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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과, 수지(Susie)의 편지로부터 시작되는 내면 치유

by Rana


작년 여름이었다. 인연을 끊고 살았던 동생에게서 문자가 왔다. '누나, 아버지가 위독하셔. 00병원 000호실이야.' 갑자기 정적이 찾아오면서 심장은 두근거렸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같은 해 2월, 아버지가 입원했다는 말을 사촌으로부터 들었을 때에는 아버지를 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직장을 쉴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하던 차에 입원소식을 듣고 진단서를 발급받아 가족 돌봄 휴직을 내는 기회로 활용했다.


그 후 6개월 만에 다시 위독하다는 문자가 왔다.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찾아가서 아버지를 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주한다는 것에 대한 지독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동안 쌓인 미움과 원망이 너무도 깊었기에 다시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둘째 딸이 용기를 내어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어 주었고 같이 병원을 찾았다.


6인 병실 입구에 환자 배치도에 아버지 이름이 보였다. 입구 쪽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살짝 들여다본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머리는 다 빠지고 볼에는 깊은 골이 페인 뼈만 남은 노인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180이 넘는 장신에 건장한 골격을 가진 분으로 궂게 다문 입술이 그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수영아, 아버지가 안 보여"

그러자 수영이가 병실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할아버지 맞네, 저기 계시는데" 한다.

그 소리에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본 침대에 알츠하이머로 온몸이 뒤틀린 채 허공을 쳐다보며 누워있는 이름 모를 노인의 얼굴에서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하는 탄식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병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있는 대기석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수영이는 소리 없이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앉아 있다가 도저히 아버지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힘들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한꺼번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오늘 못한 것은 다음에 하자'라고 결정을 하고는 수영이한테 말했다.

"수영아, 엄마는 오늘 도저히 할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이번에는 이 정도까지만 하고 며칠 있다 다시 와서 그때 할아버지 뵐까?"라고 말하니

"아냐, 나는 할아버지 보고 갈래" 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는 수영이가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 병실 안을 내가 밖에 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살며시 들여다보니 아버지가 뼈만 남은 커다란 손으로 수영이의 두 손을 꼭 잡고는 치아를 다 잃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한 단어는 알아들을 수 있어다. 경란이, 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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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내 어릴 적에 짧은 사랑을 주고는 그 후 너무 큰, 그리고 긴 고통을 주었다. 내가 고작 열아홉 살이었을 때 시작된 고통은 마흔 중반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고 그 고통은 지금까지 내 인생을 짓눌렀다. 참 많이도 원망하고 죽을 만큼 미워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안의 감정은 예상 밖으로 흘렀다. 슬픔이라기보다는 어리둥절함, 믿기지 않음, 그리고 어디선가부터 가슴이 휑해지는 이상한 감정이 몰려왔다. 아무 느낌 없이 그냥 눈물이 흘렀다. 그 감정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례를 치르며 거의 이십 년 만에 일가친척과 동생네를 마주했다. 어색했다. 그리고 상주이름 맨 위에 올라간 아버지의 그분이 마스크에 휠체어를 타고 장례식 맨 안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내게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지만 동생과 올케가 어머니, 어머니 하는 소리에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니라니?' 자식들 나이가 마흔이 넘어 아버지와 결혼한 사람이다.


첫날을 그렇게 보내고 아버지 입관을 하는 날이다. 얼굴을 가렸던 천을 거두니 아버지의 하얀 얼굴이 드러난다. 다가가 아버지의 얼굴을 만지니 딱딱하고 차가웠다. 누워있는 그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육식은 여기 누워있지만 껍데기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이미 자신의 병들고 무거운 껍데기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발인하는 날 영정사진을 내가 들었다. 화장터로 이동하는 내내 꼭 끌어안은 아버지 사진이 꼭 아버지 같다. 2시간도 안돼서 화장이 완료되고 검게 재만 남아 있다. 결국 재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는 삶이었다. 180에 88킬로였던 아버지가 작은 유골함에 다 들어간다. 유골함을 호국원에 안치하고 나서 돌아서는 동생이 나를 안고는 흐느껴운다.


"누나, 내가 정말 잘못했어. 앞으로 잘할게"


나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의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너무도 이쁘고 씩씩하게 자란 동생네 두 딸에게 계속 눈길이 갔고, 첫날에는 동생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는데 이제 편안히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장례를 마치고 동생네가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내가 자주 가는 사운즈 프리미어에서 두 가족이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정원이와 수영이도 오랫동안 소원했는데 이번 아버지 죽음을 계기로 다시 친해지는 전환점이 된 것 같다. 수영이가 언니랑 지난 삼 일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동생은 대령으로 명예퇴직한 이후 지난 삼 년간 호되게 민간인 신고를 했는가 보다. 올케도 알츠하이머에 파킨슨, 치매까지 걸린 노인을 병 수발하는 세 번째 부인의 역정에 마음고생을 꽤나 한 것 같다. 특히 동생은 해군 고위직으로서의 자존심도 내려놓고 지금 회사의 as파트를 맡아 직접 설치 및 수리까지 하며 사회에서 남 보란 듯이 성공하기 위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자존심 내려놓는 거 말이 쉽지 얼마나 어려운데 지금 그 길을 동생이 가고 있는 것이다. 역시 멋진 내 동생. 이제 세상에 나와 동생 둘밖에 없는데 앞으로는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그동안 못한 것까지 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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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 나에게 메신저가 왔다. 지금은 LA에 있는 수지에게서였다. 수지는 내가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진심 가득한 글로 나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부모의 죽음을 경험한 선배로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그저 느끼라고, 모든 감정은 지나간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들이 어찌나 따뜻하게 스며들던지, 편지를 읽는 내내 가슴이 따뜻해졌다.


수지는 내게 자연과 연결되라고 했다. 햇살 아래 먼지가 부유하는 것을 바라보거나, 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참새가 날지 않고 땅에서 깡충이는 모습을 지켜보라고 했다. 그렇게 사소한 순간들이 나를 중심으로 되돌려줄 것이라고. 그리고 숨 쉬는 법을 알려주었다. 빠르게 두 번 들이마시고 천천히 길게 내쉬는 숨.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저 숨을 쉬라고.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나는 매일 그 호흡을 하고 있다. 혼란스럽고 복잡할 때마다, 그 숨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오게 해 준다.


수지의 편지를 다시 꺼내 읽으며 나는 부모를 용서하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수지는 말한다. 그녀도 부모를 용서했지만,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다만 이제는 그 기억이 멀리서 희미하게 떠오를 뿐, 그녀의 현재를 흔들지는 않는다고. 그녀는 더 이상 왜 그렇게 했냐고 묻지 않는다고. '왜'라는 질문은 과거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기에, 이제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남았다고.


수지의 편지는, 아버지의 죽음이 내게 남긴 감정들과 맞물려 새로운 문을 열었다.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하나씩 드러나며, 그 안에 있었던 두려움과 슬픔, 미움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내 안의 어린아이는 여전히 그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고,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것이 충족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버지가 살아서 주지 못했던 사랑이기도 하지만, 지금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나 자신이 주고 있는 사랑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가 완벽한 부모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 역시 자신이 받은 상처와 한계를 안고 살아간 인간이었다는 것.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 했다는 것. 나는 더 이상 '왜'라는 질문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저 그를 보내드리고, 나의 삶을 살아가는 일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수지의 편지가 등불처럼 놓여 있다. 고마운 친구,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준 사람, 멀리 있어도 언제나 내 편인 사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는 다시 한번 깊이 느꼈다.


앞으로 나는 더 행복하게 살 것이다. 가슴속 돌덩이를 내려놓았고, 이제는 두 발로 내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자, 수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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