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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아 Aug 20. 2022

자유로울 자유.

2022.07.28

나는 침습적인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기 위해 매일 상담 선생님에게 아침 감사와 저녁 감사를 카톡으로 보낸다. 상담 선생님은  카톡 내용을 보고 내담자인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짐작할  있다. 그리고  목록  어떤 것은 그다음 상담에서 다뤄야  토픽이 되기도 한다. 이번 상담에서 선생님은 나의 감사 목록을 보고 무슨  일이 그리 많으냐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고 보니 나의 감사 목록에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장애 공감 PPT 자료 다 완성한 것 감사'

'9월 강의 자료 초안 완성한 것 감사'

'2학기 교육과정 재구성 완성한 것 감사'

선생님께 감사 목록을 보낼 때는 몰랐지만, 목록들을 모아놓고 보니 무엇인가를 다 해냈을 때 감사를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감사 목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누가 시켜서 많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유형의 사람인 것이다. 마치 피터 레이놀즈의 그림책 '나 하나로는 부족해'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래서 일주일 치 해야 할 일을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그 적어둔 것을 클리어하면서 하루하루를 산다. 만약 그날에 해야 할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오늘 하루를 잘 못 산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하루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다음날 일까지 미리 해놓은 날에는 오늘 하루를 잘 살았다는 벅참과 뿌듯함이 올라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MBTI 성격유형 검사에서 나는 J형이 아닌 P형으로 나온다는 것!)


"은아씨, 지금 방학이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아도 괜찮지 않아요?"

"안돼요. 저는 쉴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일하지 않으면 다이어리가 오염되는 것이 싫어요."

"오염이요?"

"네, 그날 해야 할 일에 체크가 안되면 다이어리가 오염되는 것 같아요."

"은아씨는 스스로를 너무 옥죄는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약간의 강박이 있다. 예를 들자면 시간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시간 강박과, 그날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강박이다.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내 하루가 '오염'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럼 자연스레 부정적인 생각이 침습해오고, 부정적인 사고 공장이 마구 돌아가게 된다. 그럼 저녁에 잠이 충분히 오지 않고, 다음날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전날 다 이루지 못한 일을 하기도 한다.  

선생님과 이 부정적 굴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강박 공장을 멈추게 하는 말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무의식의 나는 늘 '안 괜찮아' '충분하지 않아'라는 부족의 언어로 나를 채찍질하기 때문일까? 선생님께 들은 '괜찮아요'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한참의 시간의 흐른 뒤, 이 날 상담이 마무리될 때쯤 돼서 선생님은 숙제 하나를 내주셨다. 상담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오늘 할 일을 아직 다 못했어도 하지 않기! (내 표현을 따라) 다이어리를 오염시켜보는 경험 해보기.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 하지 않고, 기아 야구 경기 보면서 저녁 먹기를 실천해보라고 구체적으로 일러주셨다. 나는 결국 이날 다이어리를 오염시키고, 기아 야구 경기를 보면서 오징어 다리를 뜯었다. 다이어리에 적힌 해야 할 일들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이다. 야구 경기를 보면서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그때마다 '괜찮아'라는 말로 불안한 마음을 풀어주었다.


한 번의 경험으로 완전히 사람 습성이 고쳐지지 않을 터.... 다음 날부터 나는, 다시 다이어리를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그날의 일을 해댔다. 그래도 상담을 다녀온 날 '오늘 해야 할 일을 꼭 하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네?'라는 경험을 한 것이 참 만족스럽다. 그날 이후로 오늘 해야 할 일을 너무 빡빡하게 작성하지 않고, 가끔 한 두 가지 일은 다음 날로 미루려는 노력도 조금씩 해보고 있다. 즉 일을 80% 정도 해놓고 나머지 20%는 내일로 남겨둬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 다이어리가 오염되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불쾌감이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면서 자유로움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본다. 자유로울 자유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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