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저절로 그리움이 쌓이고 스스로 그리움이 되기도
서울 광화문에서 국토를 가로질러 곧바로 남쪽으로 직진하면 어디가 나올까. 광화문 정 동쪽에 정동진이 있는데, 남쪽 끝에는 과연? 고려 17대 왕 인종이 길이 번창하길 바란다는 의미로 지명을 하사했다는, 아름답고 상서로운 길지(吉地) 중의 길지, 길 장(長)에 일어날 흥(興),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장흥 말고 전라남도 장흥, 바로 정남진이 있다.
길 끝에서 만난 구름 속 일출
유명한 소등섬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3시에 출발, 중간에 주유하느라 잠깐 차를 멈춘 것 말고는 쉬지 않고 달렸다. 그랬는데도 남포마을 앞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 소등섬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뜬 후였다. 봄이 시작되면서 일출이 빨라진 까닭이기도 했으나, 그만큼 서울서 장흥 가는 길이 멀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구름 속 일출이라 그림 같은 풍광은 아닐지라도 일출 분위기는 남아 있다. 낮은 둔덕으로 이뤄진 작은 섬, 키 큰 소나무 뒤로 붉게 물든 하늘이 먼 길 달려온 보람을 느끼게 해 준다.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나 가족들을 위해 밤새 호롱불 켜놓고 무사 귀환을 빌었다는 소등섬다운 풍광이 아닐 수 없다.
사진 촬영이 취미인 이들에게 소등섬은 이름난 일출 명소다. 장흥에서도 남쪽 끝, 정남진전망대 바로 옆에 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축제’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장흥 출신 이청준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축제를 찍을 때 이곳 남포마을 사람들이 단역으로 많이 출연했다고도 한다.
장흥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한강 등을 배출한 문학의 고장이기도 하다. 소등섬에서 정남진 대교를 건너 안양면 수문리로 가면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한승원 문학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한승원의 문학과 맨부커상을 수상한 그의 딸 한강에 대한 발자취도 느낄 수 있는 산책로를 걸으며 갯벌 위 잔디처럼 자라고 있는 파래나 감태 같은 해조류를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봄이 온몸을 감싼다.
소등섬을 중심으로 반대편 회진으로 가면 이청준이 태어난 곳이며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배경이 된 ‘유채 마을’이 있다. 역시 임권택 감독이 제목을 ‘천년학’으로 바꿔 찍은 영화촬영지이기도 했다. 철이 일러 유채가 꽃을 피우지 않았지만 남아 있는 영화세트장을 구경하고 낮은 언덕 위 선학정에 올라 내려다본 마을 전경은 문학의 고장답게 포근하고 정겹다. 이 정도면 만족이다.
자연이 살아있는 명품 숲 너머
소등섬에서 가까운 정남진전망대에 오르면 파노라마로 펼쳐진 다도해의 수려한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지하 1층에 지상 10층, 높이 45.9m 규모로 1층에는 홍보관, 10층에는 전망대가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금도, 금당도, 생일도, 금일도, 연홍도, 노력도 등을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가는 날이 장날, 아니 월요일이라 하필이면 폐관일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공을 친 건 아니다. 전망대 오르는 길에 만나는 지도 모양의 바닥분수도 신기하고 전망대 앞 귀여운 12간지 조형물도 볼만하다. 정남향이라는 방향 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율려'라는 조형물 앞에 서면 시원한 조망이 눈을 씻어준다.
전망대를 내려선 후 부지런히 북쪽으로 차를 달리면 호남 5대 명산 천관산이 손을 내민다. 수많은 봉우리와 기암괴석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과 같다는 데서 유래한 천관산 도립공원에는 국립자연휴양림이 있다. 그리고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자연휴양림 가는 길 중간에 장흥이 자랑하는 명품 동백숲이 있다.
2021년 방문해야 할 아름다운 명품 숲 12선 가운데 2위를 차지한 숲이기도 했으나 철이 일러 동백꽃은 드문드문 피었다. 멀지 않은 묵촌마을 동백숲도 마찬가지였다. 액운을 막고자 조성한 인공림으로 수령 250~300년 된 동백나무 14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역시 흐드러진 풍광은 아니다.
실망하긴 이르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잘 가꿔진 민간 수목원 하늘빛수목원이 자리 잡고 있음이다. 꽃과 나무, 연못이 어우러진 숲속 놀이터로 봄이 관광 적기다. 약 10만㎡의 대지 위에 수목 300여 종과 야생화 1,000여 종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코로나19로 발길이 줄었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숲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수천 송이의 튤립이 만발하는 아침정원과 야생화정원, 생태연못 등이 이어진다. 해마다 봄철이면 튤립 축제를 연다. 색색의 튤립이 융단처럼 펼쳐진 야외무대에서 음악회와 다양한 공연도 즐길 수 있다. 울창한 편백숲에서 피톤치드를 마시며 한가롭게 쉬어가기도 좋다.
▶ 여행 수첩
서울서 출발하면 경부, 천안-논산, 호남고속도로 광주에서 국도로 갈아타는 길이 보통이다. 차량 통행이 덜한 시간대라면 5시간 안에 소등섬 도착 가능하다. 차량이 많은 시간대에는 경부, 천안-논산 타고 가다가 공주 분기점에서 서천-공주, 이어 군산, 목포로 이어지는 서해안고속도로를 택하는 게 빠르다. 장흥 I.C를 빠져나가면 지척에 평일에도 찾는 이들이 많은 토요시장이 나타난다. 서둘러 문을 연 식당에 들러 뜨끈한 한우 갈비탕이나 고소한 육회비빔밥으로 요기하기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