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있어 글쓰기는 대학교 때 썼던 에세이가 처음이었던 듯해요. 아뇨, 초등학교 때도 많이 쓰긴 했죠. 뭐가 뭔지 모른 채 쓰긴 했지만. 사립학교라 글쓰기를 많이 시켰어요. 기억하세요? 영국서 3학년 2학기 말에 돌아왔는데 4학년에 들어서며 학교 내, 온갖 글쓰기 대회를 휩쓸었던 거. 글짓기 대회, 독후감 쓰기 대회 등 썼다 하면 최고상이었죠. 한창 글쓰기를 배울 시기 영국으로 떠났던지라 글쓰기를 배운 적도 없었어요. 어떻게 쓰는지도 모른 채 썼는데 계속 상을 받는 거예요. 그랬더니 학교에서는 전국 대회에 내보내더군요. 전국 야쿠르트 글짓기 대회 등 나갔다면 최소 장려상은 받았어요. 그래서 그때 장래 희망이 기자였죠.
그러다 대학 때 영국에서 다시 글쓰기를 하는데 너무너무 어려운 거예요. 에세이를 쓰는데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관련 책을 읽고 헤쳐 모여 짜깁기를 티 안 나게 해 쓰기 시작했어요. 에세이를 어떻게 쓰는지 몰랐거든요. 한국서 써 본 적이 없으니. 에세이 제목도 순 이딴 식 "Did Marco Polo really go to China?" [마르코 폴로는 정말로 중국에 갔다 왔을까?] 이걸로 에세이를 쓰라고요? 내가 알게 뭐예요. 마르코 폴로가 정말로 중국에 갔는지 안 갔는지 난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책을 읽는데 너무 웃겼어요. 누군 갔다 그러고 증거라며 책 한 권을 쓰고, 누군 안 갔다 거짓말이라며 책 한 권을 쓰고. "아, 내겐 아무 의미 없다."
이렇게 아무 의미가 없으니 대학 생활 내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자다 깨 써야 하는 게 에세이고, 수 십 개의 에세이를 써야 했는데 쓸 때마다 산고의 고통을 겪고 또 겪고. 시험은 또 얼마나 괴로웠게요. 1년에 딱 한번 시험을 보는데 4시간 동안 6개의 에세이를 쓰고 나왔죠. 손으로 썼는데 4시간 동안 쓰고 나면 손가락은 후들후들, 정신은 오락가락. 시험 중 화이어 알람이나 울려라 매일 바랬어요. 완전 빡쎄게 글쓰기 훈련을 했죠. 이렇게 몇 년을 지내고 나니 어떻게 해야 좋은 에세이를 쓸 수 있는지 저만의 노하우가 생겼고,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결론을 낼 줄 알게 되었어요.
회사에 들어가서는 보고서를 썼어요. 매일 보고서를 써야 하는 전략팀이었잖아요. 한글로도 쓰고, 영어로도 쓰고. 사장 보고에 전사 대상 보고서라 조사 하나도 조심해 썼던 기억이 나요. 직접 혹은 조사 업체를 사용하여 리서치 후 전략 수립. 여기서 대학 4년 내 연습했던 '헤쳐 - 모여 - 정리 - 결론 도출'의 노하우가 도움이 되더군요. 재미있었어요. 당시 저는 대리 나부랭이였었기에 보통 부, 차장님들의 디렉션을 받았어요. 보고 날짜가 잡히면 준비하던 보고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해요. 상무님이 검토하시고 우리들의 짜깁기가 시작되죠. 장표를 이리저리 옮기고 내용을 더하고 빼고, 20장짜리 보고서가 버전 10이 될 때까지 수정에 수정을 반복해요. 내용은 물론 표현 하나, 단어, 조사, 띄어쓰기, 폰트 크기 등. 보고 날 상무님은 항상 회색 양복을 입으시고, 하늘색 넥타이를 매셨어요. "검정이나 감색보다 회색이 훨씬 부드러운 이미지를 주기 때문에 항상 회색을 입지." 완전 프로페셔널해 보였어요. 이렇게 보고서에 글을 썼어요.
이렇게 에세이를 매일 쓰다 보고서를 매일 썼는데. 이젠요, 제 삶을 내어놓는 글쓰기가 하고 싶어 졌어요. 진솔하게 감정을 이야기하고 기억을 기록하고 싶어요. 특히 엄마의 기억을. 아빠, 안타깝게도 "우리 엄마는 어땠었나..."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어요. 느낌으로 잔뜩 갖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이야기를 했었고, 무슨 기분이었고, 표정이었는지 모두 기억하고 싶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사랑하는 우리 엄마, 엄마의 예전 모습이 그리울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데... 엄마의 느낌을 기억으로 잡아두고 기록하여 두고두고 보관하고 싶어요. 더 잊기 전에 기록해야 해 마음이 급해요. 왜 미리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나를 소진시키는 일상을 채워줄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우연한 기회에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 난 엄마 기억을 엄청 쓰고 싶어 했던 거였어요.
아빠는 왜 글을 쓰세요?
아빠의 답글입니다.
네 글에 답글을 쓰려고 생각 중인데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하다.
누가 지네에게 물었다. "지네야, 너는 걸을 때 그 많은 다리 중 어느 다리를 가장 먼저 움직이니?" 지네가 한참을 생각하고도 대답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