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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은마흔여덟 Jan 02. 2025

딴엔 고군분투(1)

어른 - 어른이 된다는 건

[안타깝게도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시대는 저물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지녀야 할 태도는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다져온 나의 믿음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틀렸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유연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박산호 지음


어릴 적엔 누구나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어른이 되면 원하는 삶을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이가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독립과 함께 책임과 욕망이 충돌하며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우리는 허둥지둥 살아간다. 어른이 된 후회는 과거를 회상하게 하고,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은 때때로 타인에 대한 불필요한 잔소리로 표출되기도 한다.


아이와 함께했던 어느 겨울이 떠오른다. 잠들기 전 건조한 손으로 극세사 이불을 문지르니 정전기가 따닥따닥 일어났다. 신기해하던 아이는 자신의 손으로도 따라 해 보려 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로션을 잔뜩 발라 촉촉했던 아이의 손 때문이었다. "아빠, 나도 어른이 되면 손에서 전기가 나와요?" 그때 나는 피곤하기도 하고 잠도 와서,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그럴 거야"라며 얼버무렸다. 아마도 아이는 전기를 만드는 어른의 손을 꿈꾸며 잠들었을 것이다.


조금 더 자란 딸아이는 어른이 되길 서두르는 듯했다. 어느 날, 방구석에서 엄마의 구두가 불쑥 나왔다. 몰래 신어보았던 것이다. 작고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어른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 따라 하냐"며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어른을 동경하는 마음은 누구나 비슷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린 시절, 나는 어른이 되면 더 욕망할 것 없는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거라 믿었다. 경제적 여유 속에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과 다르게 어른이 된 이후부터는 마치 쳇바퀴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놀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하고, 일을 하다 보면 몸이 피곤해져 결국 다시 놀기 위해 또 일을 한다. 이상적인 삶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상에 근접한 순간도 있긴 했다. 대전에 살던 시절이 그랬다. 원하는 아이도 생기고, 회사에서 제공한 집에 거주하며, 고공행진하는 실적 덕에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던 시기였다. 더 바랄 것도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지만 그런 시절도 오래가지 않았다. 회사의 경영 악화와 함께 서울로 복귀했고, 결국 이직을 선택하게 되었다.


삶은 끊임없이 혼란스럽다. 물리학의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3x3 큐브를 아무렇게나 돌리면 모든 면의 색깔이 맞춰질 확률은 극히 드물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혼란이 기본값이고, 아주 가끔만 안정감을 느낀다. 하지만 큐브와 우리의 삶에는 큰 차이가 있다. 큐브에서는 한 가지 상태만이 성공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정답이 하나일 수 없다. 오히려 정답을 강요하는 순간 꼰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부자가 되는 것, 집을 소유하는 것, 대기업에 다니는 것 등은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출발점도, 욕망의 크기도, 주어진 현실도 다른 우리의 삶은 무척이나 다채롭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 덕에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도장 깨기 하듯이 한편씩 해치우던 어느 날,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이 작품은 어른들의 고단한 삶을 잘 보여줬다. 감당할 수 없는 부채에 시달리는 한수, 깊은 감정을 숨기며 살아가는 미란과 은희, 우울증을 외면하다 사고를 겪는 선아.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세상에는 사연 없는 사람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겉모습 이면에는 누구나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단순한 객관식 문제에서 조차 절대, 무조건 같은 단어가 들어가면 오답일 확률이 높듯이 사람 사는 세상엔 더더욱 절대란 용어가 있기 어렵다는 것을.


 어른이 된다는 건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를 넘는 일이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사에 대한 유연함을 배우고, 내가 정한 목표를 향해 흔들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한 가지 정답만을 고집하지 않고,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이정표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어른이 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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