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살게 하는 사랑을 만나게 되기까지.
감독: 미셸 프랑코
출연: 제시카 차스테인, 피터 사스가드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103분
국가: 미국
개봉일: 2025.01.22
‘기억’ 때문에 괴로운 한 여자와 남자가 있다.
여자는 끔찍하게 잊고 싶은 과거 때문에,
남자는 자꾸만 사라져가는 기억 탓에 깜깜한 현실을 허우적거리듯 살아간다.
실비아(제시카 차스테인)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안전에 집착한다. 현관문을 삼중으로 걸어잠그고, 작은 시선과 소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불안감에 쉽게 잠을 이루지도 못한다. 그의 불안정한 심리는 홀로 키우는 딸 사라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딸이 남자친구를 사귀거나 밖으로 돌게 되는 것을 걱정하고, 술과 약에는 손도 대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 십대인 딸을 둔 어머니가 으레 하는 걱정이라 하더라도, 실비아의 단호한 태도는 꽤나 과보호처럼 비치기도 한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사울(피터 사스가드)은 언제 어디서 사건사고를 일으킬지 모를 정도로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 실비아와의 첫 만남이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던 이유도 그의 정신이 멀쩡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울은 그를 걱정하는 형의 가족으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있고, 일상에서도 늘 보호자가 필요하다. 물론, 사울이 보이는 기행은 간헐적으로 나타날 뿐 평상시에는 행동에 보통 사람들처럼 행동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방심한 순간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사고를 일으키기 때문에, 가족은 그를 집안에 묶어놓으려 할 수밖에 없다.
실비아의 주변에 도사리는 불안과 안전을 향한 그의 집착은 끔찍했던 어린 시절 가정 환경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밝혀진다. 실비아는 과거 집에서 친부에게 수 차례 성폭행을 당했고, 수십 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실비아의 곁엔 그를 지켜주거나 기댈 수 있게 만드는 존재가 없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를 거짓말쟁이 취급했고, 목격자였던 동생은 무력할 뿐이었다.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실비아는 결국 홀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울과 실비아의 인연은 환자와 보호자의 관계로 시작된다. 내면에 깊은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실비아는 그를 환자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하며 돌본다기보단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듯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다. 잊고 싶은 기억 때문에, 사라져가는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던 두 사람은 서로의 곁을 지켜주며 위로해주고, 포근히 껴안아줄 수 있는 사이로 관계가 깊어진다.
사랑은 변수와 함께 찾아오기 마련이다. 환자와 간병인의 관계에서 연인으로 거듭난 두 사람은 더 자주,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고, 이로 인해 사울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노출된다. 형 아이작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되자마자 보호자를 교체하고, 실비아에게 사울을 만나지 말 것을 종용한다. 잠시 평온했던 실비아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연을 끊었던 어머니가 나타나 그의 고통에 불을 지핀다. 결국 실비아는 처절하게 잊고 싶었던 과거를 다시 한 번 생생하게 꺼내게 되고, 트라우마에 몸부림치며 그의 현실은 다시 지옥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면에 깊은 병을 가진 둘은 정작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으로부터 정서적인 지지나 이해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두 사람 만큼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각자의 상처를 치료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준다. 가족들은 겉으로 두 사람을 위하는 척 행동하지만,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둘뿐이었다. 실비아와 사울을 괴롭게 만든 건 ‘기억’이지만, 두 사람이 함께일 때면 이들을 짓누르던 기억은 더 이상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과거에 붙잡혀 혹은 손에 잡히지 않는 모래처럼 흩뿌려지는 기억 때문에 무너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젠 곁에서 사랑으로 지탱해줄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현재에 충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기억’이라는 굴레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이다. 실비아의 과거가 불현듯 떠오르더라도, 사울이 소중한 기억의 한 조각을 잃게 되더라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밑바닥 같은 모습마저도 감싸 안아줄 서로가 계속해서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을 테니까.
메시지에 대한 이해 여부를 떠나 전반적인 서사에 대한 설명은 꽤 불친절하다. 특히 실비아와 사울이 과거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이들에게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는 대사를 통해 지나가는게 전부이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거의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극을 납득할 수 있는 건 역시 두 주연 배우의 엄청난 연기력 때문일 것이다. 제시카 차스테인의 폭발적인 연기가 펼쳐지는 후반부의 독백신은 굳이 그의 과거를 스크린에 펼쳐보이지 않더라도, 실비아가 겪었던 고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끔 한다. 알츠하이머라는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인 사울 역의 피터 사스가드 역시 체념과 슬픔을 머금은 눈빛으로 내면에 잠식된 그의 괴로움을 섬세하게 전달한다. 극에서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배우들의 열연 덕분일 것이다.
* 키노라이츠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