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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즈모넛cosmonaut Nov 06. 2020

#4 가족으로부터의 탈주

우주여행자로 사는 법

요즘 유튜브에 자주 등장하는 철학자 고미숙(나는 그녀를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자신을 그리 부르지 않지만)의 핵가족 윤리론은 통쾌하다. 가족으로 엮여 살아온 내가 제일 답답해하는 것이 부자유인데, 고미숙의 핵가족 윤리 비판을 들으면 그대로 실행은 못한다 해도 일단 속이 시원하다. 맞는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나중 문제이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자유의 지향이 물씬 풍겨 나서 좋다.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문득 세렝게티 공원이 가보고 싶어 졌다. 인터넷으로 가는 길을 확인해 비행기 티켓을 사고, 아고라를 통해 호텔을 예약한다. 기대감에 들떠서 짐을 챙기고, 인천공항으로 달려가 이 답답하고 재미없는 서울을 떠난다. 두 주 정도를 비워야 하니 학교 일을 미뤄야 하지만, 내 자유를 위해 희생할 만하다. 돌아와서 밀린 일들을 몰아쳐 소화하면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다.     


나는 또 이런 상상을 한다. 일주일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카톡도 하지 않으며, 심지어 귀찮으면 먹지도 않고 지낸다. 물론 TV나 유튜브도 보지 않는 대신, 나의 소리 좋은 Boss 무선 스피커로 멜론이 들려주는 클래식에 취해 한껏 사치스러운 표정을 지어본다. 가끔 슬리퍼를 끌고 뒷산 어귀까지 걸어가서 외진 곳에 있는 벤치에 앉아 두 팔을 벌리고 살랑거리는 바람의 간지럼을 느껴본다. 너무 심심해서 어찌할 수 없으면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펼쳐 들고 그의 감각 경험에 빠져든다.      


사실 내가 가족에 묶인 사람이 아니라면, 놀랍게도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더 놀랍게도 난 그런 할 수 있는 것들을 평생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가끔 비슷한 뭔가를 부모와 함께 혹은 가족과 함께, 아니면 아주 가끔 친구들과 함께 해본 것이 고작이다. 꼭 뭐 감동스럽게 놀고, 깊이 있고 느긋하게 자유의 행복감을 찾고 하는 것만 그런 게 아니다. 일이든 생활이든 공부든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가족이나 사회관계에 엮인 상태에서 꾸역꾸역 해온 인생이다. 뭘 해도 나를 혼자 내버려 둔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로울 지경이다.     




우주여행자가 보기에는 개미나 얼룩말이나 인간이나 그저 지구에 사는 한 종의 생물일 뿐이겠지? 동물들의 가족관계가 어떠한지는 잘 모르지만, 여하튼 인간들이 애지중지하는 핵가족이라는 가족 유형도 그저 여럿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음에 틀림없다. 그 가족을 위해 혹은 가족끼리 똘똘 뭉쳐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의 핵가족 지상주의가 다른 동물들에게나 우주여행자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잘은 몰라도 적어도 뭔가에 홀려 참 부자유스럽고 답답하게 사는구나 하며 바라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사실 생명체에게 공통되는 것은 증식과 돌봄밖에 없다. 증식을 위해 암수가 만나 자식을 낳는 것이고, 낳은 자가 됐건 공동체가 됐건 그 자식이 홀로 설 때까지 잠시 돌보며 살아갈 뿐이다. 그 외의 것들은 여러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생명체 종별로 선택해서 살아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무려 90여 년 전에 세상이 정한 가족 유형을 거부하고 계약 결혼을 감행했지만, 그들의 자유는 불행하게도 인간사회에서 통용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핵가족을 거부할 때 받게 될 눈총들과 또 그로 인해 상처 입을지도 모를 자신의 핵가족 구성원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인간 수가 너무 많은 데다가 지구를 파괴하는 주범이 인간이니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그 불편한 결혼은 안 하는 것이 낫다. 젊은 시절 두근거리는 몸의 끌림과 정신의 반려 욕구에 취해 결혼을 했다면, 사르트르와 보봐르처럼 그 어떤 피동성이나 구속도 허용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려 애써볼 필요가 있다. 자식을 낳았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은 하되, 욕심이나 바람을 모두 버리고 독립된 주체로서 대하려 노력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겠지….     


그런데 자식까지 낳았다면 사실 모든 것이 쉽지 않다. 고미숙이 핵가족을 자본주의적 욕망을 재생산하는 공간이라 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다. 구속하고 피동성을 강요하며, 욕심을 부리고 항상 서로에 대한 뭔가를 바라는 핵가족이라는 공간은 푸코가 말하는 미시권력의 자기장 끄트머리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핵가족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그 권력의 열매를 따먹을 수 없음을 평생 자각하지 못한 채,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얼떨결에 열심에 열심을 다 하는 노예적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탈주의 시작점은 어디에 있을까? 가족이건 공동체건 사회건 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깃털처럼 가벼운 자유의 상태를 만드는 시도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우주여행자처럼 생각하고 바라보고 행동하는 용기와 지혜는 도대체 어디에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요즘의 결심은, 의심하고, 자유롭게 결론 내리고, 용기 있게 행동하고, 나 스스로의 그 모든 것에 책임지며 살아가자는 것. 예민하게 깨어 있으면 사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엄청난 골초라서 내가 많이 좋아하는 한나 아렌트가 “사유하라”라고 외친 이유 역시 다르지 않다. 그녀가 인간의 정치적 삶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면 나는 일상의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일 뿐, 그 근저에 자유와 책임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우주여행자처럼 살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난 지구로부터 나라로부터 사회로부터 핵가족으로부터의 탈주를 시작할 것이다. 난 왜 아빠라고 불려야 해? 난 왜 교수 다움을 강요받아야 해? 난 왜 국민이어야 해? 난 왜 어른을 공경해야 하고 이순신을 본받아야 하며, 참아야 하고 열심히어야 하고 ‘성공’해야 해? 난 왜, 난 왜 하고 매일 같이 묻고, 자유롭게 답하고,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그 답에 따라 통통 튀며 살아갈 것이다.     


자본주의의 노예, 무엇 됨의 노예, 의무와 도덕이라는 허상의 노예로 살아가기에는 내 삶의 바로 이 순간들이 너무나 아깝다. 자유로운 나의 동반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일이라도 당장 길을 나서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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