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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주 Jan 02. 2021

빛은 그림자를 갖는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허블) 수록 소설 (1)

   


 김초엽 작가는 포스텍에서 화학과 생화학을 전공한 과학도였다. 그녀는 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소설가 김초엽의 첫 소설집이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작가이지만, 2019년 오늘의 작가상, 2020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최근에 가장 주목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는 일곱 편의 sf소설이 담겨 있다. 풍부한 과학 지식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펼쳐놓는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슬프고 감동적이다.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먼 미래에도 인간의 근원적 감정들과 삶의 문제들은 여전할 것이다. 문제의 스케일이 지구 밖 우주로 뻗어나가겠지만, 본질적 가치에 대한 질문은 시간과 공간을 가르지 않는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 모두가 보석 같다. 이에, 소설집 전체에 대한 서평 대신 일곱 개의 보석이 주는 감동을 담아보고자 한다.「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이 소설집의 첫번째 수록소설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액자 밖에는 화자인 데이지가 있다. 데이지가 소피에게 자신이 왜 이 편지를 남기고 지구로 떠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액자 안에 올리브의 이야기가 있고, 또 그 안에는 올리브가 알아낸 올리브의 엄마 릴리의 이야기가 있다.      


 데이지가 있던 곳은 지구 밖, ’마을‘이라는 곳이다. ’마을‘에서는 지구를 ’시초지‘라고 부른다. 성년이 되기 전에 시초지를 순례하고 돌아오는 관습이 있다. 소설 속 ’마을‘이라는 곳은 일종의 유토피아다. 차별, 배제, 슬픔이 없는 곳이다. 갈등, 고난, 전쟁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속에만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행복하지만, 불행을 모르기에 행복의 의미도, 깊이도 알지 못하는 곳이다. 그들이 지구로 순례를 떠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구는 디스토피아다. 진정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인생의 밝은 면만 보아서는 안된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맞서 싸워야 하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불완전한 세계‘ 에 머물기도 한다. 세상은, 인생은 좋은 것만 보며 좋은 것들 속에서만 살 수 없다. 불행의 실체와 행복의 근원, 세계의 양면성, 이들 존재의 시초.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이 지구에 있다. 고대 원시인들이 치렀던 잔인하거나 고통스러운 성인식에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마을‘의 성인식인 순례에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어느 날, 순례에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시초지에 두고 온 것 때문에 슬퍼서 울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순례자들 중 어떤 이들은 지구에 남는 이유가 무엇일까. 유토피아의 세계에 속한 이들이 디스토피아인 지구에 남는 이유. 데이지는 그것이 궁금하다. 세계의 이면과 진실이 궁금해진 자는 이제 그 진실을 알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한다.     


어쩌면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 나에게는 분명한 균열이었던 그 울고 있던 남자와의 만남 이후로, 나는 한 가지 충격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어. /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p.19)     


 이들의 조상인 올리브도 그 진실이 궁금해서 지구로 길을 떠났었다. 올리브는 지구에서 그녀의 어머니 릴리의 진실을 추적한다. 릴리 다우드나는 2035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태어났다. 보스턴으로 이주한 릴리는 프리랜서 바이오해커로 활동한다. 발생과 후성유전적 변형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인간배아 디자인에 성공한다. 그녀를 흉내내려는 바이오해커들에게 온라인으로 정보를 공유하며 인간 배아 시술이 일반화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100년 후, 올리브가 도착한 지구는 유전자 시술로 태어난 개조인들이 사는 도심과 비개조인들이 사는 도시 외곽으로 분리된 사회가 된다. 릴리가 인간배아 디자인을 시작한 이유는 태어나는 아이에게 아무런 병도 갖지 않고 뛰어난 특성만 가진, 아름다운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 결과 세상을 ’배제의 층계‘로 나누었을 뿐이다. 릴리는 자신의 클론 배아로, 딸 올리브를 만든다. 그러나 자신과 똑 같은, 얼굴에 흉터가 생기는 유전적 결함이 발견되지만, 릴리는 배아를 페기하지 못한다.


릴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로써 나는 태어날 가치가 없었던 삶임을 증명하는가?’ 
릴리는 나에게서 스스로를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원치 않았던 존재로 태어난 릴리. 세계에서 배제된 릴리. 그러나 악착같이 살아남아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가능성을 입증한 릴리 다우드나. / 그녀의 결정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도 나는 모르겠다. 릴리는 자신의 삶을 증오했지만, 자신의 존재를 증오하지는 못했다. (p. 47)     


릴리가 나를 폐기하지 않은 것은 내가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의 문제였다. 어떤 존재에게 살아갈 권리가 부여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결국 릴리는 나에게 태어날 가치가 없다는 낙인을 찍지 못했다. 그건 릴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p.48)     

 

 유전적 우수성과 열등성으로 인간의 가치를 매길 수 있는가. 질병이 있다고 해서 살아갈 권리도 가치도 없는 인생은 없다. 릴 리가 자신과 똑 같은 유전적 결함을 가진 배아를 폐기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릴 리가 배아를 폐기하는 대신 아이를 위해 유전자의 차별이 없는, 이상향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지구 밖의 ‘마을’이다.     


정말로 지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곳이라면, 우리가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 그들은 왜 지구에 남을까? 이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 보호와 평화를 벗어나, 그렇게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한 풍경을 보고도 왜 여기가 아닌 그 세계를 선택할까? / 소피, 우리가 왜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지를 생각해본 적 있어?(중략) 같은 자궁에서 태어나 자매처럼 자란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낭만적 감정도 성애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단지 우연이기만 할까? /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p.52)     


 결국 릴리가 올리브를 위해 만든 유토피아가 진정한 유토피아가 아닌 것이다. 고통과 비탄으로 가득차 있는 곳에서 찾아가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메시지가 와닿는다. 어둠을 아는 자가 빛을 찾아가듯이 불행을 알아야 행복을 실감한다. 지구는 차별과 불합리와 고통이 가득한 곳이지만, 그에 맞서는 용기와 연대의 의미 또한 깨달을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P.54) 라는 데이지의 편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멀지 않은 미래에 유전자 시술이 일반화될 거라는 예측은 이미 새로울 것도 없다. 생명연장과 2세의 유전자 선택 등에서 빈부의 격차로 인한 차별과 배제, 분리는 자연스레 예상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모습이다. 우리 모두가 우려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다. 인간이 신의 영역을 차지할 때 과연 어떤 미래가 올 것인지 두렵다. 어떤 암울한 미래가 펼쳐지든 그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 있고, 그 곁을 지키며 함께 싸우는 사랑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미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의 세상이 되겠지만, 인간들의 삶이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고, 삶이란 어둠과 빛이 공존하고 행복은 불행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많은 생각과 질문을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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