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막내딸이 두어 달 만에 내게 왔다.
그동안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딸이 안타까워할 때, 보고 싶으면서도 바쁜데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부모 때문에 그리스에서 고생을 한 딸. 예나 지금이나 풍족하게 지원해 주지 못해 막내를 생각하면 가슴속은 늘 미련과 회한이 차오른다.
“엄만 쉬는 날에도 찾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요? 여행은 잘 다녀오셨어요?”
“응, 잘 다녀왔어. 친구들은 항상 내 휴무 날짜부터 물어봐. 꼭 그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딸은 피식 웃었다.
“엄만 거절 못하니까 또 만나지.”
나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엄마가 그래도 세상을 잘 살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 안심이라는 듯 짧은 웃음을 보인다. 매일매일 늦은 시간 집에 들어오는 생활이 조금 피곤하긴 하다. 그래서 사실은 약속이 취소되는 날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한다. 그럴 땐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집에 앉아 책상 정리도 하고, 밀린 바느질도 하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천천히 꺼내 쓸 수 있어서 좋다. 지난 월요일 약속이 목요일로 미뤄졌을 때, 나는 동대문 시장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부자재를 고르고 미뤘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도 가벼워 지하철 환승이 지루하지 않았다.
딸도 무척 바쁘다. 일하고, 다시 시작한 공부에 매달리고, 건강이 좋지 않은 사위에게 신경 쓰느라 숨 돌릴 틈이 없어 보인다. 그 바쁜 와중에도 오늘은 나와 시간을 보내겠다고 또 온 것이다. 딸은 명절, 생일, 어버이날 말고도 거의 매월 찾아와서 맛집 탐방, 산책을 하고 혹 컴퓨터라도 안 되는 일은 없는지, 자기가 왔을 때 다 말하라며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세심하게 살피는 자상한 딸이다.
“엄마, 백운호수 가요. 근처 맛있는 식당도 많아요.”
“백운호수? 포천 백운 계곡 근처에 있으면 엄청 멀걸?”
“아니요. 엄마 집에서 30분 밖에 안 걸려요.”
나는 대단한 여행이라도 되는 듯 설렘이 밀려온다. 글벗들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은 이렇듯 설레는가 보다.
번잡한 도로를 벗어나 도착한 곳은 의왕시다. 식당 이름은 비스트로 기와.
현대식 기와지붕 아래로 빛이 길게 내려앉는 곳이다. 딸은 가만히 메뉴판을 보더니 두 사람인데도 성게알 파스타, 만조샐러드, 가지 요리(이름을 잊음). 세 개를 주문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파스타와 샐러드를 좋아하고 가지 요리를 잘 먹는다고 눈여겨본 딸의 생각은 언제나 맞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해야 하는 일조차 딸 곁에 있으면 사라지므로 아주 편하다.
"랍스터 파스타를 시키려고 했는데 한정 판매라 이미 동이 났대요. 우리가 좀 늦었나 봐."
"랍스터 아니면 어때. 바쌀텐데 잘됐다. 밖에서 먹는 파스타는 다 좋아~^^"
“엄마 단백질 많이 드셔야 해요.”
만조 샐러드는 이탈리아 말로 쇠고기를 토핑 한 샐러드라고 설명해 준다. 딸은 만조 샐러드의 쇠고기를 듬뿍 덜어 내 앞에 놓아준다. 딸의 그 속뜻이 마음에 먼저 닿아 나는 웃으며 포크를 들어 입안 가득 샐러드를 먹는다.
예전엔 늘 내가 딸의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했다.
딸은 먹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며 배부르곤 했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집이 아닌 바깥에서, 내가 차린 식탁이 아닌 누군가의 테이블 앞에서 함께 앉아 더 많이 얘기하고 음식의 맛을 보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딸은 말하지 않지만 안다. 이제 내가 힘들어 보이는 일을 되도록 만들지 않으려는 것을.
나는 그 조용한 배려에 어쩌면 천천히 길들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호수를 한 바퀴 걷기로 한다.
유리창 너머로 물새가 날아들고, 바람은 부드럽게 풀잎 끝을 스치고 있었다. 햇빛은 구름에 가려 은은하게 부드럽고, 공기는 적당히 차서 좋았다. 그 순간 나는 생각한다.
지금 이 시간, 나는 세상 제일 행복한 엄마라고.
딸과 팔짱을 끼며 체온을 맞추며 데크길을 걷는다.
검은 물닭 무리를 지나며 딸이 말한다.
“엄마, 물닭 여기 진짜 많아요.”
윤슬이 흔들리는 호수 위에서 검은 새들은 마실을 나온 듯 느릿느릿 물결 따라 움직인다.
모래톱엔 가마우지와 청둥오리들이 짝을 지어 쉬고, 멀지 않은 곳엔 왜가리 한 마리가 길게 목을 고정한 채 미동도 않는다.
“왜가리는 왜 항상 혼자 저렇게 서 있을까.”
내 말에 딸은 조용히 답을 한다.
“먹이 기다리나 봐요. 집중하느라.”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머무른다.
어쩌면 기다림이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떠나지 않는 용기일지도 모른다고. 우리의 삶은 늘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더 걷다 우리는 카페에 들어갔다.
“엄마 아포가토 먹어요.”
“아니, 아메리카노.”
나는 늘 그렇듯 같은 것을 골랐다.
딸은 아포가토가 없다며 대신 아인슈페너를 들고 와서 아인슈페너를 내밀며
“한 모금만 먹어봐요.”
단 것을 싫어하는 내게 새로운 맛을 보여 주고 싶은 딸. 그 말투는 어릴 때 딸에게 새로운 것을 먹일 때 내가 했던 말투와 닮아 있어 조용히 미소 짓게 한다.
딸은 사진을 찍어주고, 휴대폰 설정을 봐주고, 내가 불편해할 만한 것들을 먼저 찾아 해결사처럼 해 준다. 마치 내가 그랬던 날들을 되돌려 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 슬며시 딸의 어릴 적 귀여웠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자주 보고 싶지만, 우리는 서로의 삶을 살아야 하니까 가끔 만나도 된다. 늦어도, 드물어도, 이렇게 다정하고 행복하면 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노을로 접어드는지 서쪽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래, 딸아. 자주 찾지 않아도 괜찮아. 너무 애쓰지 말고 건강하기만 하면 좋겠어.
열악함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꿋꿋이 해나가고 있는 딸이 늘 안쓰러워 애가 타지만, 내색하나 하지 않는 여전히 애교 많고 사랑스러운 딸. 너는 매일 내 곁에 뜨는 해처럼 달처럼 항상 내 마음 위에 있다는 거 알지?.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 딸!
사진; 양유정. 안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