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노키옥 Nov 09. 2020

4. 피해자 코스프레

“여보, 괜찮아?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이 날 지켜보고 있었다. 병원이었다. 이 장면 꼭 데자뷔 같이 낯설지가 않았다. 생각이 났다. 첫 아이를 출산하였을 때다. 양수가 먼저 터져 30시간을 넘게 진통을 하다 정말 힘들게 낳았다. 그때 남편의 모습도 저러하였다. 오랜 시간 진통을 하면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남편은 날 지켜보고 있었다. 그땐 내가 걱정되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그리도 남편이 많이 울었는지를...


“미안해, 여보. 그런데... 다시는 그러지 마. 흐으윽.”


결국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퇴원하여 집으로 온 후에도 남편은 한동안 나만 보면 울었다. 내가 분노하며 폭발하던 시기 때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남편의 불룩한 배도 어느새 다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진 건 남편의 뱃살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의 넥타이도 모두 사라졌다. 첫째 아이 말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넥타이를 가위로 잘게 잘라 모두 갖다 버렸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넥타이한테 화가 많이 났나 봐. 울면서 다 잘라서 갖다 버렸어요. 넥타이가 아빠한테 잘못한 게 많은가 봐.”


어린 손녀 딸아이의 말을 들은 친정 엄마의 눈에선 눈물이 났다. 어쩐 일인지 난 눈물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담담했다. 드디어 내 눈물샘도 마른 것일까. 거짓말 같게도 멈출 줄 모르던 내 눈물이 그날 이후로 나오지 않았다. 화산 폭발과도 같던 분노도 휴화산 된 것 마냥 잠시 사그라들었다. 대신에 어린아이가 세상 온갖 것에 궁금해지는 것이 많아지듯 난 남편에게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아니, 모든 것을 알아야만 했다. 난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되었다.


“왜 그랬어?”


“그 여자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랑 뱃속에 아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았어?”


“왜 날 버렸어?”


“아직도 만나?”


“언제 끝난 거야?”


“둘이 영화는 봤어?”


“데이트는 몇 번 했어?”


“그 여자한테 선물은 어떤 거 해줬어?”


“당신이 먼저 끝낸 거야, 아니면 그 여자가 끝내자고 한 거야?”


“그 여자한테 날 뭐라고 했어?”


“나랑은 왜 이혼하지 않았어?”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야?”


“그 여자 가끔 생각 나?”


그렇게 남편은 매일 밤 폭언과 폭력 대신 수많은 나의 질문에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않던 그는 나긋나긋한 어조로 계속되는 나의 질문에 가끔은 대답을 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언제나 남편의 대답은 내 궁금증을 채워주기에는 부족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 여자와 남편 사이에 있었던 시작부터 끝까지, 그 이후까지의 모든 것이었다. 남편은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질 않는다는 말과 알아서 좋을 건 없을 거란 말로 말 끝을 얼버무렸다. 남편의 외도는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삭이 되었을 때 즈음 끝이 났다. 4년 전 일이라 그런지 그의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난 늘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반복했고 그의 대답은 그때마다 달랐다.  


난 수년째 일기를 써왔다. 4년 전 힘들었던 그때의 일기장을 찾아냈다. 그곳엔 남편을 의심하면서 힘들어했던 나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여자의 전화번호도 적혀있었다. 혹시 몰라 나중을 위해 적어두었던 건데 이게 이렇게 쓰일지는 몰랐다. 난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남편의 말대로 진짜 끝난 것인지... 그 여자를 만나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 여자는 이름이 특이하였다. 대한민국에 같은 이름은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은 IT 강국이다. 카****에 번호를 넣고 검색하니 그 여자 이름이 나왔다. 다행히도 그때의 전화번호를 그대로 쓰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구*에 그 여자의 이름을 검색하니 그 여자가 근무하는 회사, 직급까지도 힘들이지 않고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난 직장인이 가장 지루할 시간대를 생각해 내어 그 시간에 맞춰 그 여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역시나 내 예상은 맞았고 그 여자는 바로 답하였다.


‘혹시 ***씨 맞으신가요?’


‘누구세요?’


‘저 ***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게 딱 이런 걸까. 한참이나 대답이 없던 그 여자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요지는 이미 오래전 끝난 일을 가지고 이제야 왜 연락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편과 둘 사이엔 아무런 일도 없었으며, 자신이 좋아한 건 맞지만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으며 단 한 번도 남편에게서 여자로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의 일은 자신도 잊고 싶은 기억이고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아픔이었다고 하소연까지 했다. 나의 질문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사람이 결혼한 건 알고 있었나요?”


“그 당시 내가 임신한 사실도 알고 있었나요?”


“같은 여자로서 나한텐 미안하지도 않았어요?”


그 여자는 남편이 결혼한 유부남이란 것도, 아내인 내가 첫 아이를 임신한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같은 여자로서 나에겐 정말 미안했지만 자신 또한 피해자라고 했다. 남편을 만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여자로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으며 아내인 내가 너무 부러웠다고 했다. 나와 비교하면서 자신은 늘 비참했다고 남편을 가해자로 몰며 자신이 피해자임을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렇다면 남편이 임신한 아내와 이혼까지 하고 자신을 선택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나에겐 그 여자 또한 가해자일 뿐인데 왜 내게 피해자인 척 같은 여자로서 이해와 동정을 바라는 것인가.


그 여자는 나에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혼자서 장문의 메시지를 여러 보내더니 결론은 그거였다. 자신은 유부남을 좋아한 건 맞지만, 진심으로 좋아한 것이니 아무런 죄가 없다. 자신이 혼자서 좋아한 건 맞지만 그 이상의 어떤 육체적인 관계도 없었으니 자신은 떳떳하다. 자신 또한 그 일로 힘든 날들을 보내왔으며 다 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아닌 아내를 선택했으니 옛일은 그만 잊고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니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오래전 일을 순순히 인정하진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난 그 여자와의 대화에서도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작가의 이전글 3. 간통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