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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달수 Oct 03. 2020

시작은 뭘까?

글모임 엮기와 풀기에서 쓴 글을 올립니다. 첫글감 '시작을 대하는 마음'

시작이 반이면 너는 왜 항상 반만 쳐하니 짱구 보고 배운 게 그거니.


 - 류정란 ‘이태원 클라쓰 힙합버전' 중


 한국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하기도 했다(레스형...). 시작은 정말 반일까? 시작은 뭐지 그럼? 내가 위에 적은 유튜버 류정란*의 가사를 무척 공감하며 좋아하는 이유는 난 노캡으로다가 시작한다고 해놓고 반만 쳐하기 때문이다. 시작만 해놓고 끝은 보지 않은 수많은 일들이 지금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뭐 그래, 시작이라도 하면 어디야. 
*유튜버 류정란은 현재 용산 CGV에 무단 침입해 사과문과 함께 자숙 중입니다. 이 글은 그 일이 있기 전 2020년 5월 20일 '엮기와 풀기' 드라이브 폴더에 쓴 글이라 이 부분의 원문을 수정 없이 옮기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난 무엇을 시작할 때 생각을 깊게 하지 않는 편이다. 일상을 예로 들면 방청소를 시작하는 것도 ‘오늘은 청소를 해야지 룰루랄라~’라고 미리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발에 먼지 덩어리가 밟히거나 떨어진 플라스틱을 밟아 ‘아 개빡!’이라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청소를 한다. 그런고로 대부분의 시작을 큰 고민 없이 갑자기 하는 편임을 미리 밝혀 둔다. 심지어 대학을 가기 위해 고등학교 1학년 때도 별 고민 없이 ‘난 수학을 못하니까 수학 점수가 필요 없는 미술을 배워서 미술 대학을 가야겠다.’ 고 마음먹은 사람이 나다. 그림도 개뿔 못 그리면서 말이다. 오래 살던 서울을 떠나 전혀 연고가 없는 목포로 서른 즈음에 내려온 것도 ‘뭐 죽기 전에 한 번 내려가서 살아볼까?’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해 살아보기로 한 거니까. 그러니까 나에겐 시작은 반이 맞다. 저 시작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고, 마무리가 되지 않더라도 고민할 시간에 실행에 옮겨서 뭐라도 했으니까. 시작이 반이 맞네. 옛말 다 맞다.


  위에 열거한 시작들과는 다르게, 배움의 시작은 또 다르다. 배움의 시작마다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했던 부끄러운 생각을 살며시 고백한다. ‘나 알고 보니 이 일에 재능이 있어서 무지 뛰어나게 잘하는 거 아냐? 천재인 거 아니야?’라는 한 번도 맞았던 적 없는 생각이다. 지금은 어처구니가 없다. 메달리스트 김연아 조차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그저 창원 황 씨 34대 손일뿐인 황달수가 뭐라고 저런 생각을 하냐고. 자의식 과잉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되찾자!


  어쨌든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교회 장로님한테 배울 때도, 대학 입시를 위해 미술학원을 등록해 이젤 앞에서 연필 잡는 법 배울 때도, 중국어를 옛날에 만난 남자애한테 배울 때도, 포토샵을 장미 가족의 태그교실에서 배울 때도 늘 저런 생각을 했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쉽게 포기하곤 했다. 참으로 시작을 대하는 마음으로는 제일 안 좋은 예가 아닌가? 저 생각을 다시 뒤집어 보면 ‘수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노력하기 싫어!’라는 못난 마음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작은 처음이란 설렘과 현실이란 절망을 함께 주는 얄미운 나비 같은 거다.


 이번 '엮기와 풀기' 모임 첫 만남은 코바늘 뜨기에 대한 첫 시작이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시작이기도 하고. 인애의 친절한 설명과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에도 나 스스로 코바늘로 매듭을 짓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예전에 친했던 친구에게 “넣고 돌리면 돼.”라고 야매로 코바늘 뜨기를 배운 나는 정식으로 코바늘 매듭짓는 게 처음이라 인애의 자세한 설명을 들을 때는 몹시도 설렜다. 마치 조선시대 때 한석봉이 종이와 붓을 살 돈이 없어 돌이나 나뭇잎에 글씨 연습을 하다가 종이 위에 먹을 잘 입힌 붓으로 글을 썼을 때의 설렘같이. 인애 말 대로 왼손을 플레밍의 법칙처럼 만들고 새끼손가락에 실을 감아 휘리릭 검지로 올리며 하라는 대로 하다 보니 매듭이 잡혔다. 드디어!


 하지만 역시나 절망이 뒤따라왔다. 인애와 함께 할 때는 쓱쓱 잘 만들어지던 매듭이 나 혼자 하려니까 갑자기 엉망진창 빗자루가 되고 만 것이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그 매듭은 절대 인애가 알려준 것처럼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 매듭짓기를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할 때도 그랬다. 다들 제대로 잘하는데 나는 예전 버릇이 남아있어 괴상망측한 (좀 과장을 섞었다. 매듭이 괴상망측하면 얼마나 괴상망측하겠어요.) 매듭이 된 거다. 아무튼, 그랬다. 그래도 절망이 있어서 설렘이 더 기대가 되는 법이렸다.


 시작을 대하는 마음은 오만할 때도 있고, 겸손해질 때도 있고, 아무 생각 없을 때도 있고, 긴장할 때도 있다. 그때의 내 상황, 기분, 지갑 사정, 날씨 등에 따라 각각의 시작을 대하는 마음은 오락가락이지. 그렇지만 우선은 ‘설렘'이 기본적으로 들어간단 생각이다. 21세기의 한식에 마늘이 빠질 수 없듯 말이다. 설레는 오만함, 설레는 겸손함, 설레는 생각 없음, 설레는 긴장감.. 처음 목포로 이사 왔을 때도 설렜고, 처음 연필 깎는 법을 미술학원에서 배울 때도 설렜고, 처음 사업자등록증을 낼 때도 설렜고, 엮기와 풀기 모임에서 배운 코바늘로 매듭 지을 때도 설렜다. 물론 다양한 절망들도 뒤따라 오지만 그 절망은 곧 익숙해지고 다시 설렘으로 뒤덮인다. 다시 절망으로 뒤덮이기도 하지만, 설렘이 지속되면 그건 설렘이 아니지. 모두 이 맛에 뭔가를 시작하는 거 아닐까? 뭐 아님 말고. 난 그렇다.


Ps) 배경음악은 오마이걸의 살짝 설렜어를 추천해요. 논스탑~ 논스타압~~~! https://www.youtube.com/watch?v=iDjQSdN_i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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