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을 못하면 핑계가 생긴다
출근길에 우체부 아저씨 아니고 우체부.
지섭 씨를 만났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저씨에서
탈락하는 사람도 늘어간다.
군인에 이어 두 번째로 우체부도 이제
아저씨라고 부를 수 없다.
“신문은 왜 보시는 거예요? 한동안 안 보시더니?”
머뭇 거리지도 않고 거짓말을 나는 했다.
“애가 고삼이라 신문사설을 봐야 한다고 해서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지섭 씨의 질문이
'왜 매일 제가 꼭대기 집까지 가야죠?'
는 아닐까...
작은 시골 동네여서
우체부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지역은 넓고...
그들의 열악한 배달 스케줄을
이웃일 뿐인데도 알고 있으니
내 마음이 불편하여.
나이를 먹으면서 거짓말도 는다.
얼마 전 핸드폰 기계를 바꾸고 전화번호를
옮기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스팸처리가 안 된 번호를 옆으로 밀었는데
받아진 것이다.
“사모님! 신문 하나 보세요!”
나의 배우자는
선생님도 아니고
목사님도 아니기 때문에
사모님 이라고 불릴 때 나는
아주 듣기가 거북하다.
“싫어요”
상담 아주머니는 아주 천천히,
낮은 음조의 교양은 가득하지만
신문을 안 보는 나를 미개하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도록
설득같은 질타를 하셨다.
“그래도 싫어요”
라고 말을 했는데...
아주머니는 성공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결국 평소의 나와는 다르게
끝까지 거절에 성공하지 못하고
일 년 계약을 하고 말았다.
당일 배송도 아닌
하루 묵어 우리 집에 배달되는,
어제의 신문은
원래의 용도를 벗어나 사용되고 있다.
옷장 방충제에서
커튼까지.
지섭 씨에게 미안타.
20200619_봉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