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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아 Oct 04. 2022

내 안의 분노.

2022.09.22

"선생님. 다음 상담 때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잊을까 봐 메시지 남겨요. 제가 불안하면 저를 해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이번 주 내내 저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마음을 조금 더 찬찬히 살펴보았어요. 그랬더니 분노가 쌓이면 저를 해치고 싶어요. 마음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쌓여있어요. 마음이 얽히고설킨 것 같아요."


일요일 저녁. 나는 선생님께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은 나의 메시지를 보고 왜 분노라는 감정이 올라오는지, 언제 그 감정이 올라오는지를 잘 살펴봐 달라고 요청하셨다. 그래서 나는 다음 상담이 있을 때까지 왜 내 안에 분노라는 감정이 이렇게 쉽게 올라오는지, 그 분노라는 감정의 근원은 어디인지 샅샅이 마음속을 파헤쳤다. 마음을 파헤칠수록 아픈 과거들이 자꾸 떠올랐고, 수면 아래 잘 감춰두었던 감정들이 자꾸 고개를 쳐들어서 유난히 힘든 한 주를 보내고 상담실에 찾았다.


선생님은 어떤 생각이나 어떤 일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지 관찰한 것을 말해달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입에서 '분노'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나는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 그네를 탄 것 마냥 앉아있는 자리가 뱅뱅 도는 것 같았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나는 정말 크나큰 용기를 내어 내 생에 최고의 분노를 느꼈던 사건에 대해서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 일들을 내 입 밖으로 꺼내는 것들이 두려웠다. 그래서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채 작은 몸을 내내 떨었다.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은아씨, 내가 지금 왜 분노하고 있는지 알아요?"

"제가 멍청해 보여서요."

"아니! 틀렸어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맹세해요. 은아씨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제가 지금 화가나는 이유는 은아씨가 자라면서 만난 어른들이 하나같이 다 어른답지 못해서 화가 나요. 그리고 답답해요. 상담자로서 은아씨에게 어떤 말을 건네줘야 좋을지 몰라서 마음이 답답해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된다고 말하는 은아씨에게 어떤 말이 마음에 가 닿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너무 답답해요."

"....................."


선생님의 따뜻한 분노에 차갑게 얼었던 마음이 조금은 녹는 듯했다. 분노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하여 분노해주는 선생님이 고마웠고, 아무 반응하지 않았지만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선생님에게서 안도를 얻었다. 그런데 순간! 선생님의 말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휘휘 저어 불순물이 다 떠오른 더러운 내 마음속이 들여다 보였기 때문이다. 떠오른 불순물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들이 다시 가라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이것들이 가라앉도록 두는 것이 최선일까. 떠오른 불순물들을 건져내 버리는 방법은 없을까. 그럴 수는 없는 걸까. 저 떠다니는 더러운 불순물들을 건져내고 나면 나는 정말 행복해질까. 거짓으로 괜찮은 척, 안온한 척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걸까. 그때였다. 짧았지만 아주 작은 말소리만이 들리던 중력 같은 시간에서 온 몸의 세포가 깨어나며 다시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크게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줘서 고마워요. 이제 그 지옥에서 나와요. 그 지옥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은아씨만이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는 은아씨가 지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단 한! 발! 자! 국! 도! 뒤로 물러 설 생각이 없어요."

울컥하는 무언가가 내 목구멍을 뜨겁게 했다. 그러나 나는 울 수 없었다. 그래서 살아남아줘서 고맙다는 선생님의 따뜻한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그 말이 자꾸 귓가에 그리고 마음에 맴돈다. 살아남아줘서 고맙다는 말. 지옥에서 이제 그만 나오자는 말. 그것은 오직 나만 할 수 있다는 말. 그리고 선생님이 지지해주고 있다는 말.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 서지 않겠다는 말. 온통 냉기로 가득했던 가슴에 아주 작은 성냥불 하나가 켜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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