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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Dec 08. 2020

테킬라 살사 크리스마스

조용히 저녁을 먹으러 나왔던 우리 앞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먹자골목 안의 음식점과 술집들은 단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관광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두운 골목 안에 노랗게 가스등을 밝힌 그 술집은 마치 팀 버튼 Tim Burton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묘하고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엄청난 인파였다. 오십 평 남짓한 가게 안은 수백 명의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현관은 테이블을 기다리는 손님들로 몹시 혼잡했다. 현관 바로 앞의 바는 껄껄 웃으며 테킬라를 들이켜는 중년 아저씨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두 명의 바텐더는 흡사 묘기라도 부리듯이 술과 음료를 서빙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정신을 쏙 빼놓을듯한 살사와 라틴댄스 음악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 옆의 아늑한 홀에는 원형 테이블이 열 개 정도 있었는데, 한 테이블도 빠짐없이 손님으로 가득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각 테이블 위에는 나초칩을 곁들인 맥주와 테킬라 칵테일이 가득했다. 그중 몇몇은 엄청난 양의 푸에르토리코 Puerto Rico 음식을 곁들여가며 배를 채우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흥이 잔뜩 오른 사람들은 홀 중앙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골목에서 봤을 때는 팀 버튼 영화인 줄 알았는데, 들어와 보니 <황혼에서 새벽까지 From Dusk till Dawn>에 나오는 바 같았다. 차이점이라면 이곳이 훨씬 더 심하게 흥이 올랐다는 것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호떡집에 불이 난 듯 시끄러운 홀에 반쯤 정신이 나가 멍하게 현관에 서 있는 우리에게 종업원이 소리를 지르며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정신이 든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고 싶은데 테이블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삼십 분 정도 기다리면 자리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바에서 한 잔 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바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서서 팔만 걸치고 있는 사람들로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주변을 일분 정도 맴돌다가 겨우 바 근처로 비집고 들어온 우리는 바텐더에게 절규하듯이 외치며 마가리타 두 잔을 시켰다. 바텐더는 고된 훈련 중인 군인 같은 얼굴로 우리에게 윙크를 하더니 잠시 후 마가리타 두 잔을 만들어왔다.


“실례지만 지금 여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나는 옆에서 시종일과 껄껄 웃으며 테킬라를 입 안에 털어 넣는 한 중년 남성에게 물었다. 폴댄서는 없었지만 여긴 티티 트위스터 Titty Twister가 분명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우리가 관광객인 것을 이내 알아차리고 웃으면서 소리쳤다.


“보시다시피 파티 중이에요!”


“무슨 파티죠?”


당신들 혹시 뱀파이어 아니쇼 라고 묻고 싶었지만 다른 질문이 나갔다. 웃음을 멈춘 엄청난 덩치의 그 남자는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하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크리스마스 파티예요! 오늘이 첫째 날이죠. 오늘부터 시작해서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쭉 파티를 합니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12월 16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무려 일주일 동안 파티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어이 없어하는 우리를 보고 조금 멋쩍었는지, 남자가 한 마디 덧붙였다.


“매년 이렇죠. 푸에르토리코에선 항상 이렇게 일주일 내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답니다!”


또 다른 테킬라 샷을 한 입에 털어 넣은 남자는 또다시 껄껄 웃으며 일행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의 커다란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테킬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바텐더를 향해 소리쳤다.


“빠뜨롱 아녜호 Patron Añejo, 더블로!”


스트레이트 테킬라가 몇 잔 들어가자 절로 흥이 올랐다. 난생처음 보는 세상 신나는 파티였다. 신이 난 채 낄낄거리면서 목청을 높이는 나를 향해 아내가 실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술이 꽤나 올랐다는 생각이 들 무렵 아까 대기 명단을 작성했던 종업원이 다가와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홀에 흐르는 신나는 라틴댄스 음악 덕분에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손님들은 저마다 파트너와 함께 일어서서 살사 댄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우리 테이블 주변도 예외는 아니라 우리는 춤바람 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우리를 자리로 안내한 종업원은 수저 대신 주머니에서 고깔모자 두 개와 파티 호른 party horn을 꺼내 우리 손에 쥐어주었다. 이미 거나하게 술이 올라 흥이 절정해 달해 있던 우리는 서로에게 고깔모자를 씌워주고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싸구려 반짝이로 장식된 파티 호른을 입에 물고 바람을 훅 불어넣자 말려있던 비닐 막대기가 정신이 바짝 든 듯 쭉 펴지면서 ‘빼액’ 소리를 냈다. 막대기가 빽빽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우리는 장난꾸러기 중학생들처럼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에게 고깔모자를 주었던 종업원이 중요한 일을 잊은 듯 황급히 돌아와 우리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같이 춤 배워볼까?”


불쑥 새해 첫날 아침부터 아내는 도발적인 화두를 던졌다. 나나 그녀나 춤이라고는 담쌓고 살아온 인생에 뻣뻣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간들 아니었던가. 어쩐지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딱히 자신도 없었기에 나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아내는 마음을 이미 결정한 듯싶었다. 그녀의 은근하면서도 집요한 독촉에 우리는 1월의 첫째 주가 지나기 전 동네의 볼룸댄스 학원을 방문했다.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새하얀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강렬하게 바른 여성이 다소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춤을 배울까 알아보러 왔다는 우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바로 찾아왔다는 듯 우리를 데리고 연습실 한가운데로 데려갔다. 50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연습실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빈틈없이 붙어있는 거울은 우리가 얼마나 춤에 취약한지 그 실상을 낱낱이 고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슨 자세를 취해도 잘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춤 선생님과 웃고 떠들며 한 시간을 보낸 뒤, 우리는 엉겁결에 10회 커플 레슨 패키지를 구매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댄스 학원 구경만 하려고 들렀던 우리는 현란한 선생님의 조련에 어느새 학생이 되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게 다 아내의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매주 두 번의 단체 수업 수강과 한 번의 커플 레슨 수강 스케줄을 짠 뒤 학원을 나왔다.


우리는 매주 두 번에서 세 번 정도 학원을 나가 볼룸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단체 수업에서는 약 열명에서 스무 명 정도의 남녀가 함께 모여 춤을 배웠다. 먼저 춤의 기본 동작을 익히고, 단체 연습 시간이 되면 남성 그룹과 여성 그룹이 돌아가며 짝을 짓고 춤을 추었다. 커플 수업은 오로지 아내와 나 두 사람을 위한 개인 레슨 시간이었는데 우리는 좀 더 어려운 춤 동작들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연습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내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춤을 잘 춘다는 사실이 레슨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춤을 못 추고 파트너 탓을 잘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아내는 춤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듯 보였다. 무엇보다도 우리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를 찾았다는 점에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반면 미녀와 춤을 출 기회가 가끔 찾아온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나는 딱히 댄스 학원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춤을 배우는 것 자체는 꽤나 재미있었지만 매주 수십 명의 사람들과 마음에도 없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춤을 춘다는 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춤 선생님이 은근히 추가 등록이나 댄스 경연대회 참가 등을 하라고 부추기며 추가 회비를 걷고 싶어 하는 점도 짜증스러웠다. 우리가 함께 춤을 배우는 것을 아내가 마음에 들어한다는 점이 내가 춤을 배우는 거의 유일한 이유였다.


일 년 정도 꾸준히 춤을 배운 우리는 학원에서 개최하는 대회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경쟁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대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호텔의 연회장을 대관하고 의상을 갖추어 입은 채 출전하는 번듯한 대회였다. 아내는 꽤나 그럴듯한 자세와 안정적인 춤 실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툴툴거리며 학원을 따라다니던 나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모양새가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날 왈츠와 살사 댄스를 함께 추었다.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자연스레 춤추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사물놀이 패거리가 장단을 연주하면 절로 어깨가 움직이는 한국 사람들처럼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살사 음악에 반응하는 듯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은 타고난 살사 댄서들이었다. 그들이 홀에서 각양각색으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문득 몇 년 전 그만둔 댄스 학원이 생각났다. 우리는 일 년 넘게 꾸준히 다니던 학원을 댄스 대회 참가 직후 그만두었다. 아내는 좀 더 배우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대회도 참가할 만큼 배웠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춤을 추자고 했지만 우리는 그 후 한 번도 함께 춤을 춘 적이 없었다.


맥주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나는 벌떡 일어나 탁자 맞은편에 앉은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뜻 밖의 춤 신청을 받고 당황한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가게 안은 이미 춤을 추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 인파에 합류하는 데에는 두 걸음이면 충분했다.


“빠바바 밤빠바밤바 빠 빠밤바, 빠!”


남자는 왼발, 여자는 오른발. 가볍게 입으로 두 박자를 센 우리는 정신없는 속도의 살사 음악에 맞춰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몇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푸에르토리코의 영혼에 빙의된 듯 짜릿한 살사 음악에 맞추어 손발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우리는 살사를 추는 한 무리의 푸에르토리코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었다. 옆에서 춤을 추던 나이 지긋한 커플이 신기한 듯 우리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아내와 나도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우리는 이 순간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살사를 배웠던 것이다. 어쩌면 이 찰나가 우리가 마흔여덟 명의 푸에르토리코 사람들과 한데 모여 살사를 추는 인생의 유일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했다. 이 짧은 순간을 위해서라도 값비싼 일 년 여의 댄스 레슨은 그 값어치를 다 했다고 말이다.


음악이 끝나고 자리에 돌아와 앉자 기다렸다는 듯 저녁식사가 나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단 하나의 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살사임을 공감하며 우리는 마가리타 잔을 마주 부딪혔다. 우리가 서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새로운 커플이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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