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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앤지 Nov 29. 2023

직장 상사와 사랑에 빠지다.

승진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갔다.  

거봐... 커피숍에서는 날 못 알아봐도 (아니다 싶을 때 바로 그만둘 수 있는 용기 참고) 이렇게 물만 잘 만나면 물고기처럼 헤엄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니까…

그렇지만 워낙 지금의 나는 몸과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 생각 보다 빠른 승진오퍼에 어떤 책임감이 생기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커서 고민이 많았다.  


그래... 나중에 못하겠다 하더라도 일단은 해 보자.

자신은 없지만,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다른 이가 하는 꼴을 보는 게 더 힘들거 같았다.

늘 되뇌이는 말이지만, 할 만하니까 제안한 거 아니겠어…? 문득 호주 사람들에게 궁금해졌다 에서 말했다시피…



앞으로 시간대 책임자의 역할을 할 생각을 하니 시니어로서 내가 본받고 싶은 나의 직장상사들이 떠올랐다.


어느덧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한 시간보다 외국에서 한 시간이 더 길어지다 보니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경험이 가물가물해졌다. (그 얘기는 한국에서는 인상적인 직장 상사가 없었다는 말일 수도…)

그런데 딱 한 사람, 수능 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함께 일했던 강민아 트레이너님이 생각났다. 아주 청순한 외모에 쌍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손님들에게만은 유난히 애교가 많던, 일을 똑부러지 게 하는 매니저였다.  

당시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막 성행을 할 시기였고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웨이팅 시간이 4시간이나 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지점이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니 다양한 손님들도 많았고 불만사항들을 토로하는 손님들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강민아 트레이너님이 강아지 눈빛으로 “고객니임~ 노여움을 푸세요.” 라며 예쁘게 말하면 손님들은 그 앞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신의 터질 듯한 화를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속수무책으로 누그려뜨렸다.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는 항상 나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뭔가를 보여주려고 따라오라고 할 때, 항상 내 손을 꼭 잡고 갔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경쾌했던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제 막 사회를 경험하는 나를 매우 친절하게 전쟁터로 이끌어주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내가 겪을 녹록지 않은 세상에 이제 막 발을 내딘 나를 어르고 달래서 겁먹지 않게 해주는 그런 느낌. 그래서 좋았다. 

아니 그렇다고 내가 직원들을 손을 잡고 다니겠다고 다짐하는 건 아니지만, 유난히 외롭고 일 가는 것이 두려울 때면 그녀의 보드랍고 시원했던 손에 다시 끌려가고 싶어 진다. 뭣도 모르는 나도 느낄 정도로 본사 사람들과 손님들이 늘 찾았던 그녀와 함께라면 오늘 하루가 든든했거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어떤 업무를 할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함께 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듬직한 상사이자 직원.)

당시 고작 20대 후반인 본인을 노처녀라고 말하던, 거칠게 우리는 대하는 듯했지만 곤란한 상황에서는 항상 구세주처럼 등장해 상황을 종결시키던 강민아 트레이너님… 잘 지내시죠??



뉴질랜드의 호텔에서 일했을 당시 짐 무어 제너럴 매니저(이하 GM)님은 호텔 오너 다음으로 가장 높은 분임에도 전 직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이었다.  

내가 그분에 대해 달리 보게 된 계기는 한 달에 한번 전 직원들이 호텔 레스토랑에 모두 모여 점심을 먹으며 그 달의 업무 성과를 브리핑하는 시간이었다. 그때마다 GM님은 음식 차려 준 키친팀, 서포트한 F&B 팀과 하우스 키핑에 감사 인사를 빼놓지 않으셨다. 특히 호텔의 기본은 accommodation이라고 하시면서 힘든 육체노동이 주가 되는 하우스 키핑팀이 아니면 호텔은 운영되지 않는다고 항상 하우스 키핑 팀의 노고를 높이 평가 해 주었다.

하우스 키핑은 호텔에서 팀원이 가장 많은 부서이기에 외국인 노동자 비율이 제일 높고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곳이라 쉽게 드러나지 않은 부서임에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이번 한 달도 너무 고마웠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고 나니 종종 고객들이 칭찬 카드에 내 이름을 적어두고 가면 내가 일하는 자리까지 굳이 찾아와서 잘했다고 칭찬과 격려를 해주시는 모습에서 GM님이 어떤 마음으로 직원들을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게중에 오피스 워커들과만 말 섞고 일선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나 직급이 낮은 직원들과는 인사도 잘 안하는 어깨에 힘 잔뜩 들어간 GM들도 제법 많기 때문에 짐 무어 GM님이 보여준 모습들은 더욱 따뜻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호주로 떠난 다고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본인도 가려고 했었던 곳이라면서 내 커피가 그리울 거라면서 응원해 주시던 짐 무어 GM님!  건강하세요!!



지금 일하고 있는 호텔의 신(xin) GM님은 내가 입사하기 얼마 전에 총지배인으로 승진을 하셨다고 한다. 사실 이전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열정과 패기가 충만한 채 내가 다녔던 지난 회사들에 비해 지금은 많이 깨어지고 깎여져 자신감도 자존감도 바닥에서 찰랑 거리고 있는 시기에 나를 뽑아준 분이다. 아마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 본 이 분 눈에도 내가 웃고 있어도 주눅 들어 보이는 게 느껴졌는지 오며 가며 볼 수 없는 근무시간이 도와주지 않으니 일하는 거야 같이 일하는 시니어, 매니저들에게 보고 받을 것이고 종종 퇴근하는 나를 사무실로 불러 나의 안위를 확인하는 분이다.


뭐가 걱정이냐는 말에 뭐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먼저 말씀하셨다.



실수해. 많이 해. 실수하는 거 두려워하지 마. 그래야 배울 수 있어.


나를 뽑아주신 분,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에 조급하고 불안했던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주 전쯤, 호텔이 오버부킹이 되어 방이 부족한 적이 있었다. 남은 체크인 대기자들 중에 no show를 기대해야 하는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밤늦게 체크아웃하는 손님이 나왔다. 하지만 하우스 키핑팀은 모두 퇴근한 시간… 그래서 예전에 잠깐 하우스 키핑에서도 일했던 경험이 있는 내가 혹시 모르니까 청소하고 오겠다고 자청했다.  (캐캐묵은 경력인 데다 이 호텔에서는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완벽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호텔 짬바를 살려 부끄럽지 않은 정도로는 해놨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그다음 날, 이 소식을 들은 GM님을 퇴근길에 마주쳤는데 나에게 ‘잘했다’,’ 수고했다’가 아닌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셨다.   


신기했다. “너의 능력을 적재적소에서 잘 활용해 줘서 고맙다.” 는 말을 듣는데 ‘잘했다’는 칭찬보다 왠지 모르게 더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쓸모 있는 직원이라는 느낌을 들게 해주는,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해주는 상사의 말이었다. 

휴가 잘 보내고 오세요!  시니어 되도 더 열심히 할게요!




돌이켜 보면 나는 상사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받았던 기억은 당연히 있지만 대체적으로 (굳이 말하자면) 내 편이 더 많았고 상사들과의 원만한 관계 때문에 별다른 영향을 받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정말 운이 좋았다.

언급된 상사들 외에도 언급하고 싶은 상사들이 줄지어 떠오르는 것을 보면 결국 나를 이 자리까지 만들어 준 것은 그분들의 응원과 격려, 그리고 믿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수는 바로 잡아 주되 질책하지 않고 칭찬과 인정을 아낌없이 해 주는,

퇴근길에 만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상사들과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갈 길은 멀지만 나도 그런 시니어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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