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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Jan 26. 2021

칸쿤에서 온 기념품

아침부터 리조트 풀장 옆에 자리 잡고 앉은 우리는 뷔페에서 끊임없이 음식을 담아와 두 시간째 자체 파티를 벌이는 중이었다. 정오가 채 되기 전, 벌써 맥주 두 병을 비운 나는 안주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쉴 새 없이 각종 요리를 담아오고 있었다. 해안가답게 오징어와 새우, 튀긴 생선요리부터 타코와 파지타 치킨 등 멕시코 요리는 물론 피자와 파스타를 비롯해 초밥과 쌀국수 된장국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새하얀 모래사장과 옥색 투명한 구슬처럼 빛나는 바다, 리키 마틴 Ricky Martin과 샤키라 Shakira가 끊임없이 흥을 돋우는 이 곳은 칸쿤 Cancún의 어느 올 인클루시브 리조트 All-Inclusive Resort였다.


주변 테이블에는 커플 혹은 가족 단위 리조트 숙박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보였다. 우리 같은 동양인이나 멕시코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은 음식만을 테이블에 두고 잡담을 하고 있었다. 우리 커플만이 본격적으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역시 멕시코라 그런지 타코가 기가 막히네.”


마가리타와 타코를 양손에 잔뜩 든 채 나는 아내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수영복 위로 튀어나온 내 배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아내가 문득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 큰 리조트에서 오빠 혼자 음식을 다 먹고 있는 거지? 아무도 오빠처럼 많이 먹는 사람이 없어. 이상하지 않아?”


과연 드넓은 리조트에서 나 혼자만 여물통에 매달린 돼지처럼 음식을 계속 퍼먹고 있었다. 시계는 열한 시 반을 조금 넘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충분히 점심시간이라고 볼 수 있는 시점이었는데 나 혼자만 계속 먹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하긴 했다.


글쎄, 일주일 내내 너무 많이 먹어서 물린 게 아닐까. 대충 얼버무리며 메로구이와 타코를 양손에 들고 차례로 입에 밀어 넣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뷔페 테이블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워킹 데드 Walking Dead>에 나오는 대규모 좀비 떼처럼 한 곳을 바라보며 몰려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내와 나는 순간적으로 눈빛을 교환한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무언가 기가 막히게 맛있는 음식이 나온 것이 분명했다. 맛있는 음식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좀비 떼에 합류해 함께 뷔페 테이블을 향해 행진했다. 과연 뷔페 테이블에 무언가 큰 쟁반들을 놓고 사라지는 한 무리의 요리사들이 보였다.


뷔페 테이블에서는 진정 <워킹 데드>의 한 장면 같이 소리 없는 음식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들 문명인답게 최대한 순서를 지키려고 하고 있었지만 심하게 서두르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그런데 문제의 음식이 있는 쟁반을 살펴본 우리는 크게 실망했다. 그곳에는 얼마 남지 않은 햄버거 패티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멕시코까지 와서 이렇게 숨 넘어가게 맛있는 타코와 파지타를 두고 햄버거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제 타코를 먹었기 때문에 오늘 햄버거를 먹는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햄버거를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뷔페를 먹지 않은 이유는 잠시 후 나올 햄버거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칸쿤은 멕시코가 아니야. 여긴 미국인 것 같아.”


미국인들에게 햄버거란 우리로 치자면 국밥 같은 느낌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그리운 소울푸드 같은 느낌 말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마무리는 국밥으로 해야 하듯 미국인들에게는 햄버거가 필요했으리라. 우리는 칸쿤까지 날아와 햄버거를 먹는 미국인들을 향해 혀를 내두르며 남은 타코를 마저 해치웠다.


매일 햄버거를 먹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미국인들 덕분에 우리는 휴가기간 내내 비교적 수월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리조트에는 뷔페뿐만 아니라 각종 레스토랑도 있었는데, 예약을 통해서만 식사가 가능한 구조였다. 미국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버거와 바비큐 레스토랑 대신 해산물 레스토랑이나 멕시칸 레스토랑을 더 선호했던 우리는 큰 경쟁 없이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휴가 마지막 날까지 순조로운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는 칸쿤을 떠나기 전 리조트를 나와 시내를 산책하기로 했다.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거리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어슬렁 산책을 즐기던 도중 우리는 길거리 노점에서 나무 열매로 만든 작은 동물 조각을 파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멕시코에서 자라는 마카다미아 너츠 열매를 주워다가 작품을 만든다며 자신이 만든 장난감 인형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만져보니 과연 두꺼운 도토리 같은 단단하고 유기적인 질감이 느껴졌다. 열매껍질에 정교하게 구멍을 내어 실로 각 부위를 연결하고 물감으로 색을 입혀주면 두툼한 껍질은 귀엽고 깜찍한 인형으로 둔갑한다고 했다.


칸쿤을 추억할만한 기념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우리는 아르마딜로 한 쌍과 사슴 한 쌍을 집어 들었다. 한 마리에 삼천 원 정도 했으니까 만 이천 원 정도를 주고 네 마리를 업어온 셈이었다. 멕시코 물가 치고 싼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념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얘들을 멕시코 도토리라고 부른다


칸쿤을 다녀온 뒤 우리는 일상으로 복귀했고 오 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새로운 도시로 이사했고 새로운 직장도 갖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칸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갈 때쯤, 당시의 추억이 강제로 소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와 같은 층에서 일하는 한 직장 동료의 책상에서 멕시코 도토리로 만든 파란색 아르마딜로를 발견한 것이다.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오래된 추억이 소환되자 감회가 새로웠다.


“크리스틴, 너 멕시코 다녀왔구나!”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뜬금없는 한마디에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저 도토리 인형 말이야. 저거 칸쿤에 있는 로컬 아티스트가 만든 거잖아. 나도 집에 도토리 아르마딜로 두 마리가 있는데 네 것처럼 파란색은 아니고 노란색이랑 초록색이야!”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나 이거 길 건너 액세서리 가게에서 산 건데?”




우리는 새로운 경험과 발견, 신나는 이야깃거리와 약간의 모험을 기대하면서 여행을 떠난다. 떠나기 전에는 인디아나 존스 Indiana Jones라도 될 것처럼 꿈에 부풀어 있지만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면 낯선 광경에 익숙한 것들을 찾는다. 괜히 스위스의 융프라우 Jungfrau 산 정상에서 신라면을 파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카리브해의 태양이 빛나는 칸쿤에서 잭 스패로우가 마시던 럼주와 문어 요리 대신 맥주와 햄버거를 맛보고 싶어 한다. 적당히 낯설지만 안전하다고 느끼고 안심할 수 있는 여행을 원한다.


매일 출근하는 회사 앞에서 파는 도토리 장난감을 사러 우리는 멕시코를 여행하고 칸쿤 시내를 탐험하기도 한다. 목숨을 걸고 무너져가는 캄보디아 고대 지하 사원의 비밀 동굴에서 들고 나온 신비의 돌이 사실 양재 꽃시장에서 오천 원에 파는 장식용 수석이었다는 이야기도 분명 사실일 것이다. 멕시코에 온 줄 알면서도 햄버거를 먹는 사람들과 우리 동네에서 파는 장난감을 멕시코에서 기념품으로 사 오는 사람들 중에 누가 더 바보일까.


어린 시절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을 인상 깊게 읽었다. 돈을 벌기 위해 멕시코에 간 조선인들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인가. 멕시코에 갔던 그 조선인들의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송일곤 감독의 다큐멘터리 <시간의 춤>은 또 얼마나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던가. 멕시코에 가면 <검은 꽃>과 <시간의 춤>이 주는 낭만과 페이소스를 마음껏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이 비록 리조트일지라도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상에 찌들어 편안한 리조트에서 쉬고 싶었던 마음과 드넓은 유카탄 반도에서 멕시코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었던 두 마음이 갈등 끝에 어설프게 합의를 본 결과물이 칸쿤 리조트였다. 멕시코 도토리 인형들이야말로 어설픈 여행의 취지에 걸맞은 어설프고 사랑스러운 기념품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칸쿤이 좋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들었다.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야 하고 경비도 많이 드는 탓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없었기 때문인지 이야기는 격하게 부풀려져 칸쿤은 마치 환상의 도시 같이 느껴졌다. 지금도 유효한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칸쿤이 신혼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멕시코와 가까운 미국에 와보니 미국 친구들은 한국과 일본, 동남아를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푸켓의 피피섬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했다는 점을 무척 부러워했다. 내가 어린 시절 관광버스로 여행했던 제주도는 그들에겐 꿈의 섬이었다. 반면 그들은 나의 칸쿤 여행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태국과 멕시코의 리조트를 모두 가 본 내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휴양지 관광도시는 다 거기서 거기, 도긴개긴이다. 굳이 뽑자면 한국에서 쉽게 갈 수 있기에 좀 더 쉬워 보이는 푸켓이 사실 더 역동적이고 재미있었다.


한국을 떠난 지 십 년이 지난 지금 내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는 제주도와 몽골, 그리고 캄보디아다. 한국에 있을 때 비행기로 반나절이면 갈 수 있었던 그 가까운 곳들을 왜 한 번도 가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아쉽기만 하다.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이면 갈 수 있었기에 현무암 돌덩어리인 줄만 알았던 제주도는 먼 곳에서 바라보니 빛나는 보석이었다. 그렇게 칸쿤을 추억하며 나는 시 한 편을 썼다.



제목: 칸쿤의 추억


칸쿤까지 왔지만 결국 햄버거를 찾는다

칸쿤까지 왔지만 결국 우리 동네에도 있는 장난감을 고른다


미국 사람들은 푸켓을 동경한다

한국 사람들은 칸쿤을 동경한다


와보면 알 것이다

둘 다 똑같다


결국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을 멀리서 찾는다



다음 여행길에는 어떤 새로운 기념품, 아니,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 글의 제목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시면 아래의 글을 읽어보세요:

아무 말 대잔치 주최 측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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