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결혼 지켜.”
주인공인 김희애가 이혼한 남편과 잠자리를 하고 난 후, ‘나 다시 돌아올까?’ 물으며 흔들리는 남편에게 한 말이다.
또한 나의 남편이 잘 따라 하는 성대모사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드라마에는 불륜이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그 일을 겪기 전에는 우리나라 드라마에 이토록 불륜 이야기가 많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 일로 인하여 한참 마음이 힘들 때는 드라마에 비슷한 스토리가 나오기만 해도 그날은 남편과의 전쟁 날이었다. 나는 밤새도록 남편이 잠에 들지 못하도록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드라마 속 대사를 읊조리며 상간녀와 너도 저랬느냐, 저 와이프 대사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냐, 저 아이들은 불쌍하지도 않으냐... 저렇게 헌신한 아내를 왜 헌신짝 취급하는 것이냐... 그러기를 수개월...
그나마 내가 제정신이 들었을 때(미친 사람처럼 널뛰기를 하다가 기분이 확 가라앉으며 차분해지기를 반복, 그중 차분해졌을 때 남편은 많은 참아왔던 이야기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은 나에게 조곤조곤 말하였다.
“여보. 당신 마음이 나을 때까지는 당분간 자극적인 드라마는 피했으면 좋겠어. 자꾸 안 좋은 기억을 상기시켜봤자 당신 건강에 좋을 것도 없고...”
남편 말이 맞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엄마는 집에 티브이를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 늘 그 시간대에 그 드라마를 볼 것이다. 그러면 그날 밤은 밤새도록 전쟁일 것이고...
엄마는 내가 아픈 뒤로 두 아이를 데리고 주무셨는데... 새벽에 싸우거나 우는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이 잠결에도 부르르 떤다고 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안 되었다. 그때부터 난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고 엄마가 드라마를 보실 시간에 산책을 나갔다. 산책이 힘든 날에는 귀에 이어폰을 꼽고 노래를 들으며 설거지를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피하다 보니 매일 같이 싸우던 일도 잦아들었다.
배우자의 외도를 겪은 사람은 되도록이면 자극적인 기사나 드라마, 영화, 매체 등을 멀리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평생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만 말이다. 그때의 나라면 감히 있을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의 난 부부의 세계란 드라마를 아주 재미나게 보았다. 것도 남편과 함께 본방 사수를 하면서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로맨스 영화나 불륜 없는 사랑 이야기를 보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에겐 당시엔 그 마저도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남자의 극진하고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받는 여주인공을 볼 때면, 나는 같은 여자로서 실패한 인생 같아 서글퍼졌다. 많은 남자를 만난 것도 아니고, 저렇게 잘 생기고 멋진 남자들이 고백하길 바라는 것도 아닌데... 단 한 사람... 내 남편에게서... 그런 극진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것 같아 그런 날엔 밤새도록 울었다.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에일리의 ‘보여줄게’란 노래를 들으면 꼭 멋진 여자가 되어서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갈다가도, 2NE1의 ‘in the CLUB’ 이란 노래를 들으면 내가 사준 신발을 신고 옷을 입고선 다른 여자와 즐기는 내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래서 난 설거지를 하면서 클래식이나 외국어로 된 가곡을 들었다. 왜 이러한 곡들이 전 세계인들에게 오래도록 사랑을 받은 명곡인지를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애써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불 같던 나의 화도 잠재워졌다.
부부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되도록이면 모든 매체에서 멀어질 것.
뉴스를 봐도 상간남과 짜고 남편을 죽인 아내, 처자식을 두고 상간녀와 여행을 가다가 사고 난 남편 등 자극적인 기사가 난무했다. 남편의 외도를 알기 전엔 이런 기삿거리도 안 보고 넘겼었는데 비슷한 제목만 봐도 무조건 클릭하여 보고 일부러 찾아보기까지 했다. 드라마와 영화는 불륜 내용이 없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특히 우리 엄마가 매일같이 보는 일일 드라마나 아침 드라마는 더 심각했다. 남에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일진 모르겠으나,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기고 난 뒤엔 보는 족족 주인공들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모든 드라마 속 대사들이 상처이고 아픔이었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날카로운 것으로 마구 할퀴는 느낌이었다.
드라마에선 아내보다 젊고 예쁘고 집안까지 좋은 상간녀가 등장한다. 남편은 지극정성이었던 아내와 아픈 자식까지 버리고 그 여자를 선택한다. 아내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힘들게 살아오지만, 능력 있는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행복하게 산다. 물론 권선징악이 분명한 이야기에서 남편과 상간녀는 하던 일이 모두 망하고 서로 헤어지고 지옥의 나락으로 빠진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보면 속이 후련해질 순 있지만, 드라마는 드라마다.
실제로 홧김에 이혼했는데 상간녀와 아이까지 낳고 잘 사는 걸 보니 울화가 치민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 나중에는 그 둘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들의 불행을 확인하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남자 때문에 지울 수 있는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남자에게 기대어 사랑을 시작하는 뻔한 스토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편과 이혼하여 홀로 애를 키우는 여자에게 능력과 재력, 외모까지 되는 미혼 남자가 대시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홀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하는 스토리가 있다 하더라도 드라마처럼 쉽게 3년 후, 5년 후가 오지 않는다. 현실은 일분일초가 십 년같이 느껴지고 매 순간이 불지옥 같은 고통이었으니까...
매일 저녁 엄마가 드라마를 볼 시간에 남편과 산책을 나갈 때 처음엔 둘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다. 평소에 걸음이 빨랐던 남편은 앞에서 걷고 난 그 뒤를 따라 걷기 바빴는데, 그때에는 반대로 내가 앞에서 걸었고 남편은 그런 내 뒤를 조용히 따랐다. 나중에 남편에게 들어서 안 이야기지만 욱한 감정에 내가 차도에 뛰어들을까 봐 걱정되어서 내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남편과 나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고, 결국 나란히 걷게 되었으며 남편의 제안으로 손까지 마주 잡고 걸은 날도 있었다.
나란히 걸으면서 우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차분한 대화들을 많이 했다. 애써 그 일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싸움의 소지가 되지 않을 아이들 이야기가 가장 좋은 소재였다.
그렇게 매일 밤을 걸으니 체력도 좋아졌고, 널뛰던 마음도 많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길게는 2시간 이상 통잠을 자기도 했다. 나중에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동네를 걷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꺄르륵 웃어대며 좋아하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지켜주자, 난 엄마니까.’
나에겐 나쁜 남편이었을지언정, 아이들에게는 좋은 아빠이니까. 그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기로 했다. 그때의 그는 정말 잘해보겠노라며 믿어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상처가 완벽하게 다 아물었다고는 할 수 없다. 가끔 남편과 말다툼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 날에 감정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럴 때면 다툼을 멈추고 무조건 그 자리를 벗어난다. 밖으로 나와 목적지 없이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옆에서 재잘거리며 한참을 웃던 아이들의 웃음이 떠올랐고, 노력하겠다던 남편의 눈물도 떠올랐다.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지금까지도(드라마가 끝난 지가 언젠데-) 국민 불륜남 이태오로 빙의되어 몹쓸 성대모사를 하며 옆에서 환장하게 웃고 있는 남편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 남자와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많이 편안해졌다니... 내게도 이런 시간이 오다니 말이다. 남편의 눈을 마주 보며 이렇게 다시는 웃을 수 없을 줄 알았다. 지금에 오기까지 모든 시간이, 그 과정들이 쉽지는 않았지만 우리 부부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해, 미래를 위해 노력해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