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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아 Aug 27. 2022

살기로 한다.

2022.08.04

정말 죽음 이후에 無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곧장 죽음의 세계에 발을 들였을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이 찢어질 듯한 살아있음이란 고통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내가 죽음의 욕구를 자주 느낀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내가 감당해야 할 짐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 같아서, 주변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는 게 싫어서 말이다. 

상담을 받기 전 날도 아끼고 아끼는 언니들을 만나 밤이 깊도록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그 언니들에게 '내가 요즘 얼마나 마음이 힘든지, 죽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자주 드는지' 이야기했는지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선생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까 봐 현재 상태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다가, 나중에 나의 죽음을 현실화시켰을 때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만약에 나에게 한 가지 초능력을 주신다면 은아씨가 잘못된 선택으로 죽음을 선택했을 때 은아씨가 은아씨의 장례식을 직접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할 거예요."

아니, 하나님이 딱 한 가지의 초능력을 주시는데 이렇게 하찮은 데에 그 소원을 써버린다고? 나는 의아했다. 그러나 선생님과 대화를 이어갈수록 선생님의 마음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죄송하고 또 감사했다. 하찮은 소원이 아니라는 것도 마음으로 느껴졌다. 

선생님은 죽음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라고 하셨다. 나는 죽음으로 고통을 끝내버렸지만 남겨진 이들에게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시작이며, 그 시작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일이라고...... 선생님의 말씀대로 내가 그 죽음을 실천에 옮겼을 때 나의 장례식장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나를 아껴주는 이들이 내 장례식장에 어떤 모습으로 와 있을지도 함께. 상상하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편이 조금 더 솔직하겠다. 그 까닭은 나를 아껴주는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간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우울증을 앓고 나서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이 더 강해졌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우울이 나를 덮쳐올 때 나의 사고 회로는 곧장 죽음으로 뛰었다. 자주 사용하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빨라지는 것처럼 죽음의 회로는 점점 더 넓어지고 빨라졌다. 

그런데 선생님의 질문을 받고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라는 사람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면서까지 선택해야 할 만큼 의미가 있을까.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게 복수가 될 만큼 의미가 있을까. 물론 침습적으로 몰려드는 죽음에 대한 사고를 내가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선택은 내가 할 수 있다. 오늘도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위해 살기로 결정한다. 나를 어제보다 오늘 더 조금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기로 결정한다. 그러다 보면 넓어지고 빨라진 죽음의 회로도 점차 좁아지고 천천히 흘러가겠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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