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의 리무(Limoux) 역 앞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얀과 쥐스틴 부부를 만났다.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양을 키우고, 양젖으로 만든 치즈와 요구르트를 생산하는 이들이었다. 농장에 머물며 주인 부부의 일을 돕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기로 사전에 합의해 놓은 상태였기에, 지체 없이 출발했다. 농장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니, 동물 우리나 목장뿐 아니라 양젖을 짜는 공간, 식품을 만드는 작업실, 치즈 창고 등이 두루 조성돼 있었다. 주력 상품은 양젖이지만 양 이외에도 말, 흑돼지, 닭, 거위 등 갖은 종류의 동물들을 키웠다.
쥐스틴이 내가 쓸 방을 안내했다. 본가에 딸린 창고를 개조한 방이었다. 널찍하고 푹신해 보이는 침대를 보는 순간, 절로 탄성이 나왔다. 요 며칠간 길바닥이며 벤치, 야간 버스에서 마음을 졸이느라 한시도 푹 잠든 적이 없어서인지, 내가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이미 노숙의 어려움을 체감한 이상, 어떤 유형의 잠자리든 길바닥보다는 나았다.
도착한 날에는 양에게 먹이를 주고 정원에 심긴 작물들에게 물을 준 뒤 일과를 마쳤다. 고기 통조림과 샐러드로 간단히 식사하는데도 놀라울 만치 맛이 좋았고, '나만의 공간'(드디어!)에서 푹 잠들 수 있었다. 오랜만에 샤워를 한 것 역시 감격스러웠다. 그새 대범해졌는지 어떠한 상황에서든 걱정하는 법이 없었고, 그 대신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게 됐다. 히치하이킹에 실패해 노숙하든, 낯선 농장의 창고에서 생활하든 마음이 평온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며, 하루하루를 잘 보내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얀과 쥐스틴의 농장에는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동갑내기 청년이 한 명 더 있었다. 이름은 에쉴리. 영국에서 온 그는 라틴어 전공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으며, 대학원 진학 전에 프랑스어 연습도 할 겸 시골 생활을 즐기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일전에 염소 농장에 머물며 사육 작업을 익힌 경험이 있어서인지 일하는 게 제법 익숙했다. 프랑스어도 곧잘 구사했던 에쉴리는 낯섦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내게 농장 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을 아낌없이 제공해 주었다.
동물을 키우려면 동물보다 부지런해야 한다
농장의 기상 시간은 새벽 여섯 시 십오 분. 삼십 분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다 함께 차를 마시며 잠을 깬다. 이후 쥐스틴과 얀은 양들에게 아침먹이를 주고 젖을 짠 뒤 들판으로 내보내고, 나와 에쉴리는 닭과 거위들에게 모이를 주러 간다. 먹이를 주는 김에 닭장을 청소하고 그날 생산된 달걀을 꺼내 오기도 한다. 먹이통을 채우는 동안 얌전히 대기하고 있는 닭들과는 달리, 거위들은 꽤 공격적이다. 자칫하다간 쪼일 수도 있다. 이미 한 번 쪼인 적이 있는 에쉴리가 난색을 표하며 조언했다.
거위들의 모이통을 채우고 물통을 갈아주는 임무를 수행하고 나면, 치즈 창고로 가서 숙성되고 있는 치즈들을 뒤집은 뒤 헝겊으로 겉면을 닦아준다. 창고에 저장된 치즈들은 새까만 곰팡이가 빽빽이 들어찰 정도로 진하게 숙성되는데, 곰팡이가 난 치즈는 막 생산된 것보다 강한 향이 난다. 양젖 짜기를 모두 마친 양들이 바깥으로 나가면, 양들이 지나다니며 흩어 놓은 건초들을 빗자루로 쓸어 우리에 넣고, 새로운 건초를 깔아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 준다. 양들이 먹다 남은 건초들은 수거하여 말의 먹이로 주는데, 보통 양들이 부드러운 부분을 골라 먹은 뒤에 남은 것들을 말들에게 먹인다.
말에게 아침먹이를 주고 난 후에는 대개 우리의 아침 식사가 시작된다. 식사는 유기농 빵에 꿀이나 초콜릿 크림, 무화과나 자두로 만든 잼 또는 버터를 곁들여 먹는데, 일을 마치고 나면 몹시 허기가 져 늘 많은 양을 허겁지겁 먹게 되었다. 동물을 사육하려면 동물보다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은 익히 들어왔는데, 막상 겪어 보니 동물보다 부지런하게 산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양들이 깰 때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늘 안위를 돌보고 먹이를 챙겨야 하니. 얀과 쥐스틴은 농장에 설치된 기계를 이용하여 암양의 젖을 짰고, 이후 널따란 목초지로 내보내 자유롭게 풀을 뜯도록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하는 일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고 때에 따라 필요한 일을 했다. 흑돼지에게 먹이를 주거나 양 우리에 밀짚을 깔고, 때로는 작은 밭에 난 잡초를 뽑았다. 점심을 든 뒤에는 저녁이 될 때까지 딱히 도울 일이 없기에 푹 쉬지만, 초저녁이 되면 들판에서 우리로 돌아올 양들의 먹이를 준비해야 한다. 먹이로는 대부분 건초를 주나, 물에 불린 콩과 귀리, 빵가루를 섞은 특식을 먹이기도 한다. 우리로 돌아온 양들은 얀과 쥐스틴이 정해 놓은 기준에 따라 서로 다른 우리에 분류되고, 암양이 대부분인 우리에 수양을 풀어 번식을 촉진한다. 수양들이 암양들과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그들만의’ 우리로 배치된다. 농장에서 갓 태어난 어린양들은 호기심이 무척 많아, 내가 우리에 들어갈 때마다 옷을 핥거나 질겅질겅 씹으며 주위에 머물러 있었다.
양치기 개 엘리엇과 모카가 양들을 모는 건 굉장한 구경거리이다. 농장에서 양몰이를 하도록 특별히 훈련받은 두 개는 양 무리의 맨 뒤쪽에서 유유히 걸어가다가, 쥐스틴의 명령이 떨어지면 특정 방향으로 양들을 몰아간다.
또 다른 개 루피아는 다른 개들에 비해 몸집이 크나 무척 순한 성격의 소유자로, 종일 양들과 함께 지내며 들판의 보디가드 역할을 맡았다.
양들을 들판에서 데려오는 쥐스틴을 따라갔다가 양 무리 한가운데에 갇혔는데, 샌들을 신고 있던 맨발이 요동치는 양들의 발굽에 밟혀 몹시 아팠다. 결국, 신발 뒤축에 달린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쥐스틴이 조용히 말했다.
농장 곳곳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심겨 있고, 한구석에는 작은 뜰도 있었다. 뜰에는 토마토, 호박, 산딸기 등 다양한 작물들이 있는데 매일 한 번씩은 꼭 물을 주어야 한다. 모든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아홉 시가 훌쩍 넘고,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한 뒤 잠자리에 든다. 농장의 하루는 느려 보이지만, 시간은 빨리 간다. 금방 아침이 오고 저녁이 된다.
(*) 얀과 쥐스틴의 농장을 알게 된 건, 우프(WWOOF, World-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 네트워크를 통해서였다. 우프란 유기농 농장에서 일손을 도와주는 대신 숙식을 지원받길 원하는 사람들과 농장주를 연결해 주는 네트워크로, 현지인의 삶에 깊이 녹아들 수 있는 모종의 여행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우핑(Wwwoofing, 우프를 이용한 여행)을 하면 비교적 한곳에 오래 머무르게 되고, 보통 시골 지역에서 생활하다 보니 관광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문화에 있는 그대로 녹아들거나 그 나라 고유의 생산품 혹은 생산 공정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다는 이점을 지닌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여행 방식이 아니어서인지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여행을 이어가는 게 낯설었지만, 막상 시도해 보니 유럽에는 에쉴리처럼 휴가를 맞아 자진해서 시골로 들어가는 젊은 여행자들이 상당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