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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아 Jun 30. 2022

나라는 존재.

2022.06.24

이 날 선생님은 내가 가진 거짓 신념을 깨뜨리려고 나에게 싸움을 걸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내가 후원하고 있는 보육시설의 아이의 이름 뒤에 '00이는 버려진 아이인가요? 존재만으로 빛나는 아이인가요?'라고 질문을 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00이는 존재만으로 사랑스럽고 빛나는 아이예요.'라고 했다. 선생님은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가 무슨 존재만으로 사랑스럽고 빛나는 아이냐며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00이가 얼마나 빛나는 아이인 줄 알기 때문에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꿀떡 삼키어내며 '00이는 버려졌어도 빛나는 아이'라고 대답했다. (선생님과 싸움 아닌 싸움을 하는 중에 00이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눈물이 왈칵 날 것 만 같았다.)


한바탕 논쟁(?)을 마치고 선생님은 체중을 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날의 내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전달하기 시작했다. 

"00이가 그러하듯 은아씨도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체중 실린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마음에 아주 조금도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는 말... 그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내가 아끼는 00이도, 나도, 그리고 내 앞에 선생님도 존재만으로 충분히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임을 알겠는데, 마음속으로는 '나는 아니야'가 거의 반자동적으로 튀어나왔다.


왜 그럴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타인들에게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각인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다. 성과를 이루어내어야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준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많은 성과들을 이루어냈다. 실제로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이루어낸 성과들로 나를 인식했다. 나의 성과를 부러워하고, 칭찬해주었다. 나의 성과를 인정해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런데 어딘가 늘 마음이 허했다. 그것은 나의 성과가 아닌 '나'라는 존재,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공감해주는 이가 없음에서 오는 공허함이었다. 일단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나 자신부터가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관심이 없었다. 즉 내 마음을 내가 잘 돌보지 않았다. 그렇게 내 마음을 잘 돌보지 않고 겹겹의 갑옷을 입고 또 입어가며 생활하다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한계치에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고 만 것이다.


"선생님. 저는 지금까지 갑옷을 입지 않고 살아본 기억이 없어요. 이제 그만 우울이라는 늪에서 다시 일어나고 싶은데..... 그러려면 다시 갑옷을 입어야 하잖아요. 그 갑옷을 입은 채 사는 날들이 얼마나 지끈거리는지 잘 알기에 일어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지금처럼 우울의 늪에 몸을 맡기고 누워있는 게 훨씬 좋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무릎을 탁 치며 말씀을 이어갔다.

"그거예요. 지금까지 내 자아가 단단하지 못해서 갑옷을 입고 -척하면서 살았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작업들이 그리고 앞으로 할 작업들이 은아씨의 자아를 단단하게 하고자 하는 거예요. 갑옷 없이도 일어날 수 있게, 갑옷 없이도 살 수 있게,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은아씨가 마음에서 받아들이게. 그렇게 진짜 내가 단단해지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그럼 갑옷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돼요. 갑옷으로 인해 단단한 내가 아니라 진짜 내가 단단한 은아씨가 되는 거예요."


선생님의 말씀이 구구절절 옳았다. 나는 생각했다. 선생님과 함께 나누는 이 시간들과 대화가 나를 진짜 단단하게 만들어 줄까? 진짜 갑옷없이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럼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까? 여러 가지 기대되는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가 기다려지고 기대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이번 상담이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매일의 숙제를 내주셨다. 아침에 일어나서 감사한 것 5가지, 저녁에 자기 전에 감사한 것 5가지를 매일 카톡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너무 많다고 투덜거리자 5개에서 3가지로 줄여주셨다. ^^;;


오늘도 우울과 불안한 내가 감사거리를 찾으러 어슬렁어슬렁 내 삶 주변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감사거리를 찾으면 놓치지 않고 핸드폰에 기록한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 선생님께 카톡을 보낸다. 어쩔 땐 감사거리를 찾으러 돌아다니느라 우울한 것을 잊기도 하고, 어쩔 땐 너무 우울해서 감사거리 따위 개나 줘버리라며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는 지금 여기에 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마음으로, 다시 걸음마를 배우는 마음으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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