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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아 May 08. 2022

아마도 취해있었지.

2022.05.06

정확히 열흘이었다. 열흘 동안 나는 병원에서 먹고 자고를 했다. 하필이면 내가 입원을 결정한 그날. 병원 병실이 남아있지 않았던 까닭에 아동 병동으로 들어간 나는, 밤낮으로 아이들의 우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타인에게 들리지 않겠지만 내 안에 내가 울부짖는 소리로 충분히 가득 차 있는데, 불난 곳에 기름 붓는 격으로 타인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만 같았다. 병실을 몇 번이나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병실이 없다는 죄송한 말뿐이었다. 그래서 기왕 괴로울 바에 더 괴로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병원 안에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원초적인 방법. 밥을 먹지 않는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주치의 선생님은 그런 나를 걱정하며 1000kcal 영양제를 내 몸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밥이 들어가지 않자 몸이 응급상황이라고 인지했는지, 주사를 꽂아 놓은 혈관들이 모두 터지기 시작했고, 월경을 할 기간이 아닌데 부정출혈까지 일어나 산부인과와 협진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망가져 가고 있었다. 망가져가는 나를 보며 미치광이 여자처럼 스스로 흡족해했다. 그리고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그 한계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다해 나를 망가뜨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별안간. 정말 별안간이었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병원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잔인하게 느껴졌다. 어린이도 아닌 주제에 5월 5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다를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주치의 선생님께 집에 가면 밥을 잘 먹겠다고 거짓말을 하며 퇴원을 요청했다. 주치의 선생님은 언제든 병원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몸 상태가 되면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다행히 내 말을 믿어주셨다. 그렇게 나는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5월 4일 집으로 돌아왔다. 


5월 5일 남편과 바다를 보고 온 뒤, 5월 6일 나 홀로 첫 외출이었다. 창밖에 완연한 봄을 흉내라도 내야 할 것 같아서 에메랄드빛 카디건과 베이지색 치마를 주섬주섬 걸쳐 입고 나왔다. 퇴원 이후에도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 서 있을 기운은 없었지만 새로 바꾼 바디로션의 향기가 내 코끝을 휘감아서 기분은 좋았다. 약간 어질어질한 것이 조금은 취한 것 같은 묘한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대낮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 또 비틀 거리를 걸었다.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나는, 그렇게 거리를 걸어 정확히 5시에 철문을 열고 비밀의 양탄자로 들어섰다.

선생님은 나에게 병원 생활이 어떠했는지 물었다. 나는 무슨 개똥 자신감으로 밥을 잘 먹지 않은 이야기, 그래서 혈관이 자꾸 터진 이야기, 터져가는 혈관들을 보면서 희열을 느낀 이야기 등 변태스러운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린이날에 남편과 오랜만에 데이트로 바다를 보고 와서 기분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러다 갑자기 죽고 싶다고 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이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죽음에 대한 1g의 용기가 없어서 죽음 대신 고통스러운 삶을 선택해 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죽지 못하는 겁쟁이, 겁보, 비겁하고 비열한 인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선생님은 할 수만 있다면 죽고 싶어 하는 나를 붙들어 보호해주고 싶다고 했다. 아마 남편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나의 죄책감을 툭! 하고 건드렸다. 


그리고 그 이후 선생님과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정확히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상담을 진행하려면 잘 먹고, 잘 자는 상태여야 하는데 나는 그게 지금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어릴 적 따돌림을 당했던 이야기, 부모님 하면 떠오르는 느낌 등 여러 이야기였다. 앉아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내내 나는 취한 사람처럼 머리는 핑핑 돌았고, 눈은 무겁게 감겼다 떠졌으며, 할 수만 있다면 소파에 눕고 싶었고, 그대로 쓰러져 자고 싶었다. 죽고 싶다는 마음으로 망가져있는 나에게 더 이상 남은 기력이 없었다. 선생님은 더 이상 당신의 말이 내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오늘 딱 두 가지만 기억하라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는 것'과 '너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를 일기에 꼭 쓰라고 일러주시고 또 일러주셨다. 

하라면 하라는 대로 착실하게 이행하는 고분고분 착한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일기장에 빨간 펜으로 두 가지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빨간색으로 적힌 짧지만 굵은 한 줄의 문장을 보자니 슬퍼지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닌 이 한 문장. 이 한 문장이 뭐라고 나를 슬프게 했다. 내 잘못도 아닌 일들로 나는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유령처럼 살고 있으니 참 개탄스러운 일이다 싶었다. 그리고 머리로는 이해되는 이 문장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아 답답한 이 심정을 어찌하면 좋을지 도무지 감당이 안되어 온 집안을 방방 뛰며 헤집고 다녔다. 일기장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이 나란 인간의 실체였다.


아마도 취해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죽음에 취해있어서 집에 돌아와 그 한 문장에 그토록 격분했을 것이다. 조금 살만해진 지금의 나는, 그 문장이 언제 나를 격분시켰냐는 듯이 무덤덤한 것을 보니 말이다. 그러니 다음 상담 때에는 밥도 좀 먹고, 잠도 좀 자고 가야겠다. 그래서 취한 모습이 아닌 조금은 정돈된 모습으로 비밀의 양탄자로 걸어 들어가야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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