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관심이 남편에게 집중되던 때를 벗어나 내가 나의 삶을 살려고 노력을 시작하고 나서야 남편과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남편은 내가 바라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몰라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한참 감정이 격해있을 때는 나 또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아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마음이 변하곤 했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어찌 힘든 게 나뿐이었을까. 남편이 보기도 싫어 나가라고 했을 때, 남편이 실제 캐리어를 싸고 본가로 갔을 때 나는 더 화를 내었다.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며 남편은 꼴 보기 싫다고 나가라고 해서 나갔더니 더 화를 내고 ‘집 나가란다고 얼씨구 좋다 나가냐!’란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왔을 땐 또 나가라고 소리치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너는 나를 죽여놓고 칼로 난도질을 해놓고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냐? 아프다는 소리가 나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나는 다툼 끝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도 힘들다고 어떻게 해야 나의 마음이 풀릴지 정말 몰라 답답하다고 하는 남편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었었다. 하지만 마음이 차분해진 뒤론 남편에게 매뉴얼이 필요하다 느꼈다. 큰 아들 키운다 생각하라는 어느 심리분석가의 말이 갑자기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하나 알려주고 챙겨줘야 하는 큰 아들이 돈은 벌어오니 얼마나 기특한 일이냐고. 나는 남편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나에겐 한없이 기댈 수 있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존경심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 참 안 듣는 큰 아들’ 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주고 알려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남편을 위한 매뉴얼 북을 만들었다. 아니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나를 위한 남편 행동지침과도 같은 거였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를 길들인 것이다. 외동아들에 평생 자신이 잘난 줄만 알고 살았던 그가, 스무 살 연애 초반부터 결혼 후까지 줄곧 큰 소리 떵떵 치며 살았던 남편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이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앉아있다니 이제 역전이 된 것이다. 나는 그의 위에서 군림하는 무자비한 여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이 아니면 이 사람이 내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나의 매뉴얼 북은 내용은 이러했다.
첫째, 내가 나가라고 할 때 대처법. 내가 나가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당신의 모습이 보기 싫다는 것이지 집 밖으로 나가란 것은 아니다. 그러니 잠시 나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다른 방에 들어가 나오지 말아라. 한 공간 안에 있되 내 눈엔 띄지 말아라.
둘째, 내가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면 그건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당신이 아직도 아내인 나를 위하고 아껴주는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안아줘라. 당신의 따뜻한 체온이 나의 불안감을 떨어트릴 때까지 꼭 안아줘라. 이때 중요한 건 ‘말없이!’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셋째, 내가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내면 바로 응답하라. 핸드폰을 상시 손에 쥐고 있어라. 나의 연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받아라. 일 하느라 몰랐다, 회의 중이다, 그런 내용은 나를 더욱 의심에 차게 만들 것이다. 회의 중에 혹은 상대방과 대화 중에 전화를 받고, 메시지를 보낸다고 해서 무례하다 생각할 상대방 생각은 말아라. 지금은 당신이 남들보다 마음이 망가진 나를 더 챙겨줘야 할 때이다. 어떤 상황이든 심지어 회장님 앞에서도 중요한 전화라며 나의 전화를 받아라. 절대 끊지 마라. 당신이 나의 전화를 안 받고 끊는 순간 난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이다.
넷째, 나와 대화를 할 때는 시답지 않은 말들은 하지 말아라. 내가 옛 일을 다시 끄집어내어 다그치면 “미안해” 한마디면 된다. 내가 지금 당신의 행동에 대해 뭐라고 불만을 표현하면 “노력할게” 한마디면 된다. 다만 이러한 말들을 할 때는 짜증 나는 투가 아닌 다정다감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구구절절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말아라. 당신은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손해라는 것을 알아라.
다섯째, 내가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땐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아이들 핑계를 대며 함께 밖으로 나가자거나 무언가를 먹으라고 하지 말아라. 그럴 땐 조용히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라. 본가를 가던 키즈카페를 가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라. 나 혼자 쉴 수 있도록 배려해줘라.
여섯째, 내가 싫다고 거부해도 스킨십을 해라. 출근할 때, 퇴근할 때 내가 깨어있든 침대에 잠들어있든 가벼운 뽀뽀를 해주어라. 이마나 볼이 가장 좋다. 입술은 싫다. 뽀뽀를 허락했다고 해서 키스를 허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뽀뽀할 때는 침이 묻지 않도록 마른 입술인 상태로 가볍게 해라.
등등 위와 같이 나는 나만의 매뉴얼 북을 만들어 남편에게 알려주었다. 잘 숙지하고 그대로만 하던 남편도 가끔은 미안해 한 마디면 될 것을 구구절절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으려 할 때, 난 다시 매뉴얼을 상기시켜주며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랬더니 싸움도 적어지고 남편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화를 내던 빈도도 적어졌다. 나중에는 미안해 소리가 듣기 싫어지는 순간이 와서 미안해를 사랑해로 바꾸었다. 그랬더니 대화가 한 결 더 부드러워졌다. 그 어떤 나의 타박에도 남편은 매뉴얼대로 ‘사랑해’로 대답했고 그러면 난 화가 거짓말 같게도 누그러들었다. 어쩌면 매일 남편의 변하지 않은 마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잘못한 남편에게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한다는 것이 처음엔 화도 났지만 한편으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남편을 조종할 수 있다 생각하니 묘한 쾌감까지 들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남편은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꾀나 말을 잘 듣는 편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은 내가 나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기에 나온 것이었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이 결혼생활을 끝내는 것인지 한 번 더 노력해보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남편에게 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두 다 해보고 결정을 해도 늦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저런 매뉴얼 북은 사용하지 않지만 대신 다른 매뉴얼 북을 사용하고 있다. 남편이 그것을 인지했던 하지 못했던 상관없다. 나는 생각보다 남편이 길들이기 쉬운 사람이란 것을 알았고, 늘 보호받고 싶었지만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란 것에 조금 짜증도 났지만, 사실 그건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센 힘이 필요하거나 할 때는 또 남편에게 기대기도 하니까. 나는 지금도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가 모르게 그에게 주입한다. 이젠 그때처럼 매뉴얼 북을 꺼내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대로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