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니나 Nov 20. 2022

영국 친구 하이디


“너와 함께 캠프 스텝으로 일할 친구가 곧 도착할 거야.”     


미라 그리고 스테파니아와 함께 새로운 친구를 맞이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아직 생경한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을 그녀에게 밝고 환한 얼굴로 다가가리라고 다짐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친구의 이름인 ‘하이디’를 종이에 크게 적어 들고선 출구를 나서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폈다. 큼지막한 빨간 배낭을 아무렇게나 멘 금발 소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기다리던 하이디였다.    

 

영국에서 온 하이디는 나의 시칠리아 생활을 한층 더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한방을 쓸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일과를 함께 했는데, ‘이렇게 잘 맞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향이 비슷했다. 지금껏 잘 맞는다고 생각한 사람 중에서도 최고로 잘 맞았다. 하다못해 식탁보를 함께 터는 사소한 일을 할 때조차 웃음을 멈추지 못해 스테파니아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나올 정도였다. 하이디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활발한 내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줄 수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 처음이라던 그녀는 내가 지금껏 여행해온 이야기를 경청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내게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조언을 청했다.   



하이디와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

  


영국인의 본토 발음을 실제로 듣는 건 처음이었기에 대화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미국식 발음에만 익숙해진 나머지 하이디가 물을 달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세 번씩이나 되물었다. 보통 미국식으로 ‘워러(water)’라고 발음하는 물을 하이디는 ‘와터’라고 발음했다.     


"물 좀 줘." "뭐라고?" "물 좀 줘." "미안한데 다시 한번 말해 줄래?" "물 좀…"     


그러나 하이디는 내가 종종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나무라거나 답답한 기색을 띠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한국어를 못하는데, 너는 영어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어 대단하다"며 격려해 주었다.



너무나 잘 맞았던 우리



아이들이 뛰놀던 어느 한가로운 오후, 나와 하이디는 각자 편안하게 자리 잡고 앉아 휴식을 취했다. 무심결에 내 발톱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하이디가 질겁한 기색을 드러냈다.     


“너, 발이 왜 그래?”  


스페인에서 약 40일 동안 900km 가까이 걸은 이후, 안에서 차올랐던 피가 빠지지 않아 거무튀튀한 색으로 변하거나 아예 신경이 죽어버려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발톱이 많이 생겼다. 발 상태가 말이 아닌 건 알고 있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기에 가볍게 웃어넘겼다. 돌연 하이디가 대야에 따뜻한 비눗물을 담아오더니 발을 담그게 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어떻게 손질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내 발을 정성스레 씻겨주고선 신경이 죽어버린 발톱들을 정리해 주었다. 누군가로부터 이처럼 융숭한 대접을 받는 건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러운 한편,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닦아주는 하이디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캠프가 끝난 직후에 바로 이어가야 하는 일정이 있었던 하이디는 나보다 앞서 시칠리아를 떠났다. 허전한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함께 지내던 방으로 들어오는데, 그녀가 놓고 간 편지가 눈에 띄었다. "수, 넌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 주었어. 이렇게 많이 웃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네가 지금까지 해온 삶의 경험에 감명받았어. 계속 연락을 이어가자." 



하이디가 써준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