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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노산일기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이란

노산일기

by sunshine


지난 24년 12월 31일, 18여년을 이어왔던 무역업에 결국 종지부를 찍었다. 지인을 통한 동종업계 면접기회는 종종 있었지만 늘 마지막 질문은 육아문제에 대한 대책이었다. 면접관들은 나에게 주양육자 자리를 포기할 수 있는지 물었고 나는 그럴 수 있다는 말을 입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남미에 장기 출장 갈 수 있겠냐, 출근 8시 이전 퇴근 8시 이후의 삶이 가능하겠냐 등의 면접마다의 반복된 질문들). 기껏 대답한다는 소리가 아이를 키우는 사람과 아닌 사람 간의 비교라면 객관적으로도 아닌 사람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겠으나 그 갭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개인 역량으로 메꾸겠다 정도니 내가 면접관이라도 안뽑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단 붙고 보자 라고 생각하기에는 정말 현실적인 대책이 없었다.


급여 조건이 나쁘지는 않았으니 충분히 사람을 쓸 수는 있겠고 주변도 다들 그렇게 살고 있었지만 조부모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내 아이를 다른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 결국 나의 일 욕심이나 야망의 그릇이 작은 탓일 것이다. 또한 나에게 직업이란 돈 벌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도 사실이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내 평생 내가 직장을 그만둘꺼라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마침표를 찍기까지의 과정은 겉으로는 평온했을지언정 내 속은 온통 재투성이였다. 자존감이 낮았던 나는 그간 일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다시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18여년간의 경력을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새로운 일을 찾는 과정에서 딱 두 가지를 다짐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막노동이라고 두렵겠냐만 어차피 경력도 포기했겠다 그 어떤 일이든 아이와의 시간을 희생시킬 수 없다. 그리고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든 내가 선택한 일이니 아이를 위해 희생했다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그렇게 생각이 되지도 않지만). 어차피 나라는 인간은 내 인생의 미래가 그렇게 나쁘게 흘러가도록 마구잡이로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니까.


그렇게 25년을 맞았고 오늘로 10월 1일을 맞기까지 짧은 기간 새로운 분야들에 많은 도전을 했다. 실패도 있고 결과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일들도 많다. 한 세 달간 하루 만보씩은 걷는 것 같다. 돈을 잃고 건강을 얻었다고 기뻐해야 하는건지.


그래봐야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하루 고작 두시간 늘어났을 뿐이고, 모녀간 40살의 나이 차는 하루하루 더 버거워지지만 그래도 회사에 썼던 에너지를 아이와 뛰어놀 수 있는 체력으로 돌릴 수 있게 된 것, 아이의 발달 상태를 관심있게 지켜볼 수 있게 된 것, 아이와 대화를 조금이나마 더 할 수 있게 된 것 그것만으로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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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shine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회사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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