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주말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어보는 것조차 귀찮아서 결국 반찬을 시켰다. 잡채, 순두부국, 배추겉절이, 무생채, 해물파전까지.
기다리는 동안 요즘 넷플릭스에서 무슨 드라마가 있나 검색해 보니, ‘키스는 괜히 해서’가 오늘 드라마 순위 1위로 떠 있었다. 슬의생에서 추민하 역할로 참 사랑스러웠던 안은진 배우, 그리고 ‘나의 아저씨’에서 아이유를 괴롭히던 인상적인 역할의 장기용 배우가 주연이라니, 일단 믿고 보는 조합이다. 나는 드라마를 고를 때 주연 배우가 누구인지 꼭 확인하는 편인데, 두 사람 모두 이전 작품에서 워낙 눈도장 제대로 찍었던 배우라 망설임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주말엔 이렇게 가볍게 즐길 만한 드라마 하나 있으면 참 든든하다. 당분간 마음 편히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생겨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반찬이 도착한 듯해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남편 택배도 하나 있었다. 신발이 든 박스처럼 보여서 나는 속으로 ‘또 신발을 주문했나?’ 하고 생각하며 거실로 가져와 소파 옆에 두었다.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난 남편은 택배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네. 내가 시킨 건 온풍기인데? 이건 너무 가벼워.”
결국 포장을 뜯어 확인해 보니, 온풍기는커녕 낯선 구두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남편 발 사이즈와는 한참 동떨어진 작은 사이즈. 신발상자조차 허술했고, 여기저기 움푹 파인 흔적이 보였다.
“이거 사기 아니야? 온풍기를 주문했는데 신발이 오다니… 뭔가 수상해.”
남편은 즉시 쿠*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배송완료 문자는 왔지만 정작 온풍기는 오지 않았다고 말하자, 잠시 후 배송기사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도 목소리가 큰 편인데, 배송기사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배송이 잘못됐다고요? 그 송장번호 한번 불러보세요.”
초반부터 살짝 눌린 남편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씨… 유….”
“아니요, 그거 말고 숫자요.”
배송기사의 말투엔 미세한 가시가 섞여 있었고,
남편의 표정도 점점 굳어 갔다.
“4***….”
“배송완료 맞잖아요. 그런데 왜 배송이 안 됐다고 고객센터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번엔 아예 남편의 말을 끊고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고,
남편은 참다못해 결국 언성을 높였다.
“아니이—”
그러자 배송기사가 피곤한 듯 확실히 어조를 높였다.
“맞잖아요.”
남편도 지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를 더 세게 몰아붙였다.
“잠시만요. 제 말도 좀 들어보라구요오—”
남편과 배송기사는 서로 자기 말만 하느라, 정작 필요한 정보는 오가질 않았다. 나는 옆에서 ‘남편이나 배송기사나 성격 급한 건 똑같구먼…’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편이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온풍기를 주문했기 때문에, 온풍기가 안 왔다고 한 거예요!”
그러자 배송기사가 단호하게 받아쳤다.
“그러시면 ‘물건은 받았는데, 열어 보니 온풍기가 아니라 다른 게 들어 있었다’고 하셨어야죠. 다짜고짜 물건이 안 왔다고 하면 어떡합니까.”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말이었다. 나는 남편이 또 한 번 버럭 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예… 알겠습니다.”
남편은 화를 억누르며 억울함을 잔뜩 실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방금 배송기사가 말한 대로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싱크대에서 설거지 물을 틀어놓고 있었기에 통화 내용을 자세히 듣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남편의 짜증 섞인 외침이 들렸다.
“에잇, 젠장! 신경질 나! 환불해 준다면서, 신발은 내가 알아서 버리래. 에잇, 에잇, 에잇!”
화가 잔뜩 난 남편은 신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상자에서 꺼냈다. 나는 혹시 모르니 물건을 보낸 사람에게도 한 번 전화해 보라고 했다.
남편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더니,
“전원 꺼져 있대. 아, 진짜….”
하며 또 구시렁거렸다.
“주말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월요일까지 기다려보고, 연락되면 회수하라고 하고, 안 되면 그냥 버리면 돼.”
나는 최대한 평온하게 말했다. 잠시 후 남편이 다시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 배송기사는 왜 나한테 화를 내? 내가 뭐 잘못했는데?”
“그러게. 그냥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받았다고 생각해. 근데 있잖아… 내가 보기엔 둘 다 비슷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둘 다 목소리 엄청 크고, 둘 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하면서 큰소리치고… 정작 필요한 말은 하나도 안 들리더라.”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진짜, 어떻게 구두를 보낼 수가 있어? 가끔 이렇게 엉뚱한 물건 넣어서 사기 치는 업자들도 있다잖아. 쿠*에서 환불해 준다니 그나마 다행이지.”
나는 남편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어 일부러 화제를 업자 쪽으로 돌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배송 기사는 잘못이 없다. 그저 송장 번호대로 물건을 전달했을 뿐이다. 그래서 억울한 사람은 남편, 배송 기사 둘 다일지도 모른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했는데, 오늘 두 남자는 서로 누가 더 큰 목소리를 내는지 은근히 겨루는 사람들 같았다. 대부분의 다툼은 말 자체보다 말투에서 시작된다. 사소한 일도 말이 감정을 등에 업고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뜻밖에 큰 말다툼으로 번지는 건 당연지사. 특히 상대를 직접 마주보지 않고 전화로 의사를 전달할 때는 말의 내용보다 말투가 더 선명하게 들려 오해가 빠르게 쌓이고 상황이 금세 변질되곤 한다.
솔직히 두 남자의 통화를 듣고 있자니, 예전에 즐겨 보던 ‘가족 오락관’의 귀 막고 말 전하기 게임이 절로 떠올랐다. 서로 소리치기만 하고, 정작 전해져야 할 말은 하나도 전달되지 않는 그 게임.
나는 그 정도로 대화가 마무리된 것만으로도 두 사람 모두에게 감사했다. 이토록 힘든 세상에서,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잠깐의 오해로 상처를 주고받는다면 그보다 더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마주칠지 모르는 세상이다. 그러니 이 일은 빨리 잊히고, 배송기사님과 남편에게는 또 다른 좋은 일들이 일어나 이 작은 소동을 잊어버리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