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8
나는 침습적인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기 위해 매일 상담 선생님에게 아침 감사와 저녁 감사를 카톡으로 보낸다. 상담 선생님은 그 카톡 내용을 보고 내담자인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록 중 어떤 것은 그다음 상담에서 다뤄야 할 토픽이 되기도 한다. 이번 상담에서 선생님은 나의 감사 목록을 보고 무슨 할 일이 그리 많으냐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고 보니 나의 감사 목록에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장애 공감 PPT 자료 다 완성한 것 감사'
'9월 강의 자료 초안 완성한 것 감사'
'2학기 교육과정 재구성 완성한 것 감사'
선생님께 감사 목록을 보낼 때는 몰랐지만, 목록들을 모아놓고 보니 무엇인가를 다 해냈을 때 감사를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감사 목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누가 시켜서 많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유형의 사람인 것이다. 마치 피터 레이놀즈의 그림책 '나 하나로는 부족해'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래서 일주일 치 해야 할 일을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그 적어둔 것을 클리어하면서 하루하루를 산다. 만약 그날에 해야 할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오늘 하루를 잘 못 산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하루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다음날 일까지 미리 해놓은 날에는 오늘 하루를 잘 살았다는 벅참과 뿌듯함이 올라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MBTI 성격유형 검사에서 나는 J형이 아닌 P형으로 나온다는 것!)
"은아씨, 지금 방학이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아도 괜찮지 않아요?"
"안돼요. 저는 쉴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일하지 않으면 다이어리가 오염되는 것이 싫어요."
"오염이요?"
"네, 그날 해야 할 일에 체크가 안되면 다이어리가 오염되는 것 같아요."
"은아씨는 스스로를 너무 옥죄는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약간의 강박이 있다. 예를 들자면 시간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시간 강박과, 그날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강박이다.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내 하루가 '오염'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럼 자연스레 부정적인 생각이 침습해오고, 부정적인 사고 공장이 마구 돌아가게 된다. 그럼 저녁에 잠이 충분히 오지 않고, 다음날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전날 다 이루지 못한 일을 하기도 한다.
선생님과 이 부정적 굴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강박 공장을 멈추게 하는 말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무의식의 나는 늘 '안 괜찮아' '충분하지 않아'라는 부족의 언어로 나를 채찍질하기 때문일까? 선생님께 들은 '괜찮아요'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한참의 시간의 흐른 뒤, 이 날 상담이 마무리될 때쯤 돼서 선생님은 숙제 하나를 내주셨다. 상담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오늘 할 일을 아직 다 못했어도 하지 않기! (내 표현을 따라) 다이어리를 오염시켜보는 경험 해보기.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 하지 않고, 기아 야구 경기 보면서 저녁 먹기를 실천해보라고 구체적으로 일러주셨다. 나는 결국 이날 다이어리를 오염시키고, 기아 야구 경기를 보면서 오징어 다리를 뜯었다. 다이어리에 적힌 해야 할 일들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이다. 야구 경기를 보면서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그때마다 '괜찮아'라는 말로 불안한 마음을 풀어주었다.
한 번의 경험으로 완전히 사람 습성이 고쳐지지 않을 터.... 다음 날부터 나는, 다시 다이어리를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그날의 일을 해댔다. 그래도 상담을 다녀온 날 '오늘 해야 할 일을 꼭 하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네?'라는 경험을 한 것이 참 만족스럽다. 그날 이후로 오늘 해야 할 일을 너무 빡빡하게 작성하지 않고, 가끔 한 두 가지 일은 다음 날로 미루려는 노력도 조금씩 해보고 있다. 즉 일을 80% 정도 해놓고 나머지 20%는 내일로 남겨둬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 다이어리가 오염되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불쾌감이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면서 자유로움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본다. 자유로울 자유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