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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희 Feb 09. 2018

우리가 서로에게 친절할 수 있다면


2018년 1월 1일 첫날의 세계 인구수는 75억 9186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우리나라의 인구수는 50,982,212명으로 지난해의 5,070만 명보다 30만 명이 늘어났다.


76억에 달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단순하게 분류할 수 있을까?

그리고 표준화된 통계 수치와 단순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나누었을 때 그건 믿을 수 있는 걸까?

모두가 의심하고 있지 않은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고 의심을 하는 것을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성향이라고 분류한다면 나는 반대로 묻고 싶었다. 세상에 순응하는 사람들만 존재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행복했을까라고 말이다. 자꾸 질문들이 생기는 '나'는 부정적이지 않은지 나 자신부터 의심해 보았다.


나의 결론은 내가 비판적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진 것뿐이다. 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냐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분류한 그 기준이 정확한지, 또 나를 끼워 넣어 맞춘 그 검사가 제대로 된 검사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 만들어진 검사지인지 궁금해졌고 적어도 몇십 년 전에 만들어진 표준화된 검사지의 결과에 나를 끼워 맞추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겼다.

또 나를 만나기 전에 검사 결과를 보고 이미 선입견을 가지지 않았는지, 나를 만나는 동안 시간에 쫓겨 시계를 보지 않고, 다음 예약을 걱정하며 흘려듣지 않았는지, 또 나의 질문들에 적절한 대응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


우리나라는 아직 "상담"이라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 상담이라는 말보다 공황장애가, 트라우마라는 말들에 더 빨리 익숙해져 버렸다. 사람들에게 상담을 받는다는 것은 마음의 병이 있다, 우울증이다, 문제가 있다고 먼저 인식이 되고 있다. 당신이 만약 상담을 받는다면 당신은 그 사실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가? 아닐 것이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상담사나 의사(신경과 or 정신과), 치료사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정보는 다른 어떤 것에 비해도 몹시 제한적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우리가 믿어도 될 것 같은' TV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을 찾아가 만날 수는 없다. 

그들은 너무 바쁘고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TV에 많이 나오는 C연구소는 직접 C에게 받는 상담이 아니라 연구원 즉, 제자에게 받는 것이지만 그 비용이 일반 상담소의 3배에 이른다. 폐쇄적인 상담 문화는 보통 사람인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 즉  TV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믿을만한 정보를 찾기 힘들다. 그들은 유명하지  않기에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우리가 물건을 구매할 때처럼 쇼핑몰의 구매 후기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터넷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몹시 제한적이다. 게다가 상담사나 의사의 홍보용 사이트나 블로그의 말들은 볼 수 있지만 상담을 받는 사람들, 그들의 표현대로 '내담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보기 힘들다. 물론 나는 객관적인 평가를 할 만큼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지는 않았다. 오직 내 주관적인 경험에 의지해 볼 때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들과 의사들, 치료자들은 모두 다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분류의 성격도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사람은 똑같은 상황도 다 다르게 표현하는 존재이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한다. 혼란의 가운데에서 우리는 모든 말들을 맹목적으로 믿지 말아야 하며, 상담사, 그리고 의사들이나 치료자들이 하는 말들을 적어도 한 번쯤은 의심해보아야 한다.

상담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며, 상담사나 의사들은 비밀 보장의 의무가 있고, 내담자들은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 그들이 오류를 범해도, 실수를 해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알려질 기회조차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평가를 다 믿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우리가 만나는 상담사와 의사, 치료자의 말을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지 최소한 한 번이라도 의심해봐야 한다

설사 부정적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말이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말이다.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프로이트도 융도, 아들러도, 브릭스와 마이어스도 그들도 또한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상처가 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모두가 있다는 말이 이 경우엔 맞다.

상담사도 의사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이들조차도 인간이며, 상처가 하나도 없고 시련을 다 이겨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이 항상 적절한 조언을 하고, 그들이 개인적인 경험과 상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적절한 대응을 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극복한 성자이다.

또한 신만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내담자의 입장에서 상담사와 의사들의 말을 평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점점 많아지는 상담센터와 병원들 사이에서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상담사나 의사를 찾을 때 우린 이미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가 믿는 상담사나 의사의 말을 전적으로,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믿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들을 완전히 믿고 의지하게 되기 전에 그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누구일지 생각해 보았을까?

그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모든 상처를 다 극복해냈고

모든 위기 상황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다고 우린 장담할 수 있을까?

의사들이 스스로를 진단하고 충분히 성찰할 만큼의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해봐야 한다.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저 "그들도 우리처럼 인간"이라는 말이다.

 "잘 들어주는 훈련"을 하고 공부를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났을 뿐이고, 그들도 자신의 삶 속에서 우리와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상처를 받기도 하며, 때로는 이성을 잃기도 하며 상처를 주기도 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담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상담사들이나 치료사들은 매 시간 쉴 사이도 없이 상담을 하고 있으며, 의사들 또한 진료 시간의 간격이 없이 계속해서 진료를 보고 있다. 이런 환경이 상담의 질을, 진료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현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 또한 우리처럼 시간에 쫓기고 일정에 쫓기다 보면 예전에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물론 모든 상담센터와 모든 의사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상처가 되었던 말을 정작 상담사는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여유로운 대화가 절대적인 상담과 진료는 우리 문화처럼 인스턴트화 돼가고 있지 않은지, SNS와 방송의 위력의 덮개에 가려 유명세라는 옷을 입으려고만 하지 않는지 자신들을 점검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상담'이라는 문화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탓일 수도 있고 제도적인 보완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다.

적어도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주는 그 상황에서 상담사나 의사가, 치료자가 던지는" 한마디"가 그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일 수 있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이미 알고 있어도 더 신중해야 하며 스스로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실어서 조언하고 있지 않은지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혹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센터를 운영하기 위해, 병원을 키우기 위해 현실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한 인간으로서 믿고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를 만날지 좀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고, 부당한 것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린 스스로를 지켜야 하니까 말이다.

스스로를 지키는 일은 이기적인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니다.


영화 "Wonder"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우리는 "옳음"과 "친절함"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모든 의사들과 상담사들이, 치료자라는 이름의 삶을 산다면

적어도 한 번은 진지하게 스스로의 옳음을 선택할지, 친절함을 선택할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는 이라는 고단하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운명적이라는 삶의 무게가 모두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같이 견뎌내려면 서로에게 좀 더 친절한 선택을 하자.


우리가 서로에게 친절할 수 있다면

우린 좀 덜 아프고 덜 외로울 수 있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위의 사진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토마스 사라세노의 <행성 그 사이의 우리>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전시는 2018년 3월 25일까지입니다.

https://www.acc.go.kr/board/schedule/exhibition/1542



*토마스 사라세노(Tomás Saraceno, b.1973, 아르헨티나)는 예술과 건축, 생물학, 천문학, 물리학, 항공우주학, 재료학 등 자연과학과 공학의 통찰과 지식을 아우르는 지속적인 연구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건축가이자 예술가이다. 그는 환경과 기후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다양한 종(種), 인간과 환경이 공생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미래의 서식지(habitats)와 도시에 대한 모델과 비전을 제시해 왔다. 또한 그는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태양열만으로 부유하는 기구를 제작하여 비행하는 커뮤니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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