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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천소년 Jun 14. 2024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이야기

【NBA, Legends】 Michael Jordan

출처: unitedcenter.com


 내가 가장 좋아했고 애정했던 운동은 단연 농구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1993년 겨울이었다. 나를 비롯한 동네 친구들은 축구공 대신 농구공을 잡았다. 농구대잔치 시절 연세대학교와 기아자동차의 농구 중계를 보고 난 후 그 여운을 참지 못하고 바로 농구공을 들고나갔다. 동네 공터에 규격 사이즈보다 낮은 농구 골대가 하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동네 꼬맹이들 모두 농구 중계를 보고 난 후에 같은 마음으로 그곳에 모였다. 


 이제는 전설과도 같은 옛날 이야기다. 마지막 승부, 슬램덩크, 연세대학교 농구부. 이 세 가지 호재가 동시에 터지며 청소년 부동의 1위 스포츠 축구의 아성을 농구가 위협하기 시작했다.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나의 학창시절만큼은 농구가 축구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이후 나는 중학교라는 조금 더 크고 잔인한 세상으로 나아갔다. 당시 학급에 미국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시카고에서 왔다고 했다. 시카고라는 도시를 그때 처음 들었다. 확실히 미국 물을 먹고 와서 그런지 그 친구에게는 요즘 말로 스웩이 있었다. 무더웠던 어느 날 그 친구가 교복을 벗었는데, 한 흑인 농구 선수가 혀를 내밀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티셔츠 속에 이 사람 누군데?" 

 "마이클 조단 아이가. 니 마이클 조단 모르나?"

 "아~ 마이클 조단! 시카고 불스! 뉴스에서 봤다. NBA 최고 아이가? 지금도 잘 하나?"

 "은퇴했다. 그래도 시카고에 스카티 피펜이 남아 있어서 시카고는 여전히 잘한다." 

 "피펜은 또 누고?"


 그 친구를 통해 시카고 불스와 마이클 조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시카고의 하늘과 공기도 이야기했고, 시카고 피자도 먹어 봤다며 자랑했다. 그때부터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생겼고 미국 자본주의 상징인 미국 프로 스포츠에도 관심이 생겼다. 그 친구는 자기 집에 시카고 불스 농구 동영상이 있다며 자랑했지만 한 번도 나를 초대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먼저 너희 집에 놀러가도 되냐고 들이대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스포츠 뉴스에 나오는 영상을 제외하고는 마이클 조던의 플레이를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은퇴했다고 했다. NBA는 접할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농구대잔치가 있었기에 농구 경기 중계를 많이 봤다. 당시 고려대학교 김병철 선수 플레이를 가장 좋아했다. 내 눈에는 김병철이 중력을 거스르는 플라잉맨이었다. 신장은 작았지만 신체 능력이 정점이던 20대 초반 김병철 선수의 운동능력은 뛰어났고 고스란히 플레이에 반영되었다. 그때부터 은퇴까지 그의 별명은 피터팬이었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 한 운동선수가 돌아온다는 기사가 스포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뉴스란을 도배했다. 뉴스에 관심 없고 평범한 중학생이던 내가 알 정도면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농구 코트를 떠났던 마이클 조던이 복귀한 것이다. "I'm back."이란 말과 함께. 그 당시 "I'm back."이란 문장이 적혀 있는 나이키 티셔츠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출처: Bleacher Report


  오! 드디어 마이클 조던의 플레이를 과거가 아닌 현재형으로 볼 수 있는 건가 하는 설렘을 느꼈다. 감사하게도 당시 워낙 마이클 조던의 컴백이 이슈가 되었던 탓에 국내에서도 NBA 중계를 해주기 시작했다. SBS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NBA 농구 경기를 녹화해서 보여주었다. 꽤 늦은 시간에 방송했지만 마이클 조던의 플레이를 보겠다는 나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국내 NBA를 좋아하는 팬덤이 부족한 것을 방송사도 알기에 대부분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 경기로 편성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경기 템포가 빠르지도 않았고 시종일관 덩크슛이 터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국내 농구에서 볼 수 없던 플레이들만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나 조던이 아닌 다른 선수들도 덩크슛과 점프슛을 너무 쉽게 구사하는 게 충격이었다. 나는 슛은 무릎의 반동을 이용해 온 몸으로 던지는 느낌으로 배웠고 익혔다. 하지만 그들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손목 스냅만으로도 부드럽게 포물선을 그려냈다. 지금은 별세하신 한창도 해설 위원의 목소리가 아직 기억이 난다. 


 "시카고는 조단에게 일대일 시킵니다. 역시 마이클 조단이죠. 가볍게 짬프 슛을 성공시킵니다. 시카고 센타는 룩 롱리죠. 호주 출신입니다. 시카고 센타가 허약하다는 거죠. 그래도 데니스 로드만이 있어 골밑을 지켜줍니다. 한 경기 리바운드 스무 개씩 잡아내는 선수죠. 그리고 스몰포와드 스카티 피펜이 이 팀의 살림꾼이죠. 무엇보다 시카고에서 필 잭슨 감독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어요."


 25년 전 기억을 더듬어 가상으로 한창도 해설 위원의 느낌으로 재연해봤다. 당시에는 선수 이름이나 농구 용어를 말할 때 과도하게 양성 모음을 많이 사용했다. 그 영향으로 나 역시 양성모음을 사용해 외래어를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령 블락, 멤바, 와나완 등) 그 영상은 나에게 NBA는 불스고 마이클 조던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안타깝게도 SBS 수요 NBA 농구 중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도 처음으로 하이라이트가 아닌 전체 경기로 NBA를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프로그램은 나에게 아주 의미가 있다. 


espn.com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갔다. 조던은 복귀 후 3연속 우승을 달성하며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되었다. 특히 모두가 불리할 것이라 예상했던 1997~98시즌 유타 재즈와의 파이널 시리즈마저 'The Shot'으로 팀을 우승시키며 무려 두 번이나 쓰리핏을 달성했다. 선수로서의 마지막 슛이 팀의 3연속 우승을 결정짓는 슛이라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그의 위대한 농구 여정을 함축하고 있다. 그는 역대 농구 선수가 아닌 역대 스포츠 선수 1위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조던 은퇴 이후에도 나는 NBA에 관심이 많았다. 팀 던컨, 코비 브라이언트, 빈스 카터, 제이슨 윌리엄스, 케빈 가넷, 앨런 아이버슨과 같은 개성 넘치는 신예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와서는 샤킬 오닐의 LA 레이커스가 리그를 지배했다. 샤킬 오닐은 스스로를 가장 압도적인 선수라고 표현했을 만큼 대단한 실력과 커리어를 지닌 농구선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시카고처럼 절대강자였던 레이커스를 그리 응원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1999~2000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나의 또 다른 우상 스코티 피펜의 포틀랜드가 7차전에서 안타깝게 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수요 농구 중계를 보고 피펜이 조던보다 플레이가 더 우아하고 매끄럽다고 생각했다. 2인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조던 없이도 피펜이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커스가 포틀랜드보다 더 강했고, 위기의 순간에서 포틀랜드는 버티지 못했다. 


 게다가 레이커스에는 또 다른 전설인 코비 브라이언트도 있었다. 2000년 이후 시즌 MVP는 앨런 아이버슨과 팀 던컨의 몫이었지만 최종 우승의 주인공은 항상 레이커스였다. 심지어 2000~01시즌 플레이오프에서는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새크라멘토, 샌안토니오 같은 서부 강팀들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이 이겨버렸다. 다음 시즌 역시 샤크와 코비가 건재했기에 리그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 그때 조던이 두 번째 은퇴 이후 또 한 번의 복귀를 선언했다. 나는 농구를 정말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시중에는 승부욕 강한 조던이 자신의 아들이 "샤킬 오닐이 최고의 농구 선수다."라고 한 말에 자극받아 복귀했다는 설도 있었다. 


 궁금했다. 38살의 노장 선수가 얼마나 잘할지. 그것도 세 시즌이나 코트를 떠났던 선수가 리그 일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체력과 실력을 갖추었을지. 그가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마이클 조던임을 보여줄 수 있을지. 그리고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신화가 깨지는 것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마이클 조던은 1990년대 단 한 번도 우승에 실패한 적이 없다. 정규 시즌 리그 전체 1위를 했던 적도 있고 못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단 한 번의 시리즈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다. 아이재아 토마스의 디트로이트, 매직 존스의 레이커스, 마크 프라이스의 클리블랜드, 드렉슬러의 포틀랜드, 패트릭 유잉의 뉴욕, 찰스 바클리의 피닉스, 샤킬 오닐의 올랜도 매직, 개리 페이튼의 시애틀, 알론조 모닝의 마이애미, 레지 밀러의 인대애나, 칼 말론의 유타 재즈까지. 리그를 주름 잡던 모든 팀이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를 넘지 못했다. 


 마이클 조던이 마이클 조던인 이유는 득점왕을 밥 먹듯 하고 MVP를 따내고 항상 올스타와 All NBA First Team에 선정되어서가 아니다. 중요한 무대에서 그의 팀이 늘 이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팀의 주역은 이견 없이 항상 그였다. 스코티 피펜이라는 또 다른 전설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파이널 MVP 수상 논란조차 없었을 정도로 MVP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적어도 90년대만큼 그는 늘 승자였다. 


 사실 파이널 무대에 올라간 것만 해도 대단한 업적이다. 게다가 파이널과 같은 중요한 무대에서 늘 이길 수는 없다. 파이널에서 맞붙는 상대도 전설이기 때문이다. 카림 압둘자바, 래리 버드, 매직 존슨, 하킴 올라주원,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팀 던컨, 르브론 제임스, 스테판 커리와 같은 선수들도 파이널 시리즈에서 상대의 우승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거나 분개했던 순간이 있었다. 


 한편 조던은 워싱턴 위저즈를 플레이오프에 올려놓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하지만 그는 늙었다. 사실 그가 전성기 기량이었다고 하더라도 시카고 시절처럼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시카고 전성기를 함께 했던 '스코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 데니스 로드맨, 토니 쿠코치'와 워싱턴에서 함께 뛰었던 '리차드 해밀턴, 제리 스택하우스, 콰미 브라운, 타이론 루'의 팀 동료 수준 차이가 컸다. 군입대하기 전까지 틈틈이 조던의 경기를 봤다. 특히 그의 마지막 시즌은 두 자리 수 득점을 올리지 못하는 게임 수가 늘어났다. 확실히 우리가 아는 마이클 조던이 아니었다. 그래도 충분한 휴식 후의 게임이나 상대적으로 수비가 약한 팀과의 경기에서는 30득점 이상을 폭발시키고는 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 뉴올리언스와의 경기였다. 당시 뉴올리언스의 주전 슈팅 가드는 데이비드 웨슬리라고 슈팅력은 뛰어났지만 단신에 웨이트도 부족해 대인 방어 능력이 떨어졌다. 반면에 조던은 신체 조건으로는 슈팅 가드 계에서 최상위 포식자다. 경기 전부터 뉴올리언스와의 경기에서는 조던이 잘 하겠다고 예상했는데, 나의 예상대로 40점 이상을 폭발시키며 팀을 승리로 이끌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입 댈 필요도 없는 점프슛은 여전했고 한 번씩 번뜩이는 패스와 수비도 역시 조던이라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조던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워싱턴 시절이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타이틀에 누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40대 나이에 그보다 더 농구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찾았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All NBA Team 실력을 보여주는 르브론이 그 답이다.) 농구를 사랑해서 복귀했다는 말답게 마지막 시즌 전 경기 출전을 기록하며 진짜 은퇴를 선언했다. 다행스럽게도 NBA 역대 평균 득점 1위 타이틀을 지키면서 말이다. 조던이 갖고 있는 여러 기록 중에 역대 평균 득점 1위라는 것이 나름 상징적이고 의미 있는 기록이라 생각한다. 사실 두 번째 복귀를 통해 그 기록이 깨질까 걱정스러웠지만 0.05점 차이로 겨우 지켜냈다. (참고로 커리어 평균 득점이 30점 이상인 선수가 딱 두 명이 있다. 마이클 조던과 윌트 체임벌린이다.)


출처: nbcsports.com


 2003년을 끝으로 조던은 진짜 농구 코트를 떠났다. 이후 기가 막히게 2003년 드래프트에서 또 다른 23번의 전설을 쓸 한 선수가 등장했다. 나는 그동안 군 생활을 했고 복학을 했으며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0년대도 90년대 못지않게 많은 시간을 농구장에서 보냈다. 27번째 내 생일을 대학 동기들과 함께 보냈다. 그때 동기들이 돈을 모아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 바로 에어 조던 농구화였다. 그것도 정말 갖고 싶던 에어조던 5. 선물을 받고 그렇게 기쁜 적은 처음이었다. 그 농구화를 신으면 조던처럼 플레이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농구화가 바뀌었다고 실력이 늘지 않았다. 나의 농구 스타일은 전형적인 하드 워커 스타일이라 조던과 어울리지는 않는다. (굳이 나의 농구 스타일을 NBA 농구 선수에 비교하자면 전 멤피스 선수인 토니 앨런?)


느닷없이 신발 자랑


 그리고 지금도 에어 조던 신발 사는 것은 나의 유일한 사치스러운 취미이기도 하다. 최근 코로나 여파로 나이키에서 행사를 많이 해 신발을 두 켤레나 사버렸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번갈아가며 신을 수 있어 더 좋다. 은퇴한 지 한참 지났지만 그의 이름이 걸린 농구화는 여전히 압도적인 1등이다. 


 스타크래프트 역대 최고의 선수는 이영호이지만 영원한 아이콘은 임요환이다. 아이콘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던은 역대 최고의 선수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아이콘이다. 최고의 선수 타이틀은 언젠가 빼앗길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르브론 제임스조차 조던을 넘지 못했다. 지금 리그에 조던이 아니라 르브론보다 더 큰 업적을 쌓을 선수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 때 마이클 조던이 농구보다 더 유명하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농구의 아이콘은 영원히 그의 몫이다. 이것이 그가 역대 농구 선수 1위인 이유이고, 나의 NBA 선수 소개 첫 번째가 당연히 그여야 하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개인적 경험에 치중해 조던을 복기하는 글을 썼다면 이제는 팩트에 치중해 그의 위대함을 칭송해보자. 앞서 언급했지만 그는 파이널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물론 1980년대는 당대 최고의 팀이었던 보스턴, 디트로이트에 밀려 파이널 무대를 밟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 더 투척한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단 한 번도 업셋을 당한 적이 없다. 낮은 시드의 팀과의 플레이오프 전적 23승 0패다. 변수가 많은 단기전에서 실로 대단한 기록이다.


 1990년대를 시작하며 드디어 첫 우승을 해낸다. 이후 3연속 우승을 이룬다. (참고로 3연속 우승은 빌 러셀의 보스턴 셀틱스 이후 최초였다. 버드도 매직도 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했고, 17개월 만에 I'm back이란 말과 함께 돌아와 또다시 3연속 우승을 달성한다. 첫 은퇴 당시 이미 역대 최고의 선수로 뽑혔던 조던이었다. 그런데 마이너리그 야구 선수로 2년을 활동하더니 다시 돌아와 또다시 3연속 우승을 해버렸다. 전설에서 신화가 된 순간이다. 


 개인 수상도 빛이 난다. 그는 루키 시즌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MVP 투표 5위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평생을 MVP 수상권에서 머물렀다는 이야기다. 그의 기록 내역을 간단히 정리하면 통산 누적 득점 5위(1위 르브론 제임스), 통산 평균 득점 1위, 플레이오프 누적 득점 2위(1위 르브론 제임스) 및 평균 득점 1위, 통산 PER 2위(1위 니콜라 요키치), 통산 MVP 셰어 2위(1위 르브론 제임스), 통산 BPM 2위(1위 니콜라 요키치), 통산 VORP 2위(1위 르브론 제임스), 통산 Win Share 5위(1위 카림 압둘자바), 플레이오프 통산 PER, BPM 1위, Win Share, VORP 2위(1위 르브론 제임스), 역대 파이널 평균 득점 1위(심지어 1992~93시즌 파이널 시리즈에서는 평균 41점을 기록했다.) 등이 있다. 또한 수상 내역으로는 MVP 5회(1988, 1991-1992, 1996, 1998) , 파이널 MVP 6회(1991-1993, 1996-1998) , 올해의 신인상(1985), 올해의 수비선수상(1988), 득점왕 10회, 스틸왕 3회, All NBA First Team 10회, All NBA Defensive First Team 9회, 올림픽 금메달 2회 등이 있다. 그 밖의 기록 및 수상 내역은 생략한다.


 스포츠가 탄생한 이래 그보다 더 많은 감동과 흥분을 안겨준 선수는 없다. 상업주의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 NBA는 미국을 넘어 글로벌 스포츠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과 함께 흑인의 위상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 그가 신었기에 나이키를 신었고 그가 마셨기에 게토레이를 마셨다. 무엇보다 그가 NBA 선수 역대 랭킹 1위가 아닐 이유를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다.




추신 1


 사실 조던이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언론을 잘 활용했고, 자신의 이미지를 가꾸는 법을 알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늘 정장을 착용했고, 어떤 상황이든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워낙에 거물이었던 탓에 조던이 실수를 했더라도 리그 차원에서 목숨을 걸고 보호했을 것이다. 마이클 조던이 곧 NBA였으니깐. 


 조던을 굳이 까자면 리더십이라 생각한다. 조던은 절대 직장 상사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물론 부서나 회사 실적은 확실히 낼 것이다. 능력도 없이 권위적이기만 한 숱한 리더보다는 낫다. 하지만 조던과 같은 상사와 함께 성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무수한 갈굼을 당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팀내 연습 경기조차 전쟁처럼 치렀다고 한다. 영혼의 파트너 스코티 피펜은 선수 생활 시작부터 조던에게 특별 지도(?)를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피펜은 친구라기 보다는 선후배 관계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조던과 사적으로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또한 빌 카트라이트는 절친 찰스 오클리와 트레이드되어 왔다는 이유로 조던으로부터 대놓고 눈빛 광선을 받았고, 온순한 성격의 호레이스 그랜트 역시 조던의 갈굼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두 번째 우승 때 멤버였던 악동 로드맨도 조던에게는 대들 생각조차 못 했다. 또한 스티브 커와 치고받은 일화는 이미 너무 유명하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스티브 커의 대담함과 승부근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는 하다.) 조던은 온순한 동료보다 자기와 치고받을 수 있는 깡을 보여주는 동료들을 더 좋아했던 듯하다. 물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겠지만. 


 하지만 그는 언제나 결과를 내는 데는 탁월한 리더다. 동료들과 사적으로 껄끄럽더라도 우승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는 화합을 중요시했고 팀워크를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우승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와 같은 팀이라는 이유로 시카고의 모든 선수들은 자신의 실제 가치보다 더 높은 시장의 평가를 받았다. 또한 조던과 같은 팀이었고 갈굼을 받았다고 알려진 동료 선수들조차 은퇴 후에 조던이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를 하는 것을 보면 상종 못할 만큼의 성격이 나쁘거나 권위적인 사람은 아닌 듯하다. 


 이쯤 해서 글을 마무리할까 했는데 또 한 명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2000년 드래프트 1순위 콰미 브라운이다. 워싱턴 구단주였던 조던이 직접 뽑은 선수였다. 콰미가 선수로 복귀한 조던과 함께 워싱턴 위저즈의 원투 펀치가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콰미는 원투펀치는커녕 주전 자리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콰미 입장에서 살아있는 전설이자 아버지 뻘인 조던이 참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콰미의 농구 재능은 역대급일지 몰라도 그 재능을 담을 그릇이 작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은퇴 후였나 레이커스 시절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초코 케이크를 들고 도망갔다는 뉴스에 국내 언론에서 초코 콰미라고 조롱하기도 했을 만큼 멘탈이 약했던 선수였다. 이제는 이 선수가 단순히 조던 때문에 성장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신 2


 오래전부터 NBA 농구 선수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사실 글을 썼었다. 중국에서 주말마다 심양과 연길을 오고 갔어야 했다. 고속철로 왕복 9시간이 걸렸다. 와이파이는 안 되고,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끝났고, 신나게 NBA 농구 선수에 대해 글을 썼다. basketball reference와 위키백과, 그리고 각종 뉴스들을 참고 자료로 활용했다. 200명이 넘는 선수들에 대해 멘트를 달았다. 나름 내가 생각하는 레전드 순위대로 순서를 배열했다. 그중 첫 번째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마이클 조던이다. 앞으로 틈나는 대로 NBA 선수 소개 글을 나만의 방식으로 작성해서 올릴 예정이다. 다음 레전드 선수는 카림 압둘자바이다. 그리고 현역 선수 첫 번째는 당연히 르브론 제임스다.


추신 3


 마이클 조던의 마지막 시즌을 다룬 '더 라스트 댄스'를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 90년대 후반 불스와 재즈의 파이널 시리즈에는 1990년대 역대 베스트 5로 뽑히는 선수들 중 무려 4명이 출전한다. 하킴 올라주원을 제외한 마이클 조던, 스코티 피펜(시카고 불스), 그리고 칼 말론, 존 스탁턴(유타 재즈)이다. 2020년대인 지금까지도 충분히 소비될 정도로 시대의 아이콘들이 즐비했던 파이널이었다. 물론 그 중의 중심은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다.


https://youtu.be/HsTQ6H4jNUE






참고 사이트


https://www.basketball-referen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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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ketball Statistics and History | Basketball-Reference.com              

Basketball Statistics and History


www.basketball-reference.com








 https://namu.wiki/w/%EB%A7%88%EC%9D%B4%ED%81%B4%20%EC%A1%B0%EB%8D%98






마이클 조던 - 나무위키              

  동명의 배우에 대한 내용은 마이클 B. 조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마이클 조던의 주요 수상 및 헌액 경력 [ 펼치기 · 접기 ] 스미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 펼치기 · 접기 ] ※ 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재단 스미소니언 의 잡지, 스미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헨리 허드슨 아메리고 베스푸치 존 스미스 조반니 다 베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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