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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GI Oct 12. 2020

불안할수록 일기를 쓰라고 했다

사회불안 경력 15년 차, 진단 3년 차. 나는 프로 불안러다.


타이틀 소제목에 자랑스럽게 박아 놓은 것처럼, 나는 프로 불안러다.


특히 사회불안에 대한 경력이라면 어디에 명함을 내놓아도 기죽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 6년 차 웹소설 편집자라는 명함보다 경력이 3배는 길다. 사회불안자 모임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제법 선배님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사실은 나 자신을 불안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지 않다. 딱히 자랑스럽지도 않고, 사회불안자 모임 같은 게 있어 봤자 비슷한 인간들끼리 모여서 눈치 보며 불안에 떨기만 할 것이다. 이미 사회불안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런 모임의 실패를 예고하고 있다. ‘사회적 기능이 저하되는 정신과적 질환’이니까.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나는 백지를 두고 어김없이 불안을 느꼈다. 편하게 쓰자고 마음을 다독여 봐도 브런치에 올리려고 생각하니 (아직 작가 선정이 되지 않았는데도) 남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손이 떨렸다. 그렇다고 타자를 못 칠 정도로 마비되는 건 아니라서 뭐라도 글을 써 봐야 했다. 포기하는 순간 ‘남들 다 하는 것도 못 한다’라며 자책하게 되고, 박탈감으로 인한 불안 증세가 더 심화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사회불안자의 일상이다. 떨리는 손을 키보드에 억지로 동여매고 끊임없이 불안을 버텨 내야 평범한 글 한 편을 인터넷에 올릴 수 있다. 누군가는 글쓰기를 마치고 후련한 마음으로 업로드 버튼을 누르겠지만, 나처럼 불안한 사람은 대단한 발표라도 앞둔 것처럼 심장이 벌렁벌렁한다. 이래서야 사회생활은 대체 어떻게 하느냔 말이다.



최선을 다해야 평범한 사람


다행히도 나는 어떤 출판사의 편집자로 그럭저럭 평범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평범한’이라는 수식어다. 사회불안자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렇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한 결과가 바로 지금의 평범함이다.


즉, 고도로 발달한 사회불안자는 일반인과 구분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내가 회사 동료에게 ‘사실 저 정신과에 다니고 있어요.’라고 말하면 농담하지 말라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물론 나도 안다. 정신과에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고, 어젯밤에 과식해서 소화 불량으로 내과에 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회는 아직 마음이 아픈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 정신질환 이력을 밝히는 일은 커밍아웃만큼이나 쉽지 않다. 심리적인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편견이든, 동정이든 어느 쪽으로라도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다.


그 변화를 막연히 상상하기만 해도 나는 대단한 압박을 받는다. ‘시선’은 사회불안자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다. 항상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시선이 매일 나의 행동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나는 가상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질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고선 하루하루 지쳐 간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을 쓰지 않으면 ‘어떤 시선’이 나를 비난할 것만 같다. 누구나 만족하게끔 써야만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머리를 싸맨다. 하지만 대단한 글쓰기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결국 자신감을 잃고 불안해진다. 사회불안자들은 완벽주의로 인한 고통을 동시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불안은 사소한 계기로 스며들고, 삶을 지배한다


올해 33살인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회불안장애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내게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나도 몰랐고, 가족도 몰랐고, 주변도 몰랐다. 그저 사교성이 떨어지고 말을 조리있게 못 하고 사람이 많은 자리를 싫어하며 특히 발표를 극도로 회피하는 아웃사이더인 나를 실패자라고 생각했다. 초·중학생 시절만 해도 노래 오디션에 나가거나 댄스 동아리 활동을 하는 무대 지향적 인간이었는데 어느 순간 미지의 공포가 그 자신감들을 앗아 갔다.


노래와 댄스를 본격적으로 배우지는 않았고, 그냥 취미 생활이었으니 당연히 잘하지 못했다. 학교 친구들은 별로 잘하지도 못하는 애가 무대에서 나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 축제 날 무대에 올랐다가 반으로 돌아오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친구들의 시선과 숙덕거림이 느껴졌다. 소위 ‘노는’ 애들이 직접적으로 다가와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네들은 내가 무대에서 했던 실수를 집중적으로 후벼 팠다. 그때부터였을까. 18년이 넘도록 ‘어떤 시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 계기가.


대학을 졸업해 첫 회사를 다니는 동안 불안은 점점 심화됐다. 첫 회사에서는 소심하고 우물쭈물한 태도로 온갖 불합리한 일을 거절하지 못하고 떠맡다 보니, 어느새 동료 직원들에게서 고립되어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매일매일 마음을 닫고 생존용 페르소나를 만들어 갔다. 사회적인 자리에서 내가 내뱉는 말은 모두 가식이었다. 내 진짜 마음이 어떻든, 무조건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을 해 줘야 미움받지 않으리라고 믿는 맹목적인 방어 기제가 발동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내 감정을 나도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 삶은 괴로웠고, 희노애락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첫 회사를 그만둘 쯤에 나는 진로 재탐색 겸, 성우 학원에 등록해서 감정 연기 지도를 받았다. 그때 나는 우는 연기는 단번에 성공했지만, 웃는 연기는 학원을 그만둘 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삶이 괴로우니 눈물은 가깝고 웃음은 멀었던 것이다. 또 프로 성우들과 PD들 앞에서 연기 테스트에 응시하면서 내게 심각한 수전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에 쥔 대본 흔들리는 소리가 심해서 녹음이 불가능했다. 대본 종이를 투명 파일에 끼워 단단히 잡았는데도 말이다.)


갑자기 웬 성우 학원. 어쩌면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무대 공연, 다시 말해 내 예술적인 기질을 (재능과 실력에 관계없이) 세상에 표출하는 행위가 그리웠던 것 같다. 그러나 감정 표출이 어렵고 연기 테스트에 번번이 불안 증세를 보여 떨어지면서 나는 잠깐의 일탈을 끝내고 다시 나를 페르소나 안으로 몰아 넣었다.


몇 년이 흐른 2018년경. 나는 강도 높은 회사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고 이직하면서 반년간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이때 비로소 명확하게 사회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불안할 것 같으면 미리 약을 먹으라기에 늘 조그마한 알약 더미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 뒤로 병원에서 처방한 약의 효과를 보긴 했으나 아직 근본적으로 나아지지는 못했다.



가면 안쪽을 헤집는 도구: 불안일기


그래도 치료를 받기 시작하자 크고 작은 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는 그간 페르소나 속에 감춰 뒀던 나 자신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점이었다. 내가 나를 모르니 남들은 더 나를 모르는 게 당연했다.


심리상담을 전공한 친구의 추천으로 40만 원가량의 비용을 들여 성인종합심리검사를 받아 봤다. (이 검사는 살면서 한 번쯤은 받아 봐도 좋다. 나를 전문가가 객관적으로 관찰해 준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다행히 우울증을 앓고도 지능은 정상 범주에 속해 있었으나, 여전히 모든 지표가 나의 불안을 선명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슬슬 내 삶을 방해하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불안 때문에 회사에 과잉충성을 하다가 영혼이 파괴되고, 각종 시험과 경연에서 실력을 못 보여 탈락하는 일이 빈번했다. 구직할 때도 자소서는 백발백중인데 면접에서 모조리 탈락했다. 특히 타인의 평가를 받는 자리에서 불안은 최고조에 달했다. 머리가 멍해지고 손이 떨리고 심장이 날뛰고 목소리가 쉬는 신체적 증상들이 내 젊은 시절의 노력과 재능들을 비웃듯이 짓눌러 버리곤 했다.


내가 치료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심리상담사 웃따’라는 채널을 발견하고 사회불안장애에 관한 영상을 모두 시청했다. 심리상담사 유튜버인 웃따 님은 사회불안을 직접 겪고 극복하신 분인데, 자가치료를 위한 7가지 실천법을 제안해 주셨다.

(전체가 궁금하다면 이 영상으로: https://youtu.be/OFjn_E6gtz0)


그중 나는 3번째인 ‘생각일지 쓰기’에 주목했다. 아무 생각이나 두서없이 쓰는 건 아니고, 불안을 겪을 때마다 그 순간의 감정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방법이었다.


기록은 A, B, C, D, E의 5단계로 진행한다. A는 불안했던 상황, B는 불안을 점수로 매긴다면 10점 만점에 몇 점인지, C는 당시의 감정, D는 자동적 생각(위협적인 의심), E는 합리적 생각(위협을 제거한 정상적인 생각)을 순차적으로 쓰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뒤 엄습했던 불안감을 5단계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A. 불안했던 상황
    내면 깊숙한 곳에서 뽑아낸 개인적인 글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브런치에 올리는 것

B. 불안점수
    (10점 만점에) 7점

C. 감정
    걱정됐다 / 부끄러웠다 / 민망했다 / 왜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 포기하고 싶었다

D. 자동적 생각
     남의 잘 쓴 글과 비교될 것 같다 / 심리학 전공자도 아닌 사람이 심리 얘기를 하니 우스워 보일 것 같다 / 정신질환 경험담을 쓰는 나를 불쌍하게 여길 것 같다

E. 합리적 생각
     남들은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없다(내가 남한테 관심이 없듯이) / 경험담을 얘기하는 데 자격증이 필요한가 / 내가 정신질환 경험담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나를 불쌍하게 여긴다는 증거는 없다


나는 이 단순하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은 치료법을 ‘불안일기’라 부르기로 했다. 직접 써 보면 알겠지만, A와 B까지는 쉬워도 C부터는 나의 깊숙한 감정을 들여다보기가 덜컥 겁이 난다.


사실 상습적으로 찾아드는 불안을 버티는 가장 쉬운 방법은 회피다. 도망가거나 무시하거나 서둘러 잊어버리는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인데, 그간 내 불안을 내가 들여다보지 않으니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른 채 항상 패배하며 살았다.


이 글은 프로 불안러가 더 이상 불안을 숨기는 데 급급하지 않기 위해 쓰는 글이다. 나는 18년 동안 ‘불안하지 않은 척하는 법’만 습득했다. 평범함을 연기하는 삶으로는 어찌어찌 먹고살 수 있을지 몰라도 성장과 행복을 추구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불안일기의 5단계를 응용한 프로 불안러의 에세이를 연재해 볼 생각이다. 오늘은 인트로 겸 첫 글에 대한 불안을 억누르기 위해 변명하듯이 나의 과거를 끌어와 긴 글을 썼지만, 다음부터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짧고 소소한 치료 과정을 담게 될 것 같다.


웃따 님이 제안한 7가지 치료법 중 5번째는 ‘노출’이다. 공포심은 불안한 상황에 노출되기 직전에 가장 심해지지만, 막상 실제로 노출되고 나면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수그러든다. 그러니 의식적으로 노출을 꾸준히 반복해야 공포심이 점점 낮아져 최소한의 긴장만 남게 된다.


내게 있어 불안일기는 치료 ‘도구’이고, 브런치에 올리는 행위는 ‘노출’이다. 에세이 형태로 다듬으려는 이유는 브런치의 분위기에 맞추고 싶기도 하고, 글쓰기를 연습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왕 시간을 들여 도전한다면 꿩 먹고 알도 먹는 게 좋지 않은가.




불안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 불안이 당신의 발목을 잡고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는 수준이 아니라면, 당신은 한 가지의 축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동경하며 당신처럼 살고 싶다.


만약 당신이 나만큼 불안의 늪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평범한 척이 아닌 진짜 평범함을 가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믿음을 나눠 주기 위해 실천해 보고 싶다. 나의 작고 미미한 노출들이 모이고 모여서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지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 묵직한 불안을 떨치고 프라이빗한 글을 공개해 본다. 다음에도 내가 나의 불안을 노출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이 글을 읽은 당신이 마음으로 지지해 주신다면 너무나 감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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