 일산해수욕장의 파도소리. 일산해수욕장 주변에는 특이하게 횟집 대신 고래고기집이 많이 있었다.


 대왕암공원을 나온 뒤 울산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버스를 탔는데, 반대 방향 버스를 타 엉뚱한 장소에 내리게 되었다. 꽃바위라는 정류장에서 내려서 다시 역전으로 가기 위해 걷고, 버스를 타고, 걷고...  한참 지나고 나니 태화강 산책로에서 달을 보며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밤이 되어서 잘 곳을 찾아야 하는데 근처에 찜질방이 보이지 않았다. PC방에서라도 자야겠다 하고 열심히 찾아보다가 주변에 PC방이 없는 거 같아 태화강역에 다시 돌아기기로 결심했다. 역 주변엔 PC방이 있겠지. 어느덧 새벽 한 시, 드디어 태화강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뿔싸! 태화강역 주변에는 모텔밖에 없었다. 주머니에는 학교로 돌아갈 차비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난생처음 노숙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기차역 대문이 잠겨 있었다. 자정부터 새벽 두 시까지는 역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한 시간을 역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가을이라 일교차가 커서 역 광장에서 덜덜 떨다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하는데 참 기분이 묘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패닉이 올 만한 상황이겠지만 나는 이상하게 이 상황이 재밌었다. 오전 두 시가 되고 역 안에 들어섰다. 바닥에 누워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다행히도 대합실에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엎드려서 가방을 베개 삼아 잤다... 라기 보단 눈만 감고 있었다.

첫 번째 노숙, 태화강역 대합실


 대합실의 새벽은 춥고 시끄러웠다. 테이블에서 엎드린 채 가방을 손으로 꽉 잡으면서 엎드려 있었다. 혹시라도 누가 가방을 가져갈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수십 번 반복했다. 긴 밤이 지나고 드디어 해가 떴다. 오전 6시 40분, 학교에 가는 기차가 태화강역에 도착했다. 밤새 잠을 설쳐서 엄청 피곤했는데도 기차 안에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여행까지 와서 숙박비를 아끼겠다고 노숙하는 건 아무나 하지 못하겠지, 이런 생각이 들어서 혼자서 키득키득 웃었다. 대학생이라면 공감하겠지만 학교 수업을 빼먹고 놀러 간다는 건 참 재밌고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수업을 째면서 여행을 다녔던 건 내 주변에서 나 하나뿐이었다. '수업 째고 혼자 여행 간 이 재밌는 경험을 사람들한테 자랑해야지' 그런 철없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에 돌아왔다. 아침에 기차를 탔는데 기숙사에 돌아오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한 듯이 잠을 잤다.



여행을 마치고

 울산에서 별난 여행을 마친 뒤 20대 중반이 된 최근까지 나는 계속 혼자 여행을 다녔다. 내일로 전국일주를 3번 했으며, 6대 광역시를 포함한 전국 대도시들과 전국 각지의 오지들을 돌아다니며 특이한 경험들을 참 많이 겪었다.(해외여행은 성인이 되고 나서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나홀로 방랑을 하면서 느꼈던 혼자 하는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은 동행자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잘 알 수 있지만, 혼자 하는 여행은 나의 취향, 나의 성향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나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진로 선택과 같은 중대한 결정을 할 때 항상 혼자서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멀리 떠날 여건이 안 될 때에는 지하철을 타고 수도권의 여러 도시를 당일치기로 방문하곤 했다. 그렇게 무작정 낯선 길을 걸으며 나의 진로를 고민하다 보니,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혼자 여행을 통해 나의 우울증을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혼자서 바쁘게 바다나 강변을 걸어 다니며 바쁘게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걷고 있는 그 순간에는 조금이나마 부정적인 생각도 덜 수 있었고 삶에 대한 의욕이 다시 생겨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심한 불면증을 겪고 있고, 불면증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많은 고생을 했었다. 현재는 병원에서 약물 치료 덕분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지만,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전에는 혼자 여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 병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결심한 날은 9월 초였다. 지금 이 글을 완성한 시점은 2020년 12월이다. 글을 발행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코로나 19 때문이다. 전염병 때문에 여행하기 힘든 시기에 여행에 관련된 글을 쓰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나 역시 올해 여행을 거의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고민이 더욱더 많았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아직 부족하지만 나의 여행(방랑) 이야기를 글로 남겨 사람들에게 전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나의 여행을 정리하면서 내가 여행을 통해 나 자신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또, 돈이 없어 여행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돈과 동행자 없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또한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람들과 대면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언택트 여행에 대해서도 글을 통해서 내 나름대로의 해법을 소개하려 한다. 언택트 여행 방안으로 사람 많은 유명 관광지 대신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갈 수 있는 영화·드라마 촬영지에 관련된 글도 연재할 계획이다.


 고급 리조트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해외 유명 관광지를 찾는 것만이 여행인 것은 아니다.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의 첫 단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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